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5:42:56

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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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鵾
1576년(선조 9) 12월 3일 ~ ?

1. 개요2. 생애3. 관련 기록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1], 자는 덕일(德日).

고려 왕실의 후손으로 숭의전에서 제사를 지냈다. 본관을 조작해서 한동안 고려 왕실의 제사를 주관하던 왕희의 전횡을 바로잡고 새로이 숭의전 봉사자가 된 왕훈의 장손자이다.

2. 생애

1576년 12월 3일 왕훈의 장남이자 숭의전수(崇義殿守)를 지낸 왕유경(王有慶, ? ~ 1618)과 안동 권씨[2]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정구의 청으로 숭의전(崇義殿)이 중수될 때 고려 왕실 후손으로서 숭의전감(崇義殿監)에 임명됐다. 숭의전이 있던 마전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점거되고 약탈을 당했는데, 숭의전 역시 화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의전령(崇義殿令)을 거쳐 숭의전수(崇義殿守)로 승진한 왕곤은 현종 즉위년인 1659년 나이가 80세에 이르렀다.

3. 관련 기록

重新崇義殿, 請以其裔孫王鵾爲殿監。
숭의전을 새로이 중수해 그 후손 왕곤을 전감으로 세울 것을 청했다.
『계곡집』 권16, 좌의정월사이공행장.
又啓曰, 崇義殿守王鵾今斗八十歲, 已經實職四品, 缺四字何如。傳曰, 允。
또한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숭의전수 왕곤이 지금 나이가 80세인데, 이미 실직 4품을 지냈으므로 4글자 빠짐 어떠합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승정원일기』 159책, 현종 즉위년 12월 27일 계축. #
규장각에 소장된 원본에서는 4글자가 빠져있지만 왕곤이 숭의전수(崇義殿守)에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결락된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팔전의 하나인 숭의전은 삼각의 예에 따라 세워졌고 제사를 지내는 봉사손이 감, 영, 수, 부사 관직과 함께 실직을 겸했다. 수(守)는 정4품 벼슬인데 왕곤의 실직이 4품을 넘었으므로 장계를 올린 신하는 종3품의 숭의전부사로 벼슬을 높이려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1] 동양군파-부사공파 20세. 친형제 및 4촌 형제들이 대부분 를 부수로 하는 이름 글자를 썼다.[2] 권세형(權世衡)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