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3:03:08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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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s-6|ザ・プレミアムベ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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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s-7|ゴールデン☆アイド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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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田有希子 Mariya's Songbook|岡田有希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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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d><colcolor=#fff>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岡田有希子自殺事件
발생일 1986년 4월 8일 오후 12시 15분경
발생 위치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4초메 28-17, 선 뮤직 프로덕션[1]
(東京都新宿区四谷4丁目28-1, サンミュージックプロダクション)
유형 투신자살
원인 미제사건
인명피해 사망 1명

1. 개요2. 사건 직전3. 사건 당일
3.1. 1차 자살시도3.2. 2차 자살 시도와 자살 뉴스 보도
4. 후일담
4.1. 방송·미디어
4.1.1. 공황 윳코 신드롬
5. 자살을 둘러싼 많은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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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일본쇼와 시대 정통파 아이돌이었던 오카다 유키코가 갑작스럽게 투신자살미제사건이다.

2. 사건 직전

4월 12일에 개최되는 단독 콘서트를 위해 매일 새벽 3시까지 선 뮤직 프로덕션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2]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와 くちびるNetwork 무대[3]
어린이: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질문합니다! 몸은 말라서 작은데 어째서 가슴은 그렇게 크신 건가요?

오카다 유키코: 아, 아뇨...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전혀 마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크지 않아요.

야쿠마루 히로히데: 커.

오카다 유키코: 그렇지 않아요.

하야미 유: 그래도 괜찮죠.

오카다 유키코: 평범해요, 진짜로.

사회자: 자신을 가지는 게 좋아.

출연자: 맞아 맞아, 자신 있는 편이 좋지.

사회자: 얼마?(=몇 사이즈)

오카다 유키코: 에? 보통이에요. (손을 둥그렇게 말면서) 두 개.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 인터뷰 中

사건 나흘 전인 1986년 4월 4일, 소속사 선배 아이돌 하야미 유와 남자 아이돌 그룹 '시부가키대'와 함께 '스타 깜짝 인터뷰(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라는 일반 어린이들이 스타들에게 질문을 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유키코의 모습을 보면 곡을 부르는 와중에도 눈에 힘이 없고 다크 서클 또한 보인다. 방영은 추후에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화면에 유키코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막[4]이 송출되었다.
파일:E8OymLhUYAMQBl0.jpg
1986년(쇼와 61년) 4월 5일, 사카이 노리코에게 선물했던 사인 포스터.

사건 사흘 전인 4월 5일 자신의 공간을 갖고싶다는 유키코는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에서 나와 미나토구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사장의 자택에서 이삿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3일 후 사망 당일엔 유키코가 살던 방에는 곧 데뷔를 앞둔 사카이 노리코[5]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 날 저녁 아이자와 사장 자택에 놀러온 유키코는 아이자와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저는 이제 틀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신인들이 잔뜩 나와서...''라는 말을 하였고 이에 아이자와 사장 부부는 "무슨 소리냐. 너는 우리 회사의 기둥이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였는데 이에 유키코는 "위에 있잖아요... 또 한 명(사카이 노리코)이..."라고 말했다. 아직 사카이 노리코는 데뷔도 하지 않았던 여중생이였음에도. 그리고 이 날 남은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를 노리코가 갖고 싶어하였고 사인을 적어 선물로 주었다.[6]

사건 이틀 전인 4월 6일에는 이번에는 고향 나고야에서 단톡 콘서트가 개최되었고 콘서트장에서 유키코의 본가까지는 가까운 거리였기에 잠시 본가에 들러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식사를 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았는데 유키코는 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평소의 유키코였다면 "왜 나만 없는 거야? 힝!"이라며 가볍게 장난 섞인 짜증을 내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를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사진을 보며 장난 섞인 짜증도 내지 않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도 보지 않았으며 아무 미소도 짓지 않아서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고 사후 '사랑을 주세요'라는 책을 통해 유키코의 어머니께서 밝혔다.

당일 오후 8시 53분,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해 도쿄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을 탔는데 그때의 모습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유키코)'의 마지막 모습이였다. 이때 유키코는 부모님에게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라는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이미 데뷔 2년차인 유키코는 수익 30억 엔을 올리는 톱 아이돌이었는데[7] 고향에 살던 부모님에게 갑자기 도쿄로 오라고 말한 것은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986년(쇼와 61년) 4월 6일에 녹음한 레귤러 라디오 방송 '夜遊びしナイト!'의 마지막 방송.[8]

당일 심야에 도쿄에 도착한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회 녹음을 마쳤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향후 스케줄 보고와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파일:2017y04m02d_205123825.png
파일:yukiko.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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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망 하루 전인 1986년(쇼와 61년) 4월 7일 시부야구 판테온에서의 스케줄로 찍힌 모습.
사망 당시의 복장은 사진 속 복장 그대로였다고 한다.

4월 7일 낮에는 미나미노 요코와 영화 '여배우 프란시스'를 같이 감상하였고 오후 7시경에 시부야 판테온에서 열린 '록키 4' 시사회 참석 이외에는 스케줄이 없는 드문 날이었다. 이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자택으로 돌아온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는데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오후 10시 10분, 미조구치 매니저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8일) 예정되었던 새 드라마의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다고 알리자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라고 말하였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고 한다. 이후 오후 11시에 배우 이쿠타 토모코[9]도 전화를 걸었으나 잠시 뒤 유키코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와서 받았고 오후 11시 반,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요코가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진술했다.

3. 사건 당일

3.1. 1차 자살시도

1986년 4월 8일 오전 9시경,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에 거주하던 6층의 한 거주자가 짙은 가스 냄새를 맡았다. 이를 통보 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찾아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402호실의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던 상태에서 다급해진 관리인은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이 방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 뮤직 프로덕션. 이곳은 보통의 맨션으로 외부인의 출입도 자유롭지만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였던 유키코가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 외에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관리인은 체인락이 걸려있어 실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토 씨 괜찮습니까?" 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전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 냄새가 진동했고 한가운데 한 명의 소녀가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10] 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 자상이 두 개나 있었고 주변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에 급히 호송된 오카다 유키코. 곧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 의외로 침착했던 유키코의 반응에 의사는 곧바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휴가를 얻었던 오카다 유키코 담댕 매니저인 미조구치는 회사의 사장인 아이자와와 또 다른 매니저 야마구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해 유키코와 대면하였으나 유키코는 자살 시도의 원인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아이자와 사장에게 "유키코가 큰일이다. 키타아오야마 병원에 빨리 데리러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병실 커텐 안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싸고 울고 있던 유키코와 대면했을 때는 엉엉 울고 있기보다는 조용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느낌으로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깊은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은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를 데리고 나와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가고 싶니?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자택 맨션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무소로 갈까?"라고 묻자 유키코는 "사무소가 좋아요."라고 대답하여 사무소가 위치한 신주쿠의 요츠야로 향했다. 소속사 건물 6층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오카다 유키코. 하지만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 비서에게 철통 같은 감시를 지시하였고 오카다 유키코의 2차 자살 시도는 무위로 끝나는 듯 하였다.

이때 "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라고 부탁한 오카다 유키코. 후쿠다 전무는 사장 비서에게 이를 부탁하며 유키코를 감시하고 있었던 사람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화를 해온 사장 아이자와. 이미 자살 미수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하기 위해 후쿠다 전무까지 오카다 유키코의 옆을 떠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오카다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오카다.

"가만 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일순간의 틈에 오카다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사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휴가 중이던 오카다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택시를 타고 선뮤직 사옥에 도착했다.

3.2. 2차 자살 시도와 자살 뉴스 보도

12시 15분. 택시에서 내린 미조구치가 사옥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검은 물체가 쿵 하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다가갔지만 이미 뇌수가 터져 사방에 흔재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다만 언제나 유키코가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가 유키코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선뮤직 사옥의 위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였으며 이때 유키코가 먹고 싶다던 스트로베리 주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현장을 보고 기겁해 구토했다.

"유키코, 유키코!" 눈물을 쏟아내는 매니저 미조구치.

오후 12시 20분경, 사건 발생 5분만에 곧바로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고도 아니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구 요츠야에 있는 자신도 소속된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도시락 가게가 있었는데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가스 중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을 당일 오전에 보도되어 기자 무리들도 그 앞에서 몰려있었기 때문에 유키코의 투신자살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이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인가가 사람인 줄 모르고 검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으나 눈 앞에 있는 것이 투신자살한 시체임을 깨닫고 구토하였으며 특종을 위해 잠복해 있던 한 기자는 유키코의 사진을 얻어갔다.

매니저 미조구치는 그녀의 참담한 마지막 모습을 매스컴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회사로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 사체를 수습하였다. 하지만 미조구치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에 하필 황색언론 기자들이 현장을 촬영하여 미디어에 기재하였다.[11]
오카다 유키코 양, 18살인데요. 데뷔한 지 이제 3년째입니다. (중략) 오늘 12시 15분 소속사 선뮤직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입니다. 오카다 양은 자살하기 전에 한 번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맨션 사진) 여기는 유키코 양이 살던 맨션입니다. 여기서 가스를 틀고 손목을 긋고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별로 심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소속사에 돌아와서 오던 중 뛰어내렸습니다.

(현장)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만, 매니저가 뛰어내린 걸까요? [자막: 이 때는 매니저가 떨어진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확인 결과 오카다 유키코 양이었습니다]
저기는 여성의 시체가 있습니다. [전화: 지금 누가 뛰어내렸나요? 매니저일지도 모른다?]
선뮤직에 가보겠습니다. 5층일까요?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몇 시였어? 아까? [20분쯤이었습니다]
20분? [그때 119가 왔습니다.]
여성이었죠? [네]

〈사무소로 간다〉

아 잠시만 실례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뛰어내렸나요? [오카다 유키코.]
죄송합니다, 오카다 유키코 본인이었습니다. 매니저라고 해버렸네요.

후쿠다 전무: 그때 저와 3명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와서 제가 전화를 받고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 티슈를 찾다가 사라져서 찾다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까 뛰어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투신자살 직후의 생방송 中

생방송에선 거적이 덮힌 유키코의 시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황색언론이 극에 달하며 특종을 위해서라면 취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안달났기 때문에[12] 방송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1944~2010)[13][14]가 무리하게 취재한 작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비판을 받는다.[15]

4.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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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쇼와 61년) 4월 8일에 사망 당시 신주쿠 요츠야의 현장 전경.

시신이 수습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팬 수백 명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이윽고 그 장소는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무삭제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님이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사건 보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16]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유키코가가 데뷔 때부터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 유키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 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이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룰 정도였다.

이후 유서가 일부 노출되면서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밝혀졌고 유서 속에서 언급된 듯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峰岸 徹)[17]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 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 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 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 했나?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추상적으로라도 저는 뭐라고 할 수 없네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망한 지 이틀이 지난 4월 10일 나카노의 사찰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렀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데뷔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의 작사를 해 준 다케우치 마리야, 소속사 선배인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 가수 마츠다 세이코, 재일 한국인 작곡가 강진화, 유키코에게 준 곡이 작곡가로서는 첫 작업이었던 코무로 테츠야, 수록곡을 함께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 나고야시에 가까운 아이사이시의 사찰 조만지(成満寺)에 봉안되었다. 법명[18]은 侑楽院釈尼佳朋(유교인샤쿠니카호)로 유키코의 '유'와 '음악'의 '악', 본명인 카요의 한자 '佳'를 따서 지었는데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아이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986년 5월 발매된 잡지 '위클리 세븐'에 실린 오카다 유키코의 영결식에서 취재한 연예계 동료들의 코멘트와 모습은 다음과 같다.
파일:yukiko86.png

미네기시 토루: 오늘은 향을 피우러 온 것 뿐입니다.

타치 히로시[19]: 착하고 총명한 여자 아이였다.

킷카와 코지(吉川晃司): 신인상을 받을 때 함께였어서 도저히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음악) 장르가 달라 많이 만날 순 없었지만 동기였고 신경쓰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부가키대의 모토키 마사히로: 사망 4일 전에도 테레비 아사히 방송[20]에서 함께여서 언제나와 같이 밝게 인사했었는데. 하지만 신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라 괜찮은 걸까 하고 걱정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시부가키대의 야쿠마루 히로히데: 유키코는 혼자서 우울해지는 타입. 나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자주 얘기를 걸곤 했다. 굉장히 머리가 좋은 애라 더욱이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게 좋지 않았던 걸 수도. 여러 가지 상담에도 응했었지만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말할 수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마"라고 얘기했었는데... 죽을 거라면 그냥 연예계를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하라 토시히코: 같은 포니캐년 소속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할 기회도 많았었는데...작년에 추락한 JAL에 같이 타고 갈 예정이었는데 직전에 변경되어서 "아, 안 타서 다행이다. 럭키" 같은 얘기를 나눴었는데. (중략) 반 년 정도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모습은 있었다. 하지만 상담 같은 건 없었고 무엇에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너무 순수했던 걸까.

나카모리 아키나: (향을 피우며 계속 울고 있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오기노메 요코[21]: (충격으로 얼굴이 파래진 채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왔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 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 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연예사무소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인터뷰 中

사건 직후 선 뮤직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인터뷰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에 대해서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 왔던 연심이었다고 주장하였고 그가 2013년 별세하기 전까지도 여전히 그의 사무실 벽에는 유키코의 포스터가 걸려있었고 자신의 수첩 사이에는 유키코의 사진이 붙어져 있는 것 또한 보여주며 ”‘선 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유키코와 마지막까지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자세한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식 때 유키코의 아버지께서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 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회상하였다.

4월 10일 13시경, 도쿄도 나카노구/호센지에서 오카다 유키코 본장·고별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팬 전용 헌화대가 설치되며, 많은 팬과 연예인이 참석하며 총 7000명이 참석하였다.[22]
이제 여러분은 알고 계시겠지만요.
더 베스트 텐에 몇 번이고 나와 주신 오카다 유키코씨가 돌아가셨어요.
18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이가 좋았던 가수인 아키나짱이나 미나미노 요코
그 외 여러 가수분들이 정말 슬픔을 참고 불러주셨어요.

18살의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그 고민을 우리가 알아주지 못해서 .. 정말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TV에 나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팬 여러분 그리고 가족 여러분에게 이 슬픔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항상 밝고 정말 든든한 유키코씨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 아름답고 건강한 미소를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활기차던 때의 유키코씨의 모습을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보고, 여러분과 함께 명복을 빕니다.

유키코씨의 그 밝은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이 영원히 여러분의 마음에 남기를 기원합니다.
유키코씨 정말 고마웠습니다.

더 베스트 텐 MC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추모 인사 中

4월 10일 더 베스트 텐 회차에서는 통상회 기념 사진 촬영을 빠르게 진행한 뒤 종래의 1위곡이 아닌 유키코의 '입술 Network'가 엔딩곡으로 흐르는 가운데,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유키코를 애도하며 유키코의 모습들이 지나가며 프로그램의 엔딩 롤이 흐르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4월 12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개최된 전국 콘서트는 연예사무소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취소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선 뮤직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지만 오사카에서 개최 예정이였던 콘서트는 취소되었다.

네 번째 오리지널 앨범과 동일한 이름의 사진집 '비너스 탄생'이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악영향을 고려해 전부 회수 되었다. 또한, 잡지 '중일시대'에서는 1986년 4월호부터 유키코가 집필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지만 취소되었다. 음악 정보지 '오리콘 위클리'에서는 4월 28일호를 긴급 추모호로 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키코의 프로마이드의 판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랭킹 상위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프로마이드 판매점 '마르벨도'의 상무인 미츠자와 히로시는 "제2의 아카기 케이이치로[23]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4]

이후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려고 했으나 유키코의 유가족 측에서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25]
업투보이 1986년 5월호의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噂によるとチョロチョロ遊びまわっているらしいジャン。
소문에 의하면 찍찍거리면서 놀고 있는 것 같네요.

「人をネズミみたいに。遊んでるっていったって、お休みの日に電車に乗って遊園地行くとか、帰りにボウリングするぐらいですよ」
사람이 쥐처럼 논다고 하더라도, 쉬는 날 전철을 타고 놀이공원에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 볼링을 치는 정도에요

----ディスコとかそういうところには行かないの?
디스코나 그런 곳은 안가?

「そんな勇気ありません。いつもコンサートで踊ってるし」
그럴 용기가 없어요. 항상 콘서트에서 춤을 추고

----だけど遊園地とかボウリングとかちょっと子供っぽくない?
근데 놀이공원이나 볼링은 좀 유치하지 않아?

「ムッ!じゃあこの次はディズニーランドにします。で、帰りに映画観て、食事してー」
헉! 그럼 이번에는 디즈니랜드로 할게요.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영화보고, 식사하고-

(豊島園に行った時にバレてしまい、サイン攻勢に遭い、上手くすり抜けた話になり)
(도시마엔에 갔을 때 들켜버려서, 사인공세를 당했다가, 잘 빠져나갔던 이야기가 되어)
※ここで溝口マネージャーも登場
※ 여기서 미조구치 매니저도 등장

----逃げ足には自信あるほうなの?
도망가기에는 자신있는 편이니?

溝口さん「これがうまいんだ。いつのまにかスルスルッといなくなっちゃう」
미조구치씨 : 이것(도망가기)을 잘하는구나. 어느새 벌써 사라져버렸어

「そんなことありません。それよりマネージャー殿、お休みをもっと増やしてください。月にたった1日しかないんですよ」
그렇지 않아요. 그것보다 매니저님, 휴가를 더 늘려주세요. 한달에 단 하루밖에 없어요

溝口さん「1日しかじゃなくて1日も」
미조구치씨 : 하루 밖에가 아니고 하루도
「ちがう、1日しか、しか、しか、しか、しかッ!」
아니죠, 하루밖에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くちびるNetwork」でオリコン1位を獲得した件について)
(입술 Newwork에서 오리콘 1위를 획득한 일에 대하여)

----なにかと話題が多かった。その分プレッシャーもあっただろうな
여러가지로 화제가 많았죠. 그만큼 부담도 있겠지만요

「はい、だから1等賞とれてウレシイ!っていうより、ヨカッタ!ってかんじ。正直いって他人事みたいなとこあった」
네, 그래서 1등을 해서 기분이 좋았어!라기 보다는, 다행이다!라는 느낌. 솔직히 남의 일 같았어요

----でも、いちど1等賞をとると、また!って気持ちになるんじゃない
하지만, 한번 1등상을 받으면, 또! 라는 기분이 드는 것이 아냐

「うーん。最初っからこういうのは今回限りだなっておもってた部分あるから」
음. 처음부터 이런건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으니까요

----それじゃ、あまりにも弱気じゃない
그래도, 너무 약하진 않아

「弱気っていうんじゃなくて、よくわかってるんです。自分はまだそれほどの歌手じゃないって。でもコレがきっかけで、もっと大人の人達とかにも興味を持ってもらえたらウレシイですけどね」
나약하다는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아직 그 정도의 가수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좀 더 어른들도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잡지사 업투보이 1986년 5월호[26]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中

1986년(쇼와 61년) 5월 2일,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 '유코프렌즈'가 해산하였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있다. 이후 6월 1일 추모 사진집 '안녕 유키코'가 발매되었다.
반짝반짝한 눈을 빛내며 인사하는 유키코를 보며 이 아이는 되겠구나, 하고 저는 직감했습니다. 긴 시간 매니저를 하고 있으면 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스타가 될 지 아닐 지를. 그녀의 눈은 제가 담당했던 적이 있는 마츠다 세이코의 반짝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5배 이상을 노력하며 열심히 해왔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이코처럼 무리를 하지 않고도 그 자질이 빛나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빛을 내는 타입이며 세이코가 천재형이라고 하면, 유키코는 노력형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 지 모릅니다. 유키코는 지는 걸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집중력은 놀랄 만큼 굉장했습니다.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 그것에 몰두해 몇 번을 불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아이였기 때문에 매니저인 저로써는 전혀 관리할 필요가 없는 편한 아이였습니다.
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
여러분에게 사랑받은 오카다 유키코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여러분에겐 정말 면목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고 싶은 기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카다 유키코는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 덕에 아주 행복한 연예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응원 덕에 마침내 여기까지 와 준 오카다 유키코는 이제부터 여러분과 함께 걸음을 같이 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 오카다 유키코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주신 마음이 정말로 따스해지는 응원은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의 응원이 오카다 유키코를 향한 더할 나위 없는 공양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카다 유키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갈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2년 간의 응원,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치프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오.

미조구치 매니저[27]가 남긴 마지막 인사 中

사건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카요와 대면한 것은 요츠야서였습니다.

카요의 얼굴은 전부 포대에 둥글둥글 휘감겨 씌워져 있었습니다.

단, 입가는 붕대에 감겨있지 않아서 그 입가를 보고 저는 바로 카요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건 어릴 적부터 계속 보아온 카요의 잠든 입가 그대로였습니다.

조금은 오므라든 듯한, 부끄러운 듯한.

'카요'라고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항상 밝았던 그 목소리로 "뭐야? 엄마"라고 대답해줄 것 같은.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물론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1986년 10월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유키코 어머니의 인터뷰 中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연예계를 동경하던 1981년 유키코가 중학교 2학년이였던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 받았던 것을 주변 친구들이 질투했었고, 때마침 우상이나 다름없던 카와이 나오코가 NHK 레츠고 영 리허설 도중 추락하여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었는데 이 사실을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어머니께서 주니치신문을 보여주고 나서 믿게 되는 등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유키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만두 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파일:external/s29.postimg.org/img_0_m.jpg
もしも ゆっくり休みがとれたら 油絵を描きたい・・・
만약 긴 휴가를 받는다면 유화를 그리고 싶어요・・・

ファーストビデオで行った スイスの山々を
첫 비디오를 찍을 때 갔던 스위스의 산등성이를

まっ白なキャンバスに描きたい・・・
새하얀 캔버스에 그리고 싶어요・・・

幼い頃 どうしても画家になりたかった私。
어릴 적 어떻게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나.

いま 素顔の私に戻って キャンバスに色をほどこしていく時
지금 보통의 나로 돌아가 캔버스에 색을 입히면서

いいようのない安らぎを覚えるのです。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답니다.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에 위치한 오카다 유키코의 묘비에 적힌 직필로 쓰인 기념비 中

1988년 7월 1일,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생전 유키코가 썼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 愛をください)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책의 이름이 생전 유키코가 좋아하던 아이돌인 카와이 나오코의 곡 제목과 같다.[28]

1995년 2월 10일, 나카모리 아키나는 석간 후지에서 담당하고 있던 연재 에세이 'ふかしぎ歌姫' 제 21회에서 자신에게 뭔가 해 줄 수 없었는지, 지금도 후회된다.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2007년 2월 9일 후지 테레비의 'Dのゲキジョー 〜運命のジャッジ〜'에 출연한 타카베 토모코는 자신의 과거 사건과 유키코에 대한 생각에 대해 언급하였다.
많은 친구의 태도가 바뀌었지만, 제 주변의 정말 가까운 친구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多くの友達の態度が変わったんですけど、身の回りの本当に近い友達は何も変わらなかったです。

그것이 반대로는 기뻤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 가장 친한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それが逆にとっても嬉しかったんですね。
だから心からその親友を大事に思ったんです。

자신 가운데 1번, 힘들었던 것은, 결국, 자신을 도와주고 있고, 지지해 주었는데도, 그녀가 나에게 의지해 왔을 때에는 지지해 주지 못했다…
도와주지 못했다…
편하게 들 수 없었다… 라고 말할까요.
自分の中で1番、辛かったのは、結局、自分を助けてくれていて、支えていてくれたのにも関わらず、彼女が私に頼って来た時には支えてあげられなかった…。
助けて挙げられなかった…。
楽にして挙げられなかった…。って言うのかな。

요구하는 사람에 대해서, 눈치채지 않고 손을 내밀어 줄 수 없었던…
求められてる者に対して、気付かずに手を差し延べて挙げられなかった…。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고… 그게 정말 힘들었죠…
求められてる者に対して、気付かずに手を差し延べて挙げられなかった…。

왜 내가 지금까지 계속 말하지 않았냐면.
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거든요.
역시, 아무래도 친한 친구의 일을 말하는 것이 괴로웠어요…(눈물)
どうして私が今まで、ずうっと口にしなかったかと言うと。
私自身がどう思われるかではないんですよ。
やっぱり、どうしても親友の事を言うのが辛かったんです…(涙)

그러니까, 그게 진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이런게 아니에요.
이제, 그야말로 20여년이 지났고 말은 나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나 할까.
だから、それが真実であって、事実じゃないとかって事ではないんです。
もう、それこそ20何年も過ぎて、言葉は悪いけど、どうでも良いって言うか。

그게 아니고, 아무것도 모른채, 젊은채로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이 괴롭군요...(눈물)
そうではなくて、何も知らないまま、若いまま親友が死んでるっていう事実が辛いんですね…(涙)

그 말을 하기가 힘들어요.(눈물)
その事を口にする事が辛いんです…(涙)

2007년 2월 9일, 후지 테레비의 'D의 게키죠-'에 출연한 타카베 토모코 中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연예사무소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호주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연예사무소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격분한 나머지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몰래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アイドルとしての彼女が裏切ることがないからじゃないかな。
아이돌로서 그녀가 배신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劣化したなって思われることもないし、誰かのお嫁さんになったわけでもないし……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누군가의 신부가 된 것도 아니고…..

彼女が変わらないでいてくれるからこそ、愛され続けるのだと思います
그녀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급생이자 같은 아이돌 가수인 미나미노 요코의 인터뷰 中

유키코의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 신주쿠구의 요츠야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으며,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29]에 잠든 유키코의 묘에도 3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 번도 마를 날이 없이 꾸준히 장식된다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중후반[30]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31] 사진 속의 유키코는 여전히 10대 후반 모습으로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가장 사이가 좋았었는데,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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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헤이세이 28년) 30여 년만에 열린 팬미팅 현장.

2016년 4월부터 시작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の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9년까지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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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헤이세이 29년) 4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교차로에서 열린 사망 31주기 추모 현장.
シングルの売れ行きだけなら上回った人は何人もいる。しかし、爽やかに登場し『さぁこれから』という時にたった3年で姿を消した歌手というのは空前絶後。
싱글 판매 매출에 한정하면 훨씬 더 잘 나가던 사람은 몇 명이나 있다. 하지만 상쾌하게 등장해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여겨졌을 3년차에 사라진 가수라는 것은 전무후무하다.

ファンに夢を運び、純粋にアイドルを応援する喜びもファンに与えたが、同時にアイドルがアイドルでいることの難しさや孤独を投げかけた。
팬들에게 꿈을 실어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팬들에게 줬지만 동시에 아이돌이 아이돌로 있는 것의 어려움과 고독을 던졌다.

いなくなってさらに存在が大きくなった希有な存在
없어지며 한층 더 존재가 커진 희유한 존재

데뷔 때부터 유키코의 작곡을 담당했던 타케우치 마리야의 인터뷰 中[32]

유키코의 여덟 번째 싱글 입술 Network 오리콘 주간차트 1위라는 커리어를 달성하며 이제 막 탑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려던 찰나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고, 따라서 지금의 인지도에 비해 생전의 성적이나 커리어가 저조해 보인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또한 살아 있었다면 더욱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지만, 물이 들어올 때 노도 저어보기 전 떠난 경우는 연예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사례인 것이다. 팬에게 꿈을 안겨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아이돌로서 존재하는 고난과 고통도 던져주었으며 없어지고 나서 더욱 더 존재가 커진 존재가 되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유키코는 1986년 3월부터 적어도 1년 동안 재수를 해서 대학 입학을 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상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고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 가수에서 탤런트로 전향할 생각까지 있었다고(...) 또한 탤런트로 전향한 후에는 일을 조금씩 하고 싶다 라는 의견을 선 뮤직 프로덕션에 전달하였지만 이러한 유키코의 의견에 당황하며 지금 한창 잘나가는데 갑자기 그런 결정을 꺼낸 부분에 대해 유키코에 대한 상품성이 떨어질 우려로 급한 마음이었는지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이며 이를 통해 유키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와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추후 국회에서 유키코의 수익을 30억엔이라고 밝혀졌으나 정작 유키코 본인은 살아생전 그러한 천문학적인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을뿐더러 한달에 겨우 6만엔으로 생활하는 착취에 시달리고 (소속사 프로덕션은 다르지만 미나미노 요코는 이보다 훨씬 더 심한 한달 3만엔만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결국, 소속사 사무소 선 뮤직 프로덕션 측이 이러한 행태에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현지 팬들은 유키코의 자살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실제로 유키코가 데뷔 이후로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죽음의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사실에 입각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유키코는 1984년 4월 21일에 가수로 데뷔해 1986년 4월 8일 죽기 직전까지, 고작 2년 밖에 안 되는 사이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77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한달에 겨우 한번 쉴 정도로 매우 바쁘게 보냈다. 물론 동시대 아이돌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금지된 마리코 이외에 별 대사는 없었던 단역으로도 출연 하며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 실연이 원인이라는 등 다양한 말들이 떠돌지만 메모에는 실연을 줬다는 상대방의 이름은 실제로 없고 단지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다. 어쩌면 유키코가 동경했던 연예계의 세상은 유키코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에 몹시 힘들어했었을 것이고 경쟁이 난무하던 연예계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또한 유키코의 노트에서 발견된 '언제나 아이돌이고 싶다.'는 말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1. 방송·미디어

1986년 당시 일본은 황색언론(黃色言論)이라는 옐로 저널리즘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투신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수습이 아닌 유키코의 시신을 촬영하여 모자이크 처리 과정 없이 흑백으로 잡지에 싣고 아스팔트에 피와 뇌수[33]가 흥건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행위 등의 비도덕적인 미디어의 보도 태도[34]는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을 받아왔다. 이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거나 몰래 가져가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4월 9일 닛폰 테레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고별식 방송을 포함해 여러 방송사에서 유키코를 추모하였다.
오카다 유키코 고별식

1986년 5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밤의 히트 스튜디오 심야 라이브 무대에 유키코의 유령이 찍혔다는 소문과 유키코의 시신을 촬영한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사진기자는 죽지 않았으며, 유령 찍혔다는 무대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35]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36] 이후 2002년 12월 1일, 한국에서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것을 진실이라고 판정해버리며 진짜로 믿는 사람들까지 생겼지만 위의 이야기들은 당연히 거짓이다. 다시 말해 유키코가 이러한 일들을 알게 되면 당연히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유키코의 투신 사건과 더불어 일명 유코 신드롬[37]이라는 베르테르 효과로 1986년 일본의 청소년 자살율이 급증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일본 전역에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해당 사태를 심각하게 판단하여 결과적으로 오카다 유키코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추후 발매되지 못했던 싱글 꽃의 이미지가 서명 운동[38]으로 오랜시간 끝에 1999년이 되어서야 시판되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에 관한 언급은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하게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그 여파도 컸음에도 끝없이 재조명되었던 오자키 유타카, ZARD, hide 등과는 대조적인데, 유키코의 경우엔 자살 직후의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39],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였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키코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4.1.1. 공황 윳코 신드롬

이 사건은 어느 연예인의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후 투신자살했고 같은 해 5월 5일에는 21세 재수생이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옥상의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여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이었고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불렸다. 이 문제는 연예계 외에 정치권으로도 영향을 미쳐 가이후 도시키 문부대신이 야당의 추궁을 받고 "10대 가수의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아일보에서도 이 사건이 일어나고 22일뒤 그녀의 죽음 이후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는 상황을 보도했다.#

5. 자살을 둘러싼 많은 루머

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40]'의 포스터.

지금까지도 유키코가 스스로 삶을 포기해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미제로 남아있다.

1985년 11월 초부터 1986년 1월 말에 사이에 방영된 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유키코는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토루에게 거절당하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초반에 널리 알려졌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유키코가 쓴 글 등을 모아 1988년 7월에 출판한 책 <사랑을 주세요(愛をください)>[41]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카요(윳코의 본명)의 유서 - 지금도 그것을 유서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 중 미네기시 토오루씨의 이름은 확실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미네기시 씨를 좋아했다고.
(중략)
저는 그 후 두 번 다시 그 "유서"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오카다 유키코가 직접 "미네기시 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전술한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오후 11시 반 이후부터 택시를 타고 미네기시 토루가 살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실제로 유키코가 하숙하고 있었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과 미네기시 토루의 자택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미네기시 토루는 당시 유키코와 20살 이상 차이나는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투신자살 사건 발생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アニキ) 같은 느낌이었다."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했다. <사랑을 주세요>에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라고 적어 놓기도 했고 훗날 주간지에 미네기시가 "정작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귀찮은 일이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는 그저 유키코에게 연예계 선배로서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나이의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지만 당시 미네기시 토루가 내연내가 있었던걸 몰랐던 상황에서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되며 충격으로 망연자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터넷이 발달한 후에는 이 사건에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었다는 설도 퍼졌다.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고 유키코가 칸다의 아이를 임신까지 했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충격에 빠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카다 유키코가 둘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서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영상이 남아 있기도 하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 준 '입술 Network'를 듣고 유키코가 감격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으므로 칸다가 관련되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린 자극적인 루머일 뿐이다. 칸다가 연관되었다는 설은 유키코가 자살한 직후부터 퍼졌었다. <사랑을 주세요>에서도 유키코의 어머니가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하는 내용이 적혀있을 정도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옛날의 소문이 다시 퍼진 것이다. 오카다 유키코가 남긴 일기장과 유서를 가지고 있다는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사장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메세지를 전했다.

이외에도 원래 오카다 유키코가 좋아하던 대상은 배우 타치 히로시[42]라는 등 유키코가 성소수자였다는 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그러나 오카다 유키코가 생전에 남긴 일기나 메모들에서는 자신이 실연을 했다는 내용이나 연심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즉, 실연으로 자살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지 소문에 불과하다.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 뮤직 프로덕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 미수 때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자신의 자살 시도가 외부로 알려져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가 사라졌을 때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다녔는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쪽에서 유키코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놓여진 모습을 발견했다. 유키코는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할 때가 잦았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원인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런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유키코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때묻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일본 연예계의 추악한 일면을 알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꿈과 환상이 깨지는 바람에 연예계 자체에 환멸을 느껴 아이돌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아이자와 사장은 유키코를 세이코처럼 톱 아이돌로 육성하고 싶었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대하여 은퇴가 무산되자 절망해 투신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생전에 근면성실하고 굉장한 노력가인 유키코가 단순히 연예계에 실망했다거나 실연을 했다는 이유로 자살할 것 같지는 않다는 추측도 많다.

최근에 들어서는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측이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평소 스케줄이 너무 과도하여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이 발병했고 예기치 않게 휴일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자살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카다 유키코가 데뷔 후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유키코는 1984년 4월 21일에 가수로 데뷔해 1986년 4월 8일 죽기 직전까지, 고작 2년 밖에 안 되는 사이에 77곡이라는 엄청난 수의 곡들을 발표했고 스케줄이 하도 빠듯하게 짜여있어서 하루에 3~4시간밖에 잠을 자질 못했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는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인터뷰에서 밝힌적도 있었고 1985년 12월에는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오카다 유키코의 일본 현지 팬들은 대부분 선 뮤직 프로덕션의 행보가 오카다 유키코를 자살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카다 유키코는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6년 3월 직후부터 적어도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험 공부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일찍이 느꼈고 아직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 후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할 계획이 확고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생전 오카다 유키코는 첫 단독 주연작인 금지된 마리코 때는 물론이고 신인 시절, 별 대사가 없었던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에도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는 이러한 자신의 계획과 배우로 전향 후에는 일을 조금씩만 하고 싶다는 의견을 소속사 선 뮤직 측에 계속 전달했지만 유키코의 말을 듣고 당황한 소속사는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갑자기 노선을 바꾸면 상품성이 떨어질 것이다."라며[43] 그녀의 의견을 묵살했고 오카다 유키코가 활동을 보이콧하기 전에 빨리 뽕을 뽑아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되려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자 유키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소속사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고 소속사가 자신을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연예인으로서의 생활에 대한 환멸감을 느낀 끝에 스케줄이 잠깐 비게 되었을 때 집에서 우발적으로 자살시도를 했는데 기자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며 사건이 너무 커지게 되었고 가족들과 대중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는 데에 큰 죄책감과 부담감[44]을 느낀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자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비록 오카다 유키코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택한 이유가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지금으로선 이 이유가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유키코의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히데요시 사장은 유키코가 생전에 쓴 일기와 분홍 종이에 쓰인 '유서'도 수중에 넣었다. 아이자와는 이를 두고 대중들을 상대로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하였으나 결국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키코의 유족들도 내용을 모른다고 한다.[45]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리지 않는 한 유키코 자신이 설명한 자살 원인이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없다.


[1] 2009년 8월 선 뮤직 프로덕션요츠야산초메역 근처로 사무소를 이전했다.[2] 생전 리허설 인터뷰에서는 "팬들과 같이 즐겁게 공연을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서 힘들지 않다."고 말했지만 몇달 전에도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성장기에 새벽 3시까지 연습을 해야만 했던 유키코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3] 생방송이 아닌 녹화로 사후에 방영되었기 때문에 "이 방송은 4월 4일(금)에 녹화한 것입니다."라는 자막이 두차례 송출되었다.[4] 삼가 故 오카다 유키코 님의 명복을 빕니다.[5] 통칭 노리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인 선 뮤직 프로덕션의 소속으로 유키코의 직속 후배 아이돌이다.[6] 정확한 시기는 알수없지만 추후 포스터는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에게 양도되어 간직하고 있었다.[7] 수입의 액수는 사후 국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루었다.[8] 1986년 5월 14일 발매 예정이었다가 무산되어 13년 뒤인 1999년(헤이세이 11년) 3월 17일에야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된 花のイマージュ라는 곡도 2분 55초부터 나온다.[9] 금지된 마리코에서 마에다 미야코 역을 맡았다.[10] 보도에 따르면 옷장 안에서 꿇어앉아 계속 울고 있었다고 한다.[11] 이 사진들은 현재에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12] 28년 후인 2014년 대한민국의 세월호 참사 당시의 언론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3] 2010년 8월 21일 저택에서 65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68년에 여성 전문잡지인 '영레이디'의 취재기자로 입사하여 연예보도를 맡은 이후 텔레비전의 리포터 쪽으로 영역을 넓혀서 당시에는 드문 연예전문 리포터로 폭넓은 활약을 했으며 경력만 해도 무려 40년에 달하는 그야말로 일본 연예계의 산 증인이었다.[14] 사망 5년 전인 2005년부터는 휴대폰 연예뉴스 사이트인 '나시모토 연예! 뒷 채널(梨元 芸能!裏チャンネル)'를 개설하여 유료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30만 명이나 되는 등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도 했으며 TV를 거쳐 인터넷 사이트, 블로그, 트위터까지 연예뉴스로 새로운 미디어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돌연사로 세상을 떠났으니 일본 연예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15] 당시 일본에서는 유명인 관련 사건이나 일반 사건사고가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취재하는 게 일상이긴 했다.[16] 쿠메 히로시는 유키코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많이 나왔던 음악 프로그램인 더 베스트 텐의 MC였지만 이후 뉴스 스테이션의 MC를 맡기 위해 그만두었다. 당시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도 많이 있었다.[17] 1943년 07월 17일생으로, 유키코와는 24살 나이 차이로 거의 아빠와 딸 정도였다. 1977년에 결혼했으나 1983년에 이혼했고 딸이 있었다. 이후 200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18] 원래 법명은 승려로 출가하거나 수계해야 받는 것이지만 일본 불교에는 죽은 자는 모두 부처가 된다(성불)고 하여 장례식에서 승려가 망자에게 법명을 지어주는 관례가 있다.[19] 당시 인기 있었던 배우로, 유키코는 생전에 항상 그를 가장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라고 대답했다.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 중 1명이며, 현재 이시하라 군단의 3거두(와타리 테츠야, 칸다 마사키, 타치 히로시) 중 1명이다.[20] 상단 영상 19초에 나온다. 해당 촬영이 유키코의 마지막 녹화였다.[21] 데뷔 동기이자 동시대 여자 아이돌로 현재도 활동 중.[22] 연예인 조문·헌화자 아카시야 산마/아사노 유코/아카자 미요코/이시바시 다카아키/이시카와 사유리/이키 히로시/이시카와 히토미/이시카와 히데미/이시노 마코/이시노 요코/이쿠타 토모코/이노우에 준/이와사키 요시미/이모리 미유키/이와이 토모미/에드 야마구치/오기노메 요코/오하시 준코/오자키 아미/카와이 나오코/카와이 카즈미/카와미 미유키/카시부치 테츠로/키타지마 사부로/요시카와 코지/키나시 노리타케/키무라 이치하치/키쿠치 모모코/키치 요코/쿠메 히로시/쿠로야나기 테츠코/쿠라자와 아츠미/쿠와타 야스코/코이즈미 쿄코/콘도 마사히코/코무로 테츠야/코니시 히로유키/이마노 리에/더 드리프터스/사이조 히데키/사카모토 류이치/사카이 노리코/사카이 마사아키/사카키바라 이쿠에/사쿠라다 준코/사와구치 야스코/시부가키대[46]/시마다 신스케/칸노 미카/시미즈 구니아키/세키구치 히로시/치 마사오/타케우치 마리야/타치 히로시/다이가와 요스케/다하라 토시히코/타나카 쿠미/타카베 토모코/타카미 치카/타키 사토미/체커즈/도미츠 카즈오/나오에 기이치/나카오 아키라/나카모리 아키나/나카야마 미호/나카하라 에/나가야마 요코/나가세 마사토시/니누마 겐지/니시무라 토모미/노구치 고로/노자와 나오코/하야미 유/하시모토 미카코/히로오카 슌/비트 다케시/후지무라 슌지/후루타 치로/호리우치 타카오/호리 치에미/혼다 미나코/마츠다 세이코/마츠모토 노리코/마츠모토 유리/마키무라 미에코/미나미노 요코/미카미 히로시/미즈타니 마리/미네기시 토오루/미카츠 하루미/모리타 겐사쿠/모리 마사코/야시로 아키/야마모토 조지/야마모토 유카리/요시무라 마리/요시 이쿠조/류레이타/와다 아키코[23] 1939년생으로 배우로 활동하다 1961년, 향년 21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하였다.[24] 여담으로 유키코가 출연할 예정이였던 테레비 아사히 드라마 '가출소녀(家出少女)'에서 맡았던 배역은 추후 배우 와타나베 노리코로 교체되어 촬영되었고 같은 해 8월 4일 방영되었다고 한다.[25] 1986년 5월 14일 발매될 예정이었던 아홉 번째 싱글 ‘꽃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발매 중지로 영원히 발매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팬들과 다른 동기 연예인들의 서명운동을 통해 13년 뒤인 1999년 3월 17일에 그녀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하지만 40년이나 흐른 지금에서는 과연 나올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팬들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26] 잡지는 3월에 발매되었다.[27] 유키코의 데뷔 이전부터 매니저로서 그리고 사망 당시의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했던 미조구치 노부오(溝口伸郎)는 이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였고 2000년(헤이세이 12년) 7월 8일 생전 유키코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실 5층의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던 지병을 괴로워하며 목을 매달아 향년 54세로 자살하였다.[28] 오랜 시간이 지나며 현재는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중고로 구할 수 있다. 유키코의 팬이라면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29] 메이테츠 비사이선 사야역에서 가깝다.[30] 유키코가 활동할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경우 한정.[31] 일부는 천수를 누리고 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32] 타케우치 마리야는 유키코를 기리는 의미로 2019년 발매한 40주년 기념 앨범의 발매일을 유키코의 생일 전날로 정하고, 본인이 써주었던 데뷔곡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를 셀프 커버하였다. 동년 3월에 방송한 NHK의 특집 방송에서 타케우치 마리야는, "몇 번이나 그녀의 곡을 불러보려 했지만 생각이 너무나 깊어져 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유키코의 멜로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며 마음을 밝혔다.[33] 뇌척수액[34]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또한 경찰과 병원으로 연락을 취했던 사람은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닌 나중에 목격한 유키코의 매니저가 했을 지경.[35] 출연자가 무대 뒤 쪽에 나란히 앉아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36] 물론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흉흉했던 일본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37] ユッコ・シンドローム[38] 팬클럽 윳코 프렌즈를 중심으로 꾸준히 벌어졌었고 꽃의 이미지가 해금되기까지 연예사무소 선 뮤직의 공헌도 있었겠지만 오기노메 요코의 공헌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39] 게다가 이 셋의 죽음이 갑작스럽긴 하였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다. 생전 오랜 기간 활동하며 일본 가요계에 미친 영향 또한 활동기간이 짧았던 유키코와 비교하면 훨씬 컸던 점도 크다.[40] 禁じられたマリコ[41] 유키코가 생전에 쓴 글을 모았기 때문에 오카다 유키코 명의로 출판되었다.[42] 사건 당시 칸다 마사키와 같은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였다.[43] 당시 오카다 유키코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쥔 대형 신인이었고 자살한 1986년 1월에 발매된 싱글 <입술 네트워크(くちびるNetwork)>가 처음으로 오리콘에서 1위를 차지하여 안 그래도 가파르게 오르던 인기에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태였다. 사망 3일 전인 4월 5일부터는 전국 투어 콘서트 스케줄이 시작되었고 자살 하루전에는 사진집 <비너스의 탄생>까지 발매된 상황이었다. 또한, 새 드라마 '가출소녀' 촬영 스케줄도 잡혀있었다. 즉, 이대로만 쭉 가면 선배 아이돌 세이코나 아키나처럼 톱 아이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44] 당시 일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로 유키코 사후 3년뒤인 1989년에 나카모리 아키나가 여러 이유로 삶의 회의감을 느껴 자살시도를 했다는 이유로 "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 것에 깊이 사죄드린다.”라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을 정도였다.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한 당시 이미 선 뮤직 건물 아래에는 유키코의 자살 미수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모여있었고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 기도를 했다는 것이 대서특필 된다면 아마 나카모리 아키나보다 더 심한 꼴을 겪어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45] 유서는 소속사의 금고에 철저한 보안 아래 현재도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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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쟈니스 사무소 소속으로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활동한 남자아이돌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