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15:41:28

왕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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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師熙
1848년(헌종 14) 8월 19일 ~ 1885년(고종 22) 8월 30일 (향년 37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고종 시기의 인물. 본관은 전주(全州).[1] 이명은 왕준오(王俊五).

2. 생애

1848년 8월 19일 아버지 왕병좌(王秉佐)와 어머니 문화 류씨 류현오(柳賢五)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왕사효, 왕사제, 왕사신, 왕사항이 있고, 두 누이는 각기 해주 최씨 최덕성, 함열 남궁씨 남궁영에게 시집갔다. 이후 5촌 당숙(堂叔) 왕경좌(王慶佐)에 입양되었다.

왕사희는 왕희의 11대손(10세손)으로, 11대조(10세조) 왕희는 자신의 본관을 개성 왕씨로 속이고 숭의전에서 고려의 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다 족보 위조가 들통나 쫓겨난 전적이 있다. 왕사희는 선조를 본받아 족보를 고쳤고[2] 1876년(고종 13) 2월 숭의전참봉에 제수된다. 전 숭의전 참봉 왕재기(王在基)[3]왕훈의 후손들은 왕희의 후손이 참봉이 된 것에 반발해 1878년(고종 15) 3월 경기 암행어사 이헌영에게 이를 알렸고, 같은 해 7월 개성유수 조경하가 마전군에 가서 진위를 알아보게 된다.

개성유수가 왕사희와 왕훈의 후손 양가 친척을 한곳에 불러모아 이조의 입안(立案)과 왕씨 세보를 대조하며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문적(文蹟)상의 근거가 양쪽에 다 있었다. 의정부는 이 해 10월에 개성유수의 대조 결과와는 별개로 왕훈의 후손이 정파로 정해진 바 있으니 왕사희는 파면하고 그 후손을 참봉으로 차임해야 한다고 아뢴다. 고종이 의정부의 청을 따르면서 왕사희는 2년만에 참봉직에서 쫓겨났고, 이후 1885년 8월 30일 사망했다.


[1] 1991년 간행된 《개성왕씨세보》에는 개성 왕씨 안경공파로 안경공 왕창(王淐)의 21대손인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전주 왕씨 일족 전체가 개성 왕씨로 편입되었기 때문.[2] 이 때 왕희 가문이 개성 왕씨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3] 왕훈의 11대 종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