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재현(在見) |
호 | 대봉(大峰), 육봉(六峰) |
본관 | 단양 우씨[1] |
출생 | 1868년 9월 14일 |
경상도 비안현 정동면 교촌 (現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 |
사망 | 1940년 5월 24일[2] (향년 71세) |
경상북도 선산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1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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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8년 9월 14일 경상도 비안현 정동면 교촌(現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서 아버지 우지해(禹智海, 1831 ~ ?. 6. 23)와 어머니 선산 김씨(1841 ~ ?. 3. 16)[3]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04년 1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하천 항해권을 탈취하는 등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 및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동지 강원형(姜遠馨)과 함께 일본군의 불법 침략을 규탄하는 공문서를 조선 국내 각 나라의 공사관에 발송했다. 이어 그해 8월 일진회가 조직되어 매국적인 활동을 이어나가자 이를 규탄하다가 1905년 5월 일본군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고, 1905년 8월 한국 연해 및 내륙 하천 항행(航行)에 관한 약정서(韓國沿海及內河航行ニ關スル約定書)가 체결되자 8월 21일 당시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집에 뛰어 들어 이하영의 얼굴에 침을 뱉은 뒤 "너는 나라를 팔아 먹고도 부족하여 하천마저 팔아 먹으니 다음에는 또 무엇을 팔 것이냐?"라고 매도했다가 일본군 헌병대에 재차 체포되기도 했다.
1906년 2월 28일 석방된 뒤에도 대한제국 정부의 친일대신들과 일본에 대한 굴복정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 차례 올려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고, 1906년 4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에 가입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이후 1907년 8월 대한자강회가 이완용 내각에 의해 해산당하고 그해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새로 조직되자 이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경술국치를 전후해 경상북도 대구부에 거주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후 선산군으로 이주해 해평면장에 임명되었는데, 종종 선산군청에서 출두(出頭)하라는 공문을 보내오면 군청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고 말그대로 출두(出頭), 즉 머리만 안쪽으로 들이밀며 "해평면장 우용택 출두하였소!"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총독부에서 각 지방에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내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내오자, 우용택은 충신은 이완용, 효자는 장승원(張承遠, 1852 ~ 1917. 11. 12)[4], 열녀는 해평면 장터 김선낭(金仙娘)[5]이라고 추천해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해평면장에서 면직당했고, 이후 1940년 5월 24일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