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01:55:53

왕숭

王崇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상세

1. 개요

삼국시대 촉한, 서진의 인물. 익주 광한군 사람. 자는 유원(幼遠).

조부는 유언, 유장 시절에 관리를 했고 마초가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익주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왕상이며 부친은 촉한에서 파군태수를 지낸 왕팽, 형은 서진에서 재동태수를 지낸 왕화를 비롯해 왕진, 왕대 등이 있다.

2. 상세

정사 삼국지에는 행적이 없고 화양국지에 그 행적이 전한다.

촉한 당시엔 동관랑(東觀郎)[1]의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촉한 멸망 이후 양주의 별가로 징벽[2]되었으며 수재로 천거되어 상서랑으로 승진하였다. 서진에서 상용태수, 촉군태수가 되었다.

일찍이 유선을 평론하길 범상한 임금이라 했고 강유를 평론하길 모략이 종회에 조반(造反)하여 능히 미칠수 있어, 한을 복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했다. 강유는 위나라 사람들이 장량이라 일컫는 종회의 위에 이미 있었다고 했으며 당시 등애의 피폐한 병사 2만이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올때 강유가 만약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귀환해, 직접 군대를 통솔해 고립된 등애의 군사를 통렬하게 쳐부수었다면 재차 나아가 종회를 막았을것이며 촉한의 존망을 여전히 몹시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옛날 세조(광무제 유수)는 뛰어난 무용과 탁월한 재능을 내부의 자산으로 삼고 밖으로는 이십팔장의 기이한 장수를 뽑아 가히 근면하였기에 성공을 얻을수 있었다. 틀림이 없이 그리하여 수도의 큰 거리에 올랐으니 수레도 임금의 수레에 그치지 아니하였고 자리에 앉아도 편안하지 않았다. 근본이 뛰어나거나 식견이 넓지 아니하니, 중흥의 업적이 어찌 쉽겠는가? 후주 (유선)는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운 군주였으며, 비록 제갈량 한 명의 경위가 있었지만, 안으로는 아랫사람을 잘 통솔하고 윗 사람과 친한것에 대한 지모가 없었고 밖으로는 조아[3]가 없었으니, 어찌 천하를 포괄할 수 있었겠는가?

등애는 피곤한 병사 2만을 이끌고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유는 남쪽으로 귀환하여 십만의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군을 이끌어서, 등애는 집에서 기르는 (사로잡힌) 동물의 꼴이 되었다. 등애를 사로잡는 것을 이미 끝 마치고, 다시 돌아와 종회를 막아내었더라면, 곧 촉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강유는 파의 도로에 돌아와서, 멀리 오성[4]에 이르었다.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 해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가 분할되어 도성이 멸하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명백하게 종회의 지략은, 자방의 것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강유는 적이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함락되었는데, (강유와 종회가) 책략, 지모를 서로 맞아 어울려하여 우열을 가린다면 강유가 승리하여 종회를 물리칠 것이다. 아깝도다!

후주 유선의 태자 유선은 강유, 종회의 난에 목숨을 잃었다. 차남인 유요(劉瑤)를 놔두고 6남인 유순(劉恂)을 후계자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촉한의 구신 문립이 이를 지적했으나 유선 사후 안락공은 유순이 물려받게 되었다. 유순은 도의를 잃은 행동을 자주 하였으므로 상용태수 왕숭, 부릉태수 장인(張寅)과 더불어 진간하고 문립과 함께 염려하는 말을 했다.

왕숭은 촉한의 명신 수량, 이밀, 진수, 이양, 두열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다섯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촉서를 저술했고 시와 부 수십 편이 있었으며, 진수의 책과는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그의 촉서가 후세에 남아 있었다면 진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촉한 출신 역사가의 촉한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가 촉한의 사관 출신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


[1] 동관은 후한(後漢) 때 모든 서적을 모아 두던 곳. 이름난 선비들을 여기에 모아 저술토록 했기에 학자들이 이 동관을 노씨 장서실(老氏藏書室, 노자의 장서각)이나 도가 봉래산(道家蓬萊山)에 비유하였음.<후한서後漢書> 한 마디로 사관들이 모인 관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한대엔 이곳의 저술을 모아 동관한기가 저술되기도 하였다.[2] 徵辟, 임금이 초야에 있는 사람을 예(禮)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시킨다.[3] 爪牙,용맹한 장수다.[4] 강유는 유선이 성도를 굳게 수비하려 한다고 듣거나 혹 동쪽으로 오(吳)로 들어가려 한다고 듣거나 혹 남쪽으로 건녕(建寧)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으니 무엇이 정확한 소식인지 몰라 동광한군 처현(郪縣)의 도로를 거쳤다. 그리고 처현에서 유선의 항복명령을 받는데 이곳은 성도, 면죽과 낙성에 가까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