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1:04:07

온사문

溫沙門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대중매체에서
2.1. 드라마 연개소문2.2. 드라마 대조영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고구려-당 전쟁에 참전했다.

659년 황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설인귀와 대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구당서 설인귀 열전과, 이를 인용한 삼국사기, 자치통감 등에는 아래와 같이 모두 온사문이 졌다고 명확히 명시되어 있으며, 신당서 설인귀 열전에는 전투 진행이 꽤 상세하게 나온다. 혹자는 신당서 고려전에는 주어가 빠진 채로 설인귀가 깨졌다는 뉘앙스로 애매하게 나온다고 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658년에 설인귀가 고구려로 출정했는데, 이기지 못했다.’라는 짤막한 문장만 나오기에 온사문과의 전투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1]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郎將薛仁貴等, 與我將温沙門戰於横山, 破之.
〔18년(659)〕 겨울 11월에 당의 우령군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군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삼국사기, 설인귀 등 당군이 침공하다 ( 659년 11월(음) )

현경 4년(659년) 11월, 우령군중랑장 설인귀가 고려 장수 온사문과 황산에서 싸워 그를 깨트렸다.
자치통감, ##

顯慶三年, 詔副程名振經略遼東, 破高麗於貴端城, 斬首三千級. 明年, 與梁建方·契苾何力遇高麗大將溫沙多門, 戰橫山, 仁貴獨馳入, 所射皆應弦仆. 又戰石城, 有善射者, 殺官軍十餘人, 仁貴怒, 單騎突擊, 賊弓矢俱廢, 遂生禽之.
현경3년(658), 정명진을 부사로 삼고 요동을 공격하여 고려 귀단성에서 수급 3천을 취했다. 이듬해(659) 다시 양건방, 계필하력과 함께 고려대장군 온사문과 황산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설인귀가 말을 독려해 들어가 활시위를 당기니 모두가 쓰러졌다. 석성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고려군에) 활을 잘쏘는 이가 있어 관군 10여명이 죽임을 당하자 설인귀가 단기로 달려갔고 (당황한) 적의 화살이 모두 빗나가 모두 사로잡혔다.
신당서 설인귀 열전. ##

2. 대중매체에서

둘 다 온으로 시작하는 이름이라 창작물에서는 온달의 후손으로 엮는 경우가 많지만[2] 사실 두 사람이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기록은 없다. 물론 온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쓰이는 일이 드문 희귀한 글자라는 점, 온달과 온사문 모두 고구려 장군으로 전투에 임한 상황 등으로 봤을 때 친족일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

2.1. 드라마 연개소문

배우 나한일이 연기하였다가 박영록으로 교체되었다.

1부에는 청년으로 나와 요동성에서 양만춘과 함께 부장으로서[3] 강이식을 보좌하여 수나라 군대로부터 요동성을 사수하였으며 2부에선 연개소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당시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던 양만춘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4] 이후 고당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부장으로서 수호했던 요동성의 성주로서 2주 가량을 당군에 맞서 버티지만 끝내 함락당하여 패퇴 후 안시성으로 도주해 양만춘, 연개소문과 함께 안시성을 사수한다.

온달의 손자이자 영양왕의 근위장인 온군의 아들이라는 설정이 붙었다. 그리고 대걸중상보다는 임관 시기가 느리며 양만춘과 동기다. 앞서 각주에서 밝혔듯이 양만춘과 함께 해당 무사대회 장원이라는 언급이 있으나 굳이 따지자면 양만춘보다는 아래인 2위거나 딱 1등을 가리지 않아 공동장원이거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연개소문과 검모잠, 뇌음신, 고돌발보다는 임관시기가 빠르다. 하지만 임관 시기 차이 때문에 서열이 분명한 것은 아니고 대걸중상부터 고돌발까지 거의 동지처럼 지내기는 한다. 이들보다 군부내의 확연히 윗 서열은 고승이고 고승보다 윗서열은 강이식과 을지문덕이다.

2.2. 드라마 대조영

배우 이원발이 배역을 맡았다. 고구려의 장수로써 연개소문의 부장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고안승이 배신을 하게 되고 그 때 기습한 신라군들과 싸우다 보자기에 싸여서 사망했다.


[1]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현경 3년(658)에 다시 정명진을 보내어 설인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신당서 설인귀 열전에서 보듯이 이듬해 설인귀가 다시 요동을 공격했고 그때 온사문과 맞닥뜨린 것이다.[2] 나이대를 고려해 보통 손자로 나온다.[3] 양만춘과는 같은 무사대회 장원이라고 언급된다. 딱 누가 1등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무사대회 장면에서 양만춘의 활약 장면을 중심으로 보여줬고 임관 이후 온사문은 이런저런 패배가 있으나 양만춘은 무결점으로 묘사되다보니 비유로 표현하자면 입사동기로 둘이 1, 2위로 들어왔으나 그 중에서 양만춘 쪽이 우위로 보인다.[4] 특히 설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팔을 거는 장면이 압권이며, 온사문을 연기한 배우가 박영록이다보니 이 장면에서 야인시대의 김영태가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