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1 23:55:15

성 베네딕도회 올리베따노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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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올리베또의 복되신 동정녀 연합회
Congregatio Sanctæ Mariæ Montis Olive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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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f7f7,#f7f7f7><colcolor=#000,#000> 이명 올리베따노회
(Olivetans)
올리베따노 연합회
(Congregazione Olivetana)
표어 <colbgcolor=#f7f7f7,#f7f7f7><colcolor=#000,#000> 라틴어 {{{#000,#f7f7f7 'Ora et Labora'}}}
영어 Pray and Work
한국어 기도하고 일하라
설립 시기 1319년 3월 26일 ([age(1319-03-26)]주년)
설립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총아빠스 초대 일데브란도 폴리우티 O.S.B. Oliv.
현재 디에고 괄티에로 마리아 로사 O.S.B. Oliv.
규모 234명 (사제 119명)
종교 가톨릭
소속 베네딕도회, 베네딕도회 총연합
모원 이탈리아 시에나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
(53020 Chiusure, SI,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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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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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f7f7,#f7f7f7> 라틴어 <colbgcolor=#fff,#1f2023>Congregatio Sanctæ Mariæ Montis Oliveti
이탈리아어 Congregazione Benedettina di Nostra Signora del Monte degli Ulivi
독일어 Kongregation der Heiligen Jungfrau von Monte Oliveto
영어 Congregation of the Blessed Virgin of Monte Oliveto
프랑스어 Congrégation bénédictine de Notre-Dame du Mont des Oliviers
스페인어 Congregación Benedictina de Nuestra Señora del Monte de los Oli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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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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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수도회 창설2.2. 확장과 정착2.3. 수도회의 위기와 개혁2.4. 부흥과 현대의 발전
3. 중앙집권적 특징4. 한국에서의 활동5. 역대 총아빠스6. 소속 수도원
파일:MonteOliveto3.jpg
몬테 올리베또 마조레 대수도원에서의 올리베따노 수사들

1. 개요

몬테 올리베또의 복되신 동정녀 연합회, 혹은 성 베네딕도회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연합체로,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에 의해 1313년 시에나 근처의 몬테 올리베토에서 설립되었다. 이 연합회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따르며, 고요한 관상 생활과 전례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오늘날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모원인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은 자치수도원구[1]로서 교구의 치리를 받지 않는다.

2. 역사

2.1.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수도회 창설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14세기 초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창설되었다. 이 시기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위기가 드리워 있던 시기로, 아비뇽 유수로 상징되는 교황권의 정치적 약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 수도생활의 쇠퇴 등이 두드러졌고, 이탈리아 각 도시들도 분열과 내전 속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베르나르도 똘로메이(Bernardo Tolomei)였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는 1272년 시에나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똘로메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문학과 법학을 두루 수학하였으며, 몇몇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법률가로 활동한 시기도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생명의 성모 마리아 형제회(Confraternita dei Disciplinati di Santa Maria della Vita)'라는 평신도 형제회에 속해 있었는데, 이 형제회는 고행과 속죄를 강조하는 경건한 단체였다. 하지만 약 40세 무렵, 베르나르도는 세속의 삶을 뒤로하고, 더욱 깊은 기도와 보속, 성덕을 추구하는 은수생활에 투신하고자 결심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눈병을 앓으며 일시적인 실명 상태에 이르렀고, 이때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시력을 회복한 뒤 깊은 회심을 겪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313년, 그는 친구이자 동료였던 파트리치오 파트리지(Patrizio Patrizi)와 암브로조 피꼴로미니(Ambrogio Piccolomini)와 함께 시에나 근교의 외딴 지역인 아코나(Accona)로 은거하였다. 이곳은 험준하고 인적이 드문 황야였으며, 이들이 공동체를 세운 언덕은 이후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을 상징적으로 본떠 '몬테 올리베토(Monte Oliveto, 올리브산)'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극단적인 절제와 금욕을 특징으로 하는 은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방식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근거하면서도 초대 교회 사막 교부들의 이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도는 수도공동체의 기초를 세워 나가며 몇 가지 핵심적인 이상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성 베네딕도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바탕으로, 철저한 청빈과 공동생활,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무일도의 이행, 그리고 침묵과 수공 노동을 통한 자기성화를 지향하였다.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엄숙함과, 농사를 중심으로 한 노동의 영성은 이 공동체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삶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 모여들었고, 아코나의 은수처는 점차 수도공동체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과 독특한 생활방식은 당시 교회 당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319년, 교황 요한 22세는 이 공동체의 금욕주의가 기존 교회 전통에 어긋난다는 이단 혐의로 이들에게 아비뇽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에 남았고, 동료 두 사람이 아비뇽 교황청에 출두하여 자신들의 규율과 목적을 해명하였다. 해명을 들은 요한 22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지 않는 대신 베르나르도의 공동체가 공적 규칙 아래에 편입되기를 원하며, 아레초의 귀도 탈라르티(Guido Tarlati) 주교에게 적절한 규칙을 부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같은 해, 귀도 탈라르티 주교는 교황의 지시에 따라 이 공동체를 아레초 교구 산하에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이때 공동체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수도생활의 지침으로 채택하였고, 수도자들은 고유한 백색 수도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 수도복은 흰색 튜니카에 후드가 달린 흰색 스카풀라, 흰 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 흰색 코클라나 망토를 더하기도 한다. 베네딕도회 전통의 검은 수도복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이 백색 수도복은 순결, 빛, 금욕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올리베따노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외적 표지로 자리 잡았다. 이 수도복의 기원에 대해서는 하나의 전승이 전해지는데, 귀도 주교가 과거 꿈에서 성모 마리아로부터 흰 옷을 입은 수도자들에게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건네주는 환시를 받았고, 이번에 교황으로부터 공동체를 관할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들이 바로 그 환시의 인물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승은 이 공동체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영적 기원을 지닌다는 인식을 뒷받침하며, 이후 올리베따노회가 '올리브산의 성모'에게 봉헌된 수도회로 자리잡는 데에도 중요한 상징적 배경이 되었다.

그 후에도 베르나르도는 공동체의 자율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교황청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이어갔다. 1344년, 교황 요한 22세의 후계자인 교황 클레멘스 6세는 「Inter supernae dispositionis」라는 칙서를 통해 이 공동체를 정식으로 하나의 수도회로 인준하였다. 이 칙서에 따라 시에나의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은 올리베따노회의 모원으로 규정되었고, 기존의 베네딕도 수도회들로부터 독립적인 자율성을 가지며, 산하 수도원을 자유롭게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수도회 전체는 헌장과 총회를 통해 하나의 연합체로서 조직되었으며, 설립자인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는 사제품을 받지 않은 채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올리베따노회는 창립 초기부터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수도회로 자리 잡았다. '올리브산의 성모'라는 명칭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수도회의 영성과 일상에 깊이 배어 있는 정체성이었다. 성모 찬가의 정성된 전례 거행, 성모 축일에 대한 각별한 기도와 묵상, 그리고 마리아의 겸손과 순명이라는 삶의 모범은 수도자들의 일상적 삶에 지속적으로 반영되었다.

1348년, 흑사병이 이탈리아 전역을 강타하였을 때,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는 감염된 수도자들과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다가 병에 감염되어 시에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는 곧바로 자비와 성덕의 표양으로 널리 추앙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수도회의 영적 기반이자 역사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2. 확장과 정착

1344년 교황청의 공식 인준을 받은 이후, 올리베따노회는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루며 제도적 정착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창립자인 베르나르도 똘로메이가 지닌 깊은 영성과, 교황 칙서가 부여한 교회법적 안정성이 더해져 수도회는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단순한 외적 확장에 그치지 않고, 수도회 내부에서도 영성, 문화, 예술, 전례의 다양한 면모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올리베따노회는 베네딕도 수도회 계통 중 가장 역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수도회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사망 이후 수십 년 안에 수도회는 수십 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들 중에는 토스카나,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베네토, 움브리아 지역에 위치한 수도원이 포함되며, 대표적인 예로 만토바의 폴리로네 성 베네딕도 수도원, 페루자의 몬테 모르치노 성모 마리아 수도원, 볼로냐의 산 미카엘레 인 보스코 수도원,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수도원이 있다. 각 수도원은 자율적인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운영되었으며,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공동 헌장과 정기 총회(Capitolo Generale), 그리고 상호 방문과 수도자 교류를 통해 영적·제도적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올리베따노회는 초기부터 공동생활을 철저히 중시하였다. 수도자들은 고전적인 베네딕도 규칙을 기반으로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여기에 그들만의 고유한 색채가 더해졌다. 로마 전례를 따르며, 정제된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하였고, 성무일도에 대한 헌신, 침묵의 준수, 공동 규율에 대한 철저한 실천은 수도생활의 핵심을 이루었다. 또한 수도회는 자체적으로 제정한 헌장인 「올리베따노 헌장」(Constitutiones Olivetanae)을 통해 규율을 문서화하고, 시대에 맞게 수시로 개정하여 내부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은 귀족 계층은 물론, 보다 경건한 삶을 갈망하는 교구 성직자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고, 수도성소를 크게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 동안, 수도회는 문헌 필사와 인쇄 작업에 관여하였다. 일부 수도원은 필사 전용 공간인 스크립토리움을 갖추고 있었으며, 인쇄소를 운영한 사례도 있다. 만토바의 폴리로네 수도원은 인쇄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필경사, 연대기 편찬자, 역사서 저자 등이 있었다. 그 중 일부 인물로는 지롤라모 질리(Girolamo Gigli), 플라치도 푸치넬리(Placido Puccinelli) 등이 언급된다.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수도원은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와 조반니 안토니오 바찌(Giovanni Antonio Bazzi, 별칭 소도마)의 벽화가 남아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 벽화는 1505년부터 1519년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성 베네딕도 생애를 주제로 한다. 수도원 내부에서는 전례 목적의 악보가 제작되었고, 안티포날레, 그라두알레, 화답송 등이 편찬되었다.

수도회는 고위 교회직 진출보다 공동체 중심의 생활을 지속하였으며, 일부 수도자들은 신학과 교회법, 수도개혁 등의 분야에 관여하였다. 이들은 16세기 이전 수도생활 개혁 논의에 참여한 바 있으며, 수도원 일부는 고위 성직자의 피정처나 교구 사제 양성 장소로 사용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 교황청은 교회는 '다양성 안의 일치'(unitas cum diversitate)라는 원칙 아래, 수도회의 고유한 카리스마와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공동의 개혁과 협력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올리베따노회 역시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먼 훗날 함께 총연합을 이루게 될 까말돌리회, 발롬브로사회, 실베스트로회 등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2.3. 수도회의 위기와 개혁

16세기 후반 이후, 올리베따노회는 여러 외적 요인과 제도적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재편되면서 수도회의 자율성과 규율은 점차 약화되었고, 수도자 수의 감소와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수도회의 쇠퇴로 이어지는 전조로 작용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촉진하며 수도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는 공동체 규율과 전례의 정비, 수도자 교육의 강화를 권장하였고, 올리베따노회도 이에 따라 헌장을 개정하고 공동체 방문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동시에 주교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 강화로 인해 수도원 고유의 자율성은 축소되었고, 세속 성직자나 평신도에게 수도원 운영권을 위임하는 콤멘다(commenda) 제도가 확산되면서 여러 수도원에서 내부 규율이 약화되었다.

17세기 동안 수도회는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자 헌장을 정비하고 교회법적 방문을 제도화하였으며, 수도공동체 전체의 일관된 규율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수도자 수의 감소, 지역 정치 세력의 개입, 그리고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은 이러한 개혁을 제약하였다. 같은 시기, 다른 베네딕도회 계열 수도회와의 통합 가능성이 논의되었으나, 전례 전통과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논의는 중단되었다. 올리베따노회는 이후에도 독립된 수도회로 남아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까지는 수도회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외부적 억압이 가해진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와 이탈리아 왕국 수립 전후로, 여러 수도원이 국가에 의해 폐쇄되거나 세속 용도로 전환되었고, 왕정 복고 이후 일부 수도원이 재개되었지만 수도회는 과거의 자유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1866년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수도회 재산을 몰수하는 법령을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수도회가 소유하던 대다수 재산은 박탈되었다. 수도원들은 법적 인격을 상실하고, 교구 본당 또는 사적 공동체로 축소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수도자 수가 50명 미만으로 감소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몬테 올리베토 대수도원과 몇몇 이탈리아 지방 수도원에 분포하였다. 당시 수도자들은 축소된 공동체 내에서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따른 전례 생활을 지속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자들과 지역 주민 간의 협력과 유대가 수도원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도회는 규모와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제도적 존속을 유지하였다.

2.4. 부흥과 현대의 발전

20세기 초, 특히 1900년대 첫 10년 동안 올리베따노회는 유럽 내 수도생활의 전반적인 회복 분위기 속에서 점진적인 재건 과정을 시작하였다. 1904년, 수도회는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의 법적 소유권을 완전히 회복하였으며, 이를 통해 수도회 중심지가 다시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는 과거에 폐쇄되었던 몇몇 역사적 수도원들이 재개되었는데,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인 스트라다 수도원과 볼로냐의 산 미카엘레 인 보스코 수도원이 그 예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도회는 국제적 확장에 착수하였다. 영국에서는 암플포스 지역에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2], 프랑스에서는 일부 수도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 개혁 운동에 기여하였다. 1985년에는 미국 뉴멕시코 페코스에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 수도원(Priorato della Santissima Trinità)'이 설립되었으며,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의 예속 수도원으로 시작하여 자립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이어 1988년에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고성 수도원은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왜관수도원에 이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아빠스좌 수도원이기도 하다.

1960년, 올리베따노회는 내부 자율성을 유지하는 조건 아래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가입하였다. 이를 통해 수도회는 '올리베따노 연합회'로서 총연합을 구성하는 다른 연합회들과 교류하고, 국제 회의 및 총회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수도생활이 직면한 공통의 사목적·영적·문화적 과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도회는 교황청 문헌 「완덕의 사랑(Perfectae Caritatis)」의 권고에 따라 헌장을 개정하고 수도생활의 갱신을 추진하였다.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하였으며, 수도원은 손님 영접과 평신도 피정 활동을 보다 개방적으로 운영하였다. 전례, 영성, 그리스도교 일치 등의 분야에서 지적 작업도 장려되었고, 이는 수도자의 사도직을 직접적 활동뿐 아니라 신학적·영적 탐구로까지 확장하는 방향성을 반영하였다.

21세기 현재,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국제적 수도공동체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를 중심으로 여러 수도원이 운영되고 있으며, 미국, 대한민국, 이스라엘 예루살렘 등지에도 수도 공동체가 존재한다.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라틴어 노부스 오르도로 거행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 전례 예술의 세심한 관리, 그리고 현대성과 조화를 이루는 조용한 영적 탐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수도자 수 감소라는 보편적 상황 속에서도 고유한 전통과 구조를 유지하며, 설립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영성을 계승하여 관상과 공동체 중심의 수도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3. 중앙집권적 특징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베네딕도회 계통의 수도회 가운데 드물게 총아빠스(Abbas Generalis)의 권위 아래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단일 수도회로 조직되어 있다. 각 수도원이 독립된 지위를 보유한 자치 수도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수비아코-카시노 연합회오딜리아 연합회 등과는 달리, 올리베따노 연합회는 제도적으로 하나의 조직으로 운영되며, 모든 수도원이 총아빠스의 중앙 권위 하에 통합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직 구조는 수도회 창립 시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19세기 말 제도 개혁을 통해 정립되었다. 1344년, 클레멘스 6세의 교서에 따라 정식으로 인가되었을 당시에는 각 수도원이 자체적으로 아빠스를 선출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연합회는 공통된 규칙 헌장과 정기 총회를 통해 일치를 도모하였다.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은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상징적인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 다른 수도원에 대한 관할권은 보유하지 않았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진행된 세속화 정책으로 인해 다수의 수도원이 해산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수도회의 총회 역시 정상적으로 개최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회 내부와 교황청은 수도회의 존속과 재건을 위해 중앙 권위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청의 수도회업무성성은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제도 개편을 지도하며, 통제와 감독 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편의 일환으로 1899년, 몬테 올리베또 마조레의 아빠스였던 일데브란도 폴리우티(Ildebrando Polliuti)가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초대 총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수도회는 느슨한 연합체에서 통합된 단일 조직으로 전환되었으며, 총아빠스는 양성, 규율, 방문, 인사에 대한 행정 및 징계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고, 수도원의 설립과 폐지에 있어서는 교황청의 승인 아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집권적 구조는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으며, 구체적인 예로는 이탈리아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대수도원의 아빠스이자 전체 연합회를 관할하는 총아빠스인 디에고 괄티에로 마리아 로사 아빠스와,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에 위치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아빠스인 유덕현 야고보 마리아 아빠스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고성의 유덕현 아빠스는 고성 수도원 내부의 전례, 사목, 행정 등을 총괄하지만, 그 직무와 권한은 총아빠스의 승인과 통할 아래에 놓인다. 따라서 고성 수도원은 독립된 수도원이 아니라 총아빠스가 직접 관할하는 커다란 수도회의 일부로 간주되며, 총아빠스는 고성 수도원의 아빠스 선출과 임명, 사도직 운영, 규율 시행 등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4. 한국에서의 활동

5. 역대 총아빠스

6. 소속 수도원



[1] 수도원장이 교구장과 같은 사목권한을 가지고 수도원에 속한 본당들을 통치하는 면속구[2] 이후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