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08:28:38

유리 3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b1215, #a8181c 20%, #a8181c 80%, #7b1215); color: #f7c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류리크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유리 3세 이반 1세 세묜 이바노비치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반 2세 드미트리 돈스코이 바실리 1세 바실리 2세
제9대 제8대2 제9대2 제10대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바실리 2세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바실리 유리예비치
제8대3 제11대 제8대4 제11대2
바실리 2세 드미트리 유리예비치 바실리 2세 드미트리 유리예비치
제8대5 제12대 제13대 제14대
바실리 2세 이반 3세 바실리 3세 이반 4세
키예프 · 모스크바 · 차르국 · 제국 · 공화국 · RSFSR · 연방 }}}}}}}}}
<colbgcolor=#9f0807><colcolor=#ffcc21> 모스크바 대공국 2대 대공
유리 3세
Юрий III
파일:유리 3세.jpg
출생 1281년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사망 1325년 11월 21일 (향년 44세)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재위 모스크바 대공
1303년 3월 5일 ~ 1325년 11월 21일
재위 블라디미르 수즈달 대공
1318년 ~ 1322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9f0807><colcolor=#fecd21> 이름 유리 다닐로비치
(Юрий Данилович)
배우자 콘차카
아버지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어머니 에브도키야 알렉산드로바
종교 정교회
왕조 류리크 왕조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트베르의 미하일과의 갈등2.3. 말년

1. 개요

모스크바 대공국 2대 대공, 블라디미르 수즈달 대공.

2. 생애

2.1. 즉위 전

유리는 모스크바의 첫 번째 대공이자 다닐로비치 가문의 시조인 모스크바의 다닐의 장남이었다. 그의 첫 번째 군사 행동은 블라디미르의 대공인 고로데츠의 안드레이로부터 표료슬라블잘레스키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2.2. 트베르의 미하일과의 갈등

그의 아버지 다닐이 1303년에 죽은 후, 유리는 모스크바의 대공이 되었고, 그의 삼촌인 트베르의 미하일과 함께 블라디미르의 대공 (루스의 공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이라는 칭호를 놓고 다퉜다. 다닐은 한 번도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유리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은 전통적인 승계 관행에 따라 블라디미르의 왕좌에 대한 정당한 주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다음 해인 1304년 7월 27일에 고로데츠의 안드레이가 사망했을 때 황금 무리의 칸인 토흐타가 트베르의 미하일에게 대공 직함을 부여한 이유이다. 미하일은 황금 무리의 수도인 사라이로 갔고, 칸은 그를 대공으로 올려놓았다. 그의 조카 유리는 이 임명에 반기를 들었지만, 1305년과 1308년에 모스크바에 대항하여 트베르의 미하일이 벌인 두 차례의 군사 작전은 유리가 칸의 결정에 따르도록 강요했다. 트베르의 군대는 페레슬라블과 모스크바 자체를 포위했다.

한편, 유리는 랴잔의 콘스탄틴 왕자의 살해를 주선했다. 이 불운한 통치자는 1302년에 유리의 아버지에게 붙잡혔고 그 이후로 모스크바에 투옥되었다. 랴잔이 그러한 야만 행위에 충격을 받은 동안, 유리는 콜롬나의 핵심 랴잔 요새를 모스크바에 합병했다. 그는 또한 이전에 스몰렌스크의 왕자들의 소유였던 모하이스크를 점령했다. 1314년까지, 유리는 메트로폴리탄 피터로부터 지원을 확보했고 트버에 대항하여 노브고로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제, 그는 무리에서 트베르의 미하일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느꼈다.

1315년, 유리는 황금 무리로 갔고 그곳에서 2년을 보낸 후, 우즈베크 칸과 동맹을 맺었다. 유리는 유리와의 결혼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타타르족 공주인 칸의 여동생 콘차카와 결혼했고 그녀의 세례명으로 "아가피아"를 채택했다. 우즈벡 칸은 미하일을 폐위시키고 유리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했다. 타타르족의 대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온 유리는 트버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유리의 군대는 패배했고 그의 동생 보리스와 그의 아내는 포로로 잡혔다. 그 후 그는 노브고로드로 도망쳤고 평화를 위해 소송을 걸었다. 그 때 아직도 트베르에 인질로 잡혀 있는 그의 아내는 예기치 않게 죽었다. 유리는 이어지는 혼란을 이용했고 미하일의 명령에 따라 독살되었다고 칸에게 발표했다. 우즈벡 칸은 두 왕자를 모두 사라이로 소환했고 재판 후, 1318년 11월 22일 미하일을 처형했다. 우즈베크 칸의 호의에 의지했고 이익을 얻었던 유리는 다음 몇 년 동안 (1318–1322) 블라디미르의 대공이 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2.3. 말년

유리는 노브고로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1319년에 수즈달로 돌아왔다. 그는 대군주에 대한 그의 임명이 사생아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왕자들과 대중들 모두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제는 대군주에 대한 공물을 모으는 일을 위임받은 유리는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우스베그는 그들의 공동 권한을 시행하기 위해 유리의 대군주로서 마지막 2년 (1320–1322) 동안 자그마치 네 번의 징벌적 원정대를 루스의 북동쪽 공국에 보냈다. 특히, 미하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트베르의 드미트리는 여전히 그를 반대했다. 1322년, 그의 아버지의 살인에 대한 복수를 추구하던 드미트리는 사라이로 가서 칸에게 유리가 대군주 때문에 공물의 많은 부분을 전용했다고 설득했다. 우즈벡은 드미트리에게 블라디미르의 대군주에 대한 특허를 주었다. 유리는 재판을 위해 대군주에 소환되었지만 어떤 공식적인 조사도 하기 전에 드미트리에 의해 살해되었다. 8개월 후, 드미트리는 또한 킵차크 칸에게 처형되었다. 1326년 초, 유리의 유해는 모스크바로 반환되었고 표트르 주교가 이끄는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그가 죽기 직전, 유리는 노브고로드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인과 싸웠고 네바 강 어귀에 오레셰크 요새를 세웠다. 1323년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와 오레셰크 조약[1]에 서명한 후, 유리는 계속 동쪽으로 이동했고 같은 해 벨리키 우스투그를 정복했다.


[1] 서구권에서는 오레셰크(실리셀부르크)의 스웨덴어 지명인 뇌테보리 조약으로 더 알려져있다. 핀란드어로는 페키넬린나 조약. 핀란드카렐리야의 범위를 설정한 스웨덴과 러시아 최초의 국경에 관한 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