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0:28:04

오취마을

고흥군 취도
오취마을
梧翠마을 | Ohchwi-village
<colbgcolor=#29A8E1><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전라남도
기초자치단체 고흥군 포두면
면적 면적 1.05㎢
해안선 해안선 5.5㎞
최고봉 최고봉 143m
소셜미디어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3. 지명4. 민속문화5. 교통
5.1. 고흥읍 → 오취마을5.2. 오취마을 → 고흥읍
6. 특산물
6.1. 굴6.2. 기타
7. 유명인8. 관련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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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오취마을 이정표.jpg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에 위치한 마을, 현지 사람들은 오취마을을 "하오"라고도 부른다.

1903년에는 여천군 봉래면에 속해 있다가 고흥군으로 이관 전입 되었고, 1912년에는 돌산군 오취도로 표기되어 있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 행정구역 폐합시 오취(梧翠)리로 편입 되면서 1918년까지 고흥군 오취도(梧翠島)로 표기되었다. 해방 후 1956년 마을로 분동하고 196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두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8년 지명 조치에 따라 여러 후보[1] 중 오취마을로 확정 개칭되면서 오늘날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오취마을이 되었다.



2. 역사

최초 기록은 1789년 오동도(梧洞島)로 표기되어 있으며, 오동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황이 이 오동나무를 좋아해 비봉산 암황이 살았다는 전설[2]이 전해지는데 섬에 꿩이 많아 이 꿩을 보고 봉황으로 착각한 듯 하다.

호남도서도 "호남 연해형편도(1780년)"에 따르면 1490년 경 창원황씨가 어장이 풍성한 취도를 찾아 최초로 입도했다 전해지며, 숙종말(1720년 경) 농지 개간 장려 정책에 의해 경주 정씨, 경주 이씨, 김해 김씨, 광산 김씨, 밀양 박씨 순으로 입도해 황무지를 개간해나가며 전답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여러 씨족이 오가며 부락이 커져갔다.

19세기 초 이양섭씨의 집터를 파던 중 발견한 무인 남평 문씨의 검 한자루와 이형주씨의 산에 있던 남평 문씨 표석을 미뤄보건데 오늘날 본동(취도 남서쪽 해안 일대)자리에는 남평문씨가 처음 살기 시작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듯 하였으나 1942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에 의해 인적 물적 자원 수탈이 강화 되었고 오취마을 역시 생산량의 70~80%가 넘는 쌀을 공출해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으며, 정준기씨가 가장 먼저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주민의 90%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일부 잔당들이 고흥군 팔영산에 숨어들어 밤마다 인근 부락민들을 약탈하다 점암면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해 소탕되었다. 이후 군인들이 오취마을까지 들어와 주민 전체를 모아 놓고 공포탄을 쏘며, 젊은 남자들을 차출해 구타하며 공포감을 조성하며 계속해 감시 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인 즉슨 오취마을에서 모범적이였고 영리했던 청년 6명이 해방 후 취직 할 곳이 없어 군경비대로 여수 14연대에 입대 했는데 하필 사건이 발생해 군경비대에 취직한 오취마을 청년 6명 중 4명이 죽고 2명을 살았다고 한다.

오취복지회관(오취리 284-10)자리에 서당이 있었으며, 당시 두원면에서 훈장이 왔는데 "유접장" 내지는 "꼬막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고급 화강암질 섬으로 1983년 독생금 일대에 일본 수출용 석산이 개발 되었고 채석 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984년 입도 다리가 생겼다. 그러나 석산 개발로 인한 밤낮 없는 소음과 무허가 무작위 채석으로 바다가 죽어나가 이를 막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다 함께 의기투합해 석산 폐쇄 청원운동을 했다. 그러자 경찰에서 이를 막기 위해 섬을 봉쇄 하였으나 야간 저조에 갯벌을 통해 섬 밖으로 탈출하는 등 청와대에 3번이나 올라가 청원운동을 했고, 결국 석산 개발을 섬에서 몰아냈다.



3. 지명

  • 독생금 : 금이 나올 곳이라고 붙여진 언덕
  • 농금포 : 마을 동쪽에 있던 포구
  • 사장등 : 사장나무(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내는 나무[3])가 있는 언덕
  • 당산 :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모시던 뒷산
  • 홀안 : 파도를 피해 어선을 세우던 곳
  • 논금(논끄미) : 쌀이 처음 생산된 논이라고 붙여진 평지
  • 생금(생끄미) : 맑은 물이 나오는 샘
  • 진골 : 긴 산골짜기
  • 무지길 : 취도 입도(入島) 다리



4. 민속문화

  • 오취당산제 : 정월대보름 지내는 당제로 밤1시에 산신제를 모시고 낮에 마을 중앙에 위치한 정자 나무 아래 사장에서 삼헌관들이 앉아 수호신에게 제사(매귀)를 지냈다. 시대가 변하여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신제가 생략되었고, 2013년부터 당산제는 모시지 않게 되었다.
  • 오취농악(풍물) : 농악은 일명 매굿이라고 한다. 꽹가리, , 장구, 북(악기) 4가지 악기를 중심으로 25명 정도 청장년들이 마을 곳곳을 돌며 가락을 쳤으며, 노래와 재담, 재주 등 연극적 요소가 함께 진행되었다. 대개는 설날부터 보름까지 농악을 했으며, 1970년대 이후 사라졌다.
『오취연혁(2012)』[4] 中 발췌 : 농경과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나 어업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있었다. 또, 사람들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숭배와 조상숭배를 중시했으며,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마을뒷산 명단에 당산제단을 만들고 부락의 중심지인 느티나무 아래 사장에 제단을 지어 수호신에게 제사를 모셨다...(중략)...마을에서는 새해 정월 보름날을 공사일(회의일)로 정해 이날 전년도 경비 내역을 심의 승인하고 약간의 신상필벌도 논의했으며, 당일 구장과 당산제 제주를 선출했다. 이러한 관행행사도 1950년대부터 급격히 퇴화되어 사라지고 근대에 와서는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모여 민주주의 방식으로 이장을 선출하게 되었다...(중략)...이러한 몇가지 문화 속에는 오취마을 사람들의 얼과 슬기와 멋이 함축된 채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아온 지행의 복합채라 할 수 있다. 사라져가는 문화는 아름답다.



5. 교통

고흥공용버스정류장에서 "포두·하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종착역(하오)에 내리면 오취보건진료소 앞에서 내릴 수 있다. 잘 모르겠다 싶으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된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버스시간이 다르다.

파일:오취보건진료소.jpg

5.1. 고흥읍 → 오취마을

고흥터미널 06:10 출발 → 하오 06:40 도착 (공휴일 미운행)
고흥터미널 07:35 출발 → 하오 08:05 도착
고흥터미널 09:40 출발 → 하오 10:30 도착
고흥터미널 11:40 출발 → 하오 12:15 도착 (공휴일 미운행)
고흥터미널 13:35 출발 → 하오 14:20 도착
고흥터미널 16:35 출발 → 하오 17:05 도착
고흥터미널 19:00 출발 → 하오 19:30 도착

5.2. 오취마을 → 고흥읍

하오 06:40 출발 → 고흥터미널 07:10 도착 (공휴일 미운행)
하오 08:05 출발 → 고흥터미널 08:50 도착
하오 10:30 출발 → 고흥터미널 11:00 도착
하오 12:15 출발 → 고흥터미널 12:50 도착 (공휴일 미운행)
하오 14:20 출발 → 고흥터미널 17:40 도착
하오 17:05 출발 → 고흥터미널 17:05 도착
하오 19:30 출발 → 고흥터미널 20:00 도착



6. 특산물

청정한 오취마을 일대에서 생산 된 해산물과 농산물.

6.1.

오취마을에서 생산되는 굴은 전 과정이 전통 방식으로 생산 되는 탓에 통영시와 비교해 생산량이 많지 않은데 반해 맛이 좋아 미식가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으며, 전라도 사람들이 자기들 끼리만 먹으려고 "고흥굴이 통영굴 보다 맛있다"는 소문을 안 낸다는 말이 있다. 실제 서울 가락시장에 올라온 고흥 굴은 다른 지역 굴과 비교해 kg당 가장 높은 가격을 받는다.

오취마을 굴 양식장은 물살이 얕은 바다 바닥에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이 깔려 있는데 통영 굴 양식장에는 모래가 깔려있음 이 갯벌에서 올라 온 영양분의 영향으로 굴에서 단맛을 난다. 현지 사람들은 굴을 "꾸울~"이라고 발음하는데 그만큼 달고 맛있다는 거지

파일:오취마을 굴.jpg

현지 사람들은 생굴을 먹을 때 초장 보다 기름장에 찍어 먹으며, 굴구이, 굴꼬치 등을 해먹고 진석화젓[5]을 담아 먹기도 한다.

최근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 고온의 영향으로 굴이 집단 폐사하는 문제가 발생해 어민들의 시름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6.2. 기타

  • 갯장어(하모) : 갯장어
  • 바지락 : 현지 주민들은 바지락을 "반지락"이라고 발음한다.
  • 해창미 : 해창만에서 생산한 쌀은 청정한 토질과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속에 생산된다.



7. 유명인




8. 관련보도


[1] 오동도, 취도, 치도, 하도, 하오, 우아리도, 오취, 오취부락, 오취마을[2] 길두리 비봉산의 봉황새가 살아서 숫봉은 오도 암황은 취도에 살았다는 풍수설이 전해진다.[3] 1985년 수호신을 상징하는 느티나무가 말라죽어 2001년 포두면 봉림마을에서 사장나무을 다시 구입해 심었다.[4] 노인회장 정갑석씨가 작성한 오취마을 역사서[5] 고흥 향토음식으로 품질이 뛰어나 조선시대 궁중의 신상품으로도 올려졌다고 한다.[6] 멜로다큐 <가족> 382회 섬 마을 첫 사랑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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