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04:55:53

외왕내제/고려 관련 기록들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외왕내제
1. 관련 금석문2. 관련 서적
2.1. 한국
2.1.1. 고려사2.1.2. 동국이상국집2.1.3. 동인지문사륙2.1.4. 동문선2.1.5. 보한집2.1.6. 삼국사기2.1.7. 삼국유사2.1.8. 신증동국여지승람2.1.9. 제왕운기2.1.10. 조선왕조실록2.1.11. 평거란송
2.2. 중국2.3. 일본

1. 관련 금석문

엎드려 금상 황제(今上 皇帝)[1]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기를 바라며 다음으로 나라 안이 평안하고 태평하며 법계의 중생들이 함께 피안(彼岸)[2]에 오르기를 바란다.
퇴화군대사종(956년)
황(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년)
황제 폐하(皇帝 陛下)[3]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황제 폐하(皇帝 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옛 석불이 있던 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4]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를 기원합니다.[5]
태평2년명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977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년)
황(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981년)
만승(萬乘)[6]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7]
현화사비문(1017년)
광종대왕(光宗大王)[8]황위(皇位)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엎드려 황제 폐하(皇帝 陛下)[9]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10]의 아들들은 모두 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공이 황후(皇后)[11]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12]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
염경애 묘지명(1148년)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13]해왔고, 그 호적이 모두 아조(我朝)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윤언이 묘지명(1150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황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14]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15]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公)[16]이 우리 황(皇)의 친족이고 또한... 칙명으로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주니, 거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최의묘지명(1223년)

2. 관련 서적

2.1. 한국

2.1.1. 고려사

왕의 생일을 천춘절(千春節)이라 했으니, 절일(節日)[17]의 명칭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以王生日爲千春節, 節日之名, 始此.
고려사, 세가, 성종 원년(982) 여름 6월 中.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18]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

내(予) 원자(元子)[19]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

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태손(太孫)[20]이 처리하라.

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고종, 임금의 마지막 조령(詔令).[21]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센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컨데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22]을 모험했으나 질병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방기(邦基)[23]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왕태자(王太子)[24]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방진주목(方鎭州牧)[25]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26]백벽(百辟)[27]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28]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

그리한다면 짐(朕)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숙종의 유조(遺詔)
짐(朕)은 군부(君父)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방가(邦家)의 중기(重器)를 손에 쥐었다. 매사에 조심하여 부탁받은 권한을 조심히 살폈다. 군공(群公)과 장구(長久)의 책략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경사를 누리고, 조상의 공로를 빛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을 치르던 중 너무나 슬퍼하니, 걱정이 병이 되었다. 때가 흘러 계속 누적되니,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번 겨울 초에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바람 앞 등불같은 몸이 어떻게 환기(幻期)를 견더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직의 도(社稷之圖)는 반드시 예속에게 이어져야한다. 지금 모제(母弟)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국원공(國原公) 운(運)[29]은 다능하고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 성덕(盛德)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형정(刑政)의 이로움과 병폐를 마음 깊히 알고 있으니, 구오지존(九五之尊)[30]에 오른다면 억조(億兆) 명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 그러니 구소(柩所) 앞에서 군권(君權)을 가지도록 하라. 무릇 국조(國朝)의 상벌대사(賞罰大事)는 모두 사군(嗣君)의 뜻을 따르라. 밖에 있는 주진(州鎭) 관원(官員)들은 본군(本郡)에서 거애하고 자신의 관사를 떠나지 마라. 상복의 제도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오호라(於戱)!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오로지 몇몇 고굉(股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들이 충력(忠力)을 다하여 내 친왕(親王)[31]을 보좌하고, 보력(寶曆)이 무궁(無窮)하도록, 환구(環區)[32]를 잇는다면 짐(朕)이 눈을 감아도 어떤 유감이 있겠는가?
고려사 세가 순종의 유조(遺詔)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제공(諸公)[33]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34]에게 전해 돌려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35]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36]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37]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38]와 사(社)[39] 덕분에 저지(儲祉)[40]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41]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42]은 강안전(康安殿)[43]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44]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후에 황의(黃衣)[45]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46]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47], 공(公), 후(侯), 백(伯)[48], 재추(宰樞)[49]와 고위 문무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50]을 올리고 만세(萬歲)[51]를 외쳤다.
- 고려사, 세가, 원종 순효대왕 재위 원년(1260년) 4월 中.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52]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궁전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수를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대궐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 같이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천하의 나라들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신하들의 자리에 오셔서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만승(萬乘)[53]과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고려사, 세가, 의종 24년 1월 1일.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겸손이 첫째이다. 이 때문에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왕(王)ㆍ공(公)은 자칭하기를 고(孤 아비가 없다는 말)ㆍ과(寡 덕이 적다는 말)ㆍ불곡(不穀 착하지 못하다는 말)이라 한다.' 하였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이)글을 올릴 적에 성(聖)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고 덕을 찬미함에 있어 용어가 너무 지나치니, 심히 합당하지 않다.
지금부터는 무릇 장(章)ㆍ소(疏)를 올리거나 공용 문서에도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사, 세가, 인종 16년 2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오호라! 성철의 도(聖哲之道)[54]는 존망을 아는 것이며 불로의 말(佛老之言)[55]은 생사를 알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치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돌아가는 자는 변화에 순응해 남지 않고, 남아있는 자는 슬퍼하며 효를 드러내는 것은 천하의 도이다.

아! 너 왕태자(王太子) 현(晛)[56]은 충효(忠孝)의 미덕을 갖추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덕업(德業)이 융성하여 인망(人望)을 갖추었다. 이에 마땅히 왕위(王位)[57]에 오를 수 있도다.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성현의 철칙을 깊게 생각하고 조종의 영광을 저버리지 말라.

문무백료(文武百寮)는 다 같이 협력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 왕가(王家)[58]를 보우하라. 중외(中外)에 이를 포고해 짐의 뜻을 알게하라.
고려사, 세가, 인종, 인종의 유조(遺詔)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59]를 유(宥)[60]로, 주(奏)[61]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재위 2년 3월 中.
짐(朕)과 신라(新羅)는 피를 나눈 동맹(同盟)이다. 그리하여 양국(兩國)이 영원히 서로 잘 지내며 각자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다.

이제 나왕(羅王)이 굳이 칭신(稱臣)을 원하고, 경등(卿等)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 짐(朕)은 마음이 아프지만 중의(衆意)가 원하니 받아들이겠다.
고려사, 세가, 태조 재위 18년(935년 12월), '천덕전에서 고려 - 신라 합방이 선포되다.'
은 선고(先考) 유업(遺業)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대위(大位)에 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니 방국(邦國)의 권한(權)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사민(士民)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문(權門)에서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난신(逆賊亂臣)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고려사, 세가, 헌종, 양위 조서.
생각컨데 황숙고(皇肅考)[62]께선 의와 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구가의 임무[63]가 나에게 왔는데, 위엄있는 영혼이 마치 신과 같습니다.
경기(慶基)를 중흥(重興)시키니 뛰어난 갑옷을 남기셨습니다. 종과 북을 두들겨 때에 맞추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황고(皇考)[64]께선 청명하시고 하늘의 법을 지켰습니다.
도를 위해 존경하고 근면하셨으니 그 마음이 연못을 채울 수 있습니다.
뛰어난 계획과 신령한 판단은 바람을 불게하고 천둥을 울리게 합니다.
제가 그 덕을 잇고 싶으니, 부디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사 악지 숙종 태묘 악장
해동천자(海東天子)인 지금의 황제(帝)께서는 부처님과 하느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음은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물다네.
고려사, 악지, 풍입송의 도입부 中.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65] 등을 천정(天庭)[66]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
고려사, 열전, 윤관,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다. 中[67]
황후(皇后)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68]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고려사, 열전,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는 종실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 종실서문 中.
그대와 함께 같은 날 황기(皇畿)를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의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69]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
고려사 열전 태조 왕자 안종 왕욱(王郁) 中 헌정왕후에게 안종이 바치는 시.
곤면(袞冕)을 내리니 제도가 구장(九章)에 미쳤다.
고려사, 열전, 종실[70]
성황(聖皇)께서는 고귀한 분이 되실 줄을 미리 아시고 후궁(後宮)에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상황(上皇)께서…
고려사, 열전, 희종 후비 中.
올리는 모든 표문에서는 성상폐하(聖上陛下)라 칭하고 전(箋)에서는 태자전하(太子殿下)라 칭하며, 제왕(諸王)은 영공(令公)이라 하고…
고려사, 지, 공문서를 주고받는 규정 中.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이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고려가 작은 나라라고들 일컫지만 산과 바다가 가로 막혀 지세가 험한 까닭에 우리나라가 정벌에 나선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한 실정입니다. 고려 태자 왕전(王?)이 입조해 체류한지가 이태나 되었지만 마침 황제께서 서방 정벌에 나가 계신 관계로 대접이 소홀해 우리를 진심으로 따르지 못했으니 한 번 제 나라로 귀국해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 숙소와 음식을 번왕(藩王)에 어울리게 격상시켜 주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부친이 죽었다고 하니 우리가 그를 국왕으로 임명해 귀국시켜 준다면 필시 은덕에 감격해 신하의 직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힘들게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한 개 나라를 얻는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고려사, 세가, 원종 즉위 원년 中.

2.1.2. 동국이상국집

臣伏覩聖上陛下某月某日朝享大廟。某日御儀鳳樓大赦。於是內外白衣諸生。序立闕庭。各進謠頌。仰歌聖德。臣以右拾遺扈從。親覩盛禮。臣本諸生。擬諸生所進。謹成聖皇朝享大廟頌一篇。但慙赧惶恐。不能自獻。庶有以達于天聽者。臣無任戰懼隕越之至云云。其詞曰。

於穆聖皇...荷天眷命...我聖皇之代...百辟卿士...嗣孫萬壽...民咸曰我聖皇是民之父母...

신이 감히 보기로는, 성상폐하께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태묘(大廟)[71]에 조향(朝享)하였습니다. 모일에는 의봉루(儀鳳樓)에 나가셔서 대사(大赦)[72]를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으니 백의(白衣), 제생(諸生)이 궐정(闕庭)에 서립(序立)하여 각각 노래와 찬송을 올리어 성덕을 찬양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우습유(右拾遺)로서 호종(扈從)하여 성대한 예식을 직접 보았사오며, 신은 본래 제생(諸生)이옵기에[73] 제생으로서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부끄럽고 황공하여 제가 직접 올리지 못하겠지만 감히 천청자(天聽者)[74]에게 드리니 신은 떨리고 황송합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 아름다우신 성황이시어 ... 천명[75]을 받으셔서 ... 나의 성황의 시대에 ... 많은 제후와 경사들은 ... 사손의 만수[76]다 ... 만 백성이 말하길 나의 성황은 백성의 부모다...
동국이상국집, 19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
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諸侯)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동국이상국집, 33권,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中.

2.1.3. 동인지문사륙

신하들이 사사로이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77]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78]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
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상(皇上) 폐하[79]께서는 하늘이 낳아주신 성지(聖智)로 총명(聰明)을 자부하시어, 옛 성현(聖賢)으로써 묵은 자취를 삼으시고 당세(當世)의 보신(輔臣)으로써 관원을 갖추시었으나, 밤낮으로 계고(稽古)하는 근로가 없고, 궤연(几筵)에는 어진 이를 맞이하는 자문이 없습니다.
동인지문사륙, 권10, 조신(朝臣)에게 연방(延訪)하실 것을 청하는 표문[請延訪朝臣表] 정극영(鄭克永) 中.

2.1.4. 동문선

"제(帝)가 진(震)을 나와 하늘(乾)을 탄다."는 단지 때에 맞추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허나 왕께서 호경(鎬)에 가 술을 드신다는 건 바로 여러 사람과 같이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봄을 부러워하니 식(式)이 즐거워집니다. 물고기 때와 같이 움직이니 시가(詩歌)를 부르니 인애롭게 취합니다.

민(民)이 생긴 이래 금일과 같은 흥성함이 없었습니다. 상제(上帝)가 돌보아 만년을 갈 상스러움이 나타나 새로운 장관(壯觀)을 보았습니다. 사방에서 환희의 소리가 들립니다.

엎드려 황상(皇上)을 생각컨데 슬기로우시며 거룩하십니다. 능통하시며 신령스러우십니다. 도량이 크시며 겸손하십니다. 당고(唐高)[80]의 성덕(盛德)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뽐내시려하지 않습니다. 늘 문왕(文王)의 마음가짐을 가지려 하시니 정치가 고쳐지고 폐단이 보수됩니다.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자를 고르시고 못난 자를 떠나 보내셨습니다.

땅이 어찌 (왕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귀한 금덩이가 동도(東都)[81]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이 성명(成命)을 내리니 신새(神璽)가 서주(西州)[82]에서 나왔습니다.

(생략)

벼락을 두른 금여(金輿)를 타고 하늘(天)[83]이 보좌(寶座)에 오시니 실가(室家)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생략)

만국(萬國)에서 옥(玉帛)을 들고 조회하려 옵니다.

신 등도 법을 배우고 민요(民謠)를 채집해 천안(天顔)을 받들고 구호(口號)[84]를 외칩니다.
옥련(玉輦)이 서순(西廵)한지 여섯번째 봄이 왔네.
주방(周邦)은 오래됐지만 천명(命)은 새롭네.[85]
건원(乾元)[86]께서 아홉 용을 부르시니,
사방의 나라들이 제후가 되고자 하네.
제소(帝所)[87]는 이미 즐거움이 퍼졌고,
노루가 군신(群臣)을 반겨주네.
대평(大平)하니 부로(父老)들이 앞다투어 축하드리고자 하고
오색 구름(五色雲)이 북진(北宸)[88]을 바라보고 있네.
즐거움과 의범이 있으니 구름들이 모이네,
순수하며 윤택하니 운율의 조화가 들린다.
진엄(辰嚴)[89]을 받들어 공사(工師)들이 같이 노래를 부른다.
동문선 104권 이인저 작 서경 대화궁 대연 치어
아랑위야, 들보 남쪽을 쳐다볼세, 천중만중 얽어 놓은 빛나는 궁궐은 그 형세가 깊숙도 하구나. 금니(金泥)로 글을 써서 봉선(封禪)[90]할 가기(嘉期)가 가까웠으니, 숭악(嵩嶽)이 응당 만세 삼창을 할 것이다.
동문선 108권 연경궁 정전 상량식

2.1.5. 보한집

본국에 장차 환란이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나이다. 그러나 다행이 천자의 빛나는 모습을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보한집,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바친글 中.

2.1.6. 삼국사기

성상폐하(聖上陛下)[91]께서는 요(堯)임금과 같은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우(禹)임금과 같은 근검(勤儉)을 체득하시어, 정무에 골몰하던 여가에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시고, “요즈음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중에 『오경(五經)』, 『제자(諸子)』와 같은 책이나 진(秦)ㆍ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자가 간혹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옵나니, 성상폐하께서는 소홀하고 거친 솜씨를 이해해주시고 멋대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며, 비록 명산(名山)에 보관하기엔 부족하더라도 간장 단지를 덮는데 쓰이지는 않았으면 하옵니다. 저의 구구하고 망령된 뜻을 하늘과 해님께서 굽어 살펴주소서.
삼국사기, 진삼국사기표 中

2.1.7. 삼국유사

태조[92]의 손자인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93]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정승을 상보(尙父)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김부대왕 中

2.1.8. 신증동국여지승람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中.

2.1.9. 제왕운기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大金) 황제(皇帝)는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中.

2.1.10.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94]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95]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신 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교정하였는데, 태조(太祖) 이래로 모두 묘호(廟號)를 일컬었는데, 이제 시호(諡號)로 고쳐 쓰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대로 두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이 중국 조정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자못 많아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나, 이는 책에 써서 만세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경의 말이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김종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서적(書籍)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많은데, 어찌 능히 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을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보고서 꾸짖기를, ‘천자(天子)가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참람되게 일컫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무열왕(武烈王)이 어진 신하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얻어서 삼국(三國)을 통합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하니, 무후가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前朝)에서는 중국 조정에 크게 휘(諱)할 것을 거리낌없이 일컬었으니,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하니, 김종직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혹은 연호(年號)를 일컫기도 하고 혹은 황제(皇帝)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이는 모두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8년 2월 10일 中.
"우리 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참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지내면 우리 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2년 2월 23일 中.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천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년 6월 1일 中.

2.1.11. 평거란송

우리 성황(聖皇)의 받으신 명은 실로 하느님이 주신 것이로다. 하느님이 우리 성황(聖皇)을 위하여 달단(韃靼)[96]을 빈손으로 만든 것이다.
평거란송(平契丹頌)[97] 中.

2.2. 중국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98]
그 나라에서 신민(臣民)들은 그 임금을 성상(聖上)이라고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도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라고 불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에 귀속하였다.
자치통감 진(晉) 천복(天福) 원년

2.3. 일본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수좌기[99], 조랴쿠 4년(1080년)

[1] 고려 광종이다.[2] 미혹한 세계인 차안(此岸)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3] 광종을 가리킨다.[4] 경종을 가리킨다.[5] '태평'이 여기에서 나오는 금상황제인 경종의 연호라는 주장이 있다.[6] 탈 승(乘)자는 수레를 의미하는데 주나라 천자는 전차 1만승(乘)과 6군을 거느린다고 했으며 제후는 전차 1천승과 3군을 거느린다고 한것이 출전이다.[7] 현종을 두고 한 찬사다.[8] 광종을 가리키며 묘호인 종(宗)을 썼다.[9] 정종을 가리킨다.[10] 문종을 가리킨다.[11] 명의태후를 뜻한다.[12] 인종을 뜻함.[13] '조천'은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쓰는 표현으로 '하늘을 받든다.'란 뜻이다.[14] 신종(神宗)이라고 묘호인 종(宗)을 썼다.[15] 만월대를 가리킨다.[16] 최의를 가리킨다.[17] 천자국에서는 황실에 속한 사람들의 생일을 여기서 나온 '천춘절(千春節)'같이 'xx절'이라 부르며 특별히 기념한다. 이것이 절일이다.[18]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였다.[19] 원종을 뜻한다.[20] 여기서 태손은 충렬왕을 뜻하며 태손의 태(太)와 같이 '태'자가 들어가는 태자, 태손, 태후, 태위, 태사, 태묘 등등의 어휘는 천자국만 쓸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 같은 경우에는 세자, 세손, 대비, 종묘로 하고 태위, 태사 같은 벼슬은 두지 않았다.[21] 내용 중에는 왕위(王位)나 사왕(嗣王)같은 제후국의 표현도 나오는것으로 보아 용어의 정함이 엄밀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22] 고려 왕조을 뜻한다. 서경에 갔다 병이 났기 때문이다.[23] 왕좌를 뜻한다.[24] 예종을 말하는 것으로 제후국의 왕과 천자국의 태자를 혼용하였다.[25] 방(方)은 천하, 제후를 의미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지방 행정단위이다.[26] 고굉은 팔과 다리, 즉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27] 辟은 임금 벽 자다. 백벽은 백 명의 임금, 즉 다시말해 백명의 제후를 말한다. 숙종이 황제로서 제후들에게 말하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다.[28] 왕이라는 용어도 혼용에서 쓰는 고려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29] 태사와 중서령, 공작 모두 천자국의 제도이다.[30] 구오지존은 주역의 이치에 따라 황제의 지위를 이르는 말이다.[31] 친왕황제의 황자에게 내리는 제후 왕작이다.[32]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을 뜻한다.[33] 모든 공작이라는 뜻이다.[34] 인종을 뜻함[35] 원자란 뜻이다.[36] 왕이란 용어도 혼용함을 알 수 있다.[37] 방(方)은 나라 방 자로 쓰인 것으로 천하 혹 제후들을 지칭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행정단위이다.[38] 태묘를 뜻함[39] 사직을 뜻함[40] 태자의 다른 말이다.[41] 方은 나라 방 자이기도 하다. 즉 多方은 많은 나라, 천하란 뜻이다.[42] 왕도 혼용해서 사용했다.[43]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있던 본궐의 편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44] 밀교의 세례식이다.[45] 황제는 황색옷을 입는다.[46]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관리들.[47] 제후식으로는 세자다. 당시 태손은 충렬왕이다. 아직 태자로 승급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태손으로 불렸다.[48] 황제만 봉작 할 수 있는 제후의 등급들이다. 고려의 봉작제는 이분화되어있었다. 신하의 오등작, 왕족의 삼등작인데 여기선 왕족의 삼등작을 지칭한 것이다.[49]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을 지칭한다.[50]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다.[51] 제후왕식으로는 천세이다.[52] 만월대 본궐에 있던 전각.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으나 중기부터 제 2정전으로 밀려 났다.[53] 천자를 뜻하는 말로 대부의 나라는 백승지국(百乘之國), 제후국은 '천승지국(千乘之國)', 천자국은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부른데서 연원한다.[54] 유교를 뜻한다.[55] 불교를 뜻한다.[56] 고려의 애매한 법식을 나타내는 단어로 왕과 태자를 붙여 사용했다. 의종을 뜻한다.[57] 역시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고 있다.[58] 역시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고 있다.[59]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60]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61]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걸 주(奏)라고 한다. 제후가 천자에게 아뢰는 것도 주(奏)라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불평한 것이다.[62] 고는 족보상 아버지를 의미하고 숙은 숙종의 묘호, 황은 황제를 의미한다. 즉 황숙고는 내 아버지인 숙종 황제란 뜻이다.[63] 태묘에 제사지내는 군주의 임무를 의미함.[64] 황제의 아버지.[65] 여진의 관리들[66] 천자의 조정, 즉 고려의 조정을 의미한다.[67] 1109년, 윤관이 화친하자는 여진 장수 오사에게 전한 말이다.[68] 인종을 의미함.[69] 성종을 뜻한다.[70] 예종(1105~1122)이 대방공 왕보(王俌)를 책봉한 글에 보이는 기록으로 대방공 왕보는 숙종의 아들로서 인종에게는 동생이 되어 중국의 제도에 따르면 친왕(親王)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종은 왕보를 책봉하면서 9류관과 9장복으로 구성된 제복을 사여하였다. 이는 당과 송에서 친왕에게 적용되는 등급이다. 따라서 예종을 포함한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태묘 제사 등의 국내 의례에서 12류관과 12장복으로 구성된 제복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이종서, 고려 국왕과 관리의 복식(服飾)이 반영하는 국가 위상과 자의식의 변동.)[71] 제후국 법도로는 종묘라 해야 한다.[72] 제후의 법식으로는 '유경내'(宥境內)라고 해야한다.[73] 겸양의 표현으로 수많은 서생 중 하나라는 뜻이다.[74] 하늘로서 듣는자, 다시말해 천자를 뜻한다.[75] 하늘과의 소통은 인간 중에서는 오직 천자만의 특권이다.[76] 후대가 만대로 간다는 뜻으로 제후는 만(萬)이 아닌 천(千)을 써야 한다.[77] 주문왕의 자칭.[78]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렸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79] 고려 예종을 의미한다.[80] 요 임금. 피휘를 위해 요를 고라고 하였다.[81] 경주를 가리킴[82] 평양을 가리킴[83] 인종을 가리킴[84] 즉석에서 만들어 부르는 시.[85] 망한 주나라의 천명이 고려에 왔다는 뜻이다.[86] 하늘의 근원인 황제를 이른다. 반대로 황후는 땅의 근원, 곤원이라 한다.[87] 황제가 있는 장소.[88] 북진은 천자, 임금을 상징하는 별자리다.[89] 인종을 이른다.[90] 황제가 태산에서 행하는 의식[91] 고려 인종을 가리킨다.[92] 고려의 태조 왕건이다.[93] 신라의 경순왕을 의미한다.[94] 여기서 공은 이성계를 부르는 것이다. 오등작은 제후국에서는 쓸수 없는 칭호다.[95] 최영이성계한테 한 말이다.[96] 거란[97] 거란을 평정한 것을 칭송함.[98] 1080년경 북송의 곽약허(郭若虛)가 지은 책.[99] 미나모토노 토시후사 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