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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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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고대 ~ 중세2.2. 근세2.3. 근대
3. 사례4. 관련 문서

1. 개요



일반 백성과 선비들에게 중국 중심의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은, 땅은 평평하고 반구형의 우주가 덮개[1]처럼 덮여있다는 개천설(蓋天說)이다.

중국 주나라 시대에 나온 설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과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하다’는 천동지정(天動地靜)으로 요약되며 성리학적 우주관의 기반으로 조선의 선비나 중국 유학자 등 일반적 동양 지식인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로 믿었다. 단, 천원지방은 철학에서 형이상/형이하 혹은 무형/유형의 세계를 가르는 말로 주로 풀이된다.

2. 역사

2.1. 고대 ~ 중세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묵자는 지구가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기이한 주장으로만 받아들여졌을 뿐, 당시의 사람들의 우주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 주나라 시대의 천문설인 개천설(蓋天說)이 대표적인 지구 평면설이다.

다만 이 설은 처음에는 우주와 지구 모두가 평평하되, 하늘은 원반 모양이고 땅은 사각형이며, 별은 하늘에 붙어있는 것이라고 여겼다가[2], 후기에는 땅이 곡면이고 하늘은 땅을 덮은 곡면이라고 보았다.

2.2. 근세

그러다 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처럼 둥근 우주의 바다 중심에 평평한 지구가 달걀 노른자처럼 둥둥 떠 있다는 혼천설(渾天說)이라고 하는 일종의 천동설이 등장했다. 이 혼천설은 주로 천문과 역법 관리나 지도제작자 등 동양의 천문 전문가들이나 뛰어난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역법이나 중국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도 혼천설 모델을 따라 제작되었다. 조선의 혼천의도 중국 혼천의를 따라 만들어졌다. 15세기 중국판 세계지도도 두 개의 반구로 나눠 그려 혼천설을 반영하고 있다.

혼천설은 기존의 천원지방설보다 발전된 이론이었으나 실제 천문 관측이나 지도 분야 등 관련 전문가들에게 주로 한정된 지식이고 관리 등 일반 지식인 들 사이에서는 관념적으로는 여전히 평평한 땅을 반원형 덮개가 덮고 있다는 천원지방설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지구 구형론이 유럽에서 온 아담 샬 등의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천문학자나 서양에 관심많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보급되었고, 근대까지는 대부분의 관리나 민중 사이에서 여전히 혼천설 아니면 천원지방설이 널리 믿어졌다.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구 구형론이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후 중국 후한 때 혼천설(渾天說)[3]이 등장하고, 혼천가와 개천가의 논쟁 결과[4] 혼천가가 압승하면서 이후 동양 우주론은 혼천설만 남게 된다. 이 논쟁은 후한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이미 논쟁이 다 끝난 혼천설을 그대로 수입만 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이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선기옥형)가 이 혼천설과 관련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혼천설은 하늘은 지금의 천구와 같은 구형으로 설명하되 땅까지 구형으로 보지는 않았고, 땅은 평평한 구조로 여겼다. 땅을 노른자에 빗댄 것은 땅이 가운데에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5]

이 외에 선야설, 안천설, 궁천설, 흔천설 등도 있었으나, 확고하게 정설로 자리잡은 혼천설 앞에서 힘을 잃었다. 선야설에 관한 기록만 조금 남아 있으며, 다른 설들은 어떤 설인지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 그나마 선야설에 대해 남은 기록도 '선야설은 해, 달, 별의 무리는 하늘에 둥둥 떠 있으며, 기(氣)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도 정지하기도 하고 그 움직임은 불확실하다'는 게 전부다.

동양에서 전통적인 천동설의 붕괴는 상당히 늦었다. 조선의 경우, 김석문, 김만중, 이익, 박지원, 홍대용 등의 학자들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한 논의를 접하긴 했으나, 보다 현실에 가까웠던 지구 구형설과 지전설의 입증에 집중하여 사실상 천동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전과 공전의 체계를 완전히 정리하여 수용한 것은 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는 우주론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묵자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지칭한 표현들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주자 등이 이를 받아들이고, 지구 구형설과 스스로 돌고 있다는 관점 등이 위에 언급한 김만중 등에게까지도 이어졌다. 주자의 사례를 보면 지구 구형설, 지전설 등은 인정하는 이들이 꽤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중국에서는 서양의 역법과 과학기술 등이 조금씩 전래되고 있었던 점도 감안할 수 있다.

단, 근본적으로 땅이 둥글고 움직이는가 하는 논점 자체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직관에 기반한 인문철학을 중시한 반면, 관찰에 기반한 자연철학은 매우 미비했던 동아시아의 지적풍토에서 천문현상은 달력 만드는 역관만 알면 될 뿐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조선인으로 최초로 서양과학을 접한 것은 청나라에 인질로 붙잡혀온 소현세자가 중국에 서양과학을 전파한 장본인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와 직접 교류한 것으로 그리스도교와 서양과학 특히 천구의 등 천문학과 역법을 소개받고 수하들에게 이를 전수받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요절로 조선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후 조선에도 이수광이 조선에 서양을 소개하고 중국을 통해 한역 서학 서적이 들어오거나 서양 천주교 선교사와의 접촉으로 홍대용박제가 등 몇몇 실학자들이 지전설 지구구형설 태양중심설(지동설) 등을 접하고 이를 주장 전파하고 최한기가 태양중심설 및 뉴턴 역학 기반의 서양 우주론을 다룬 책을 저술한다.

하지만 이런 서양 우주론은 개천설에 근거한 주자학적 전통 세계관과 정면충돌하고 서양 중세사회에서의 태양중심설처럼 성리학 철학에 기반한 조선사회를 뒤흔들 위험 때문에 조선에는 널리 수용되지 못하고 청나라의 학풍에 영향을 받은 북학파 등 일부 실학자들에게만 전파된다. 신미양요병인양요 무렵에도 조선 관리와 접촉한 서양인들이 둥근 지구본을 보여주며 자기들 나라의 위치를 설명했지만 조선 관리들은 남반구에 사람이 거꾸로 붙어사는 것에 의문을 표했다고 한다.[6]

동양의 경우 중세는 물론 근세까지 혼천설이 정설이었으나, 이는 실제 천문 관측 분야에서만 그렇고[7], 관념적으로는 여전히 천원지방설이 우세했다.

2.3. 근대

조선 말기 개화기에 역관 유홍기(유대치) 등이 젊은 개화파 인사들에게 청나라 선진문물을 소개하며 지구구형론을 전파하였고 그후 개항 전후에 개화문물의 형태로 젊은 선비와 학생 등 일반적 지식인 사이에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

3. 사례

4. 관련 문서


[1]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단어는 공창, 창공이 있으며, 영어로는 doom이다.[2] 여기서 천원지방이란 말이 나왔다.[3] 하늘과 땅을 달걀 껍질과 노른자에 빗대어 설명한다.[4] 개천설을 천원지방과 동일시하고 혼천설이 개천설보다 진보된 것이라서 개천설을 대체했다는 이해는 현재로선 낡은 것이다. 각자 나름의 실용적 이유와 철학적 관념이 있었다. Nakayama Shigeru, A history of Japanese astronomy: Chinese background and Western impact, 1.4 "Early Chinese Cosm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 (1969): pp 24-43.[5] 오히려 혼천설에 묻혀버린 후기 개천설이 땅의 모양을 북극이 정상인 반구형이라고 해서 지구설에 더 가깝다.[6]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18세기 뉴턴역학 수준의 중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따라 지구는 둥글고, 지구의 중심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중심에 가까워지는 것이 낙하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즉 서양에서는 지구의 중심에 가까운 방향이 "아래"이고 멀어지는 방향이 "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동양에는 지구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위"와 "아래"의 관념 자체가 달랐고, 우주공간에 둥근 땅이 떠 있다는 지구설을 처음 설명받자 북극이 "위"고 남극이 "아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종의 공약불가능성이다. 그래서 동양의 유학자들은 어떻게 남반구 사람이 우주공간으로 "낙하"하지 않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창의적인(?) 이론들을 고안했다.[7] 1427년 조선에서 이순지가 월식의 그림자를 관찰하여 지구 구형론과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낭설이 있다. 하지만 이순지가 쓴 천문류초(천상열차분야지도 해설서)를 보면 분명하게 천원지방과 천동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낭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순지가 1427년 월식의 그림자로 지동설을 입증했다고 하는데, 일월식 계산 자체는 천동설로도 멀쩡히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순지는 1427년 갓 과거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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