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9 00:25:25

유병헌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유병욱(劉秉旭)
자 / 호 주현(周顯) / 만송(晩松)
본관 강릉 유씨[1]
출생 1842년 11월 29일[2]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상강리
(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3]
사망 1918년 7월 20일[4]
경상북도 칠곡군
묘소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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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병헌은 1842년 11월 29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상강리(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서 유익원(劉翼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5적 성토문'을 써서 일제의 불의 및 이완용·송병준 등의 을사오적·정미칠적이용구 등의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논박하고 한국인은 일제에 납세 및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1년 음력 7월 중순, 북삼면장 이우연(李愚淵)은 인동군 면장 회의에서 인동군수로부터 인동군청 및 관내 각 면서기의 급료에 충당하기 위해서 면마다 총 175원씩 거두어 납부할 것을 하달받았다. 이에 7월 25일 북삼면 리·동장 회의 자리에서 위 납부금을 위해 각 호당 21전 8리의 부담금을 납부해야한다고 시달하였고, 이에 하강동장 이기훈(李基薰)은 유병헌의 친족인 유병선(劉秉善)에게도 21전 8리를 납부할 것을 명령했다.

이를 들은 유병헌은 평소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느끼는 바가 있어 그해 8월부터 12월까지 4차례에 걸쳐 「광고」·「민폐혁파의 건」·「각 마을 모든 이에게 게시한다.」·「널리 천하에 告(고)하는 文(문)」등의 금전 징수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러한 명령에 응하지 말라는 격문을 써서 이 중 앞선 3부는 약목면 헌병파견소 게시판에 게재하였고, 마지막 1부는 소지하다가 11월 19일 일본 육군 헌병 상등병 모(某)씨에게 압수당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그해 12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개월형을 선고받고 첫번째 옥고를 치렀다.#
滄桑(읍창상) :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
入此山(입차산)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
劉秉憲(유병헌) : 유병헌이 씀.
壬子 二月 一日(임자 이월 일일) : 1912년 2월 1일에 새김
1912년 2월 1일 유병헌이 직접 바위[5]에 새긴 글씨.#
北望痛哭(북망통곡) :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吾王不忘(오왕불망) : 우리 왕을 잊지 못하노라.
朝鮮上江(조선상강) : 조선의 상강마을에서
劉秉憲 書(유병헌 서) : 유병헌이 씀.
壬子 七月 二十五日(임자 칠월 이십오일) : 1912년 7월 25일에 새김
1912년 7월 25일 유병헌이 직접 '통곡바위'[6]에 새긴 글씨.#
출옥 후 1912년에는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측량도 거부하였고, 창덕궁에 세금을 납부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12일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논과 밭마다 측량 푯말을 꽂아둔 것을 다음날 다 뽑아버렸던 일로 인해 그해 12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토지조사법 위반, 토지측량 총규칙 위반 혐의로 금고 5개월형을 언도받고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2

당시 유병헌은 법정에 서서도 재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수감 중에 병이 났을 때도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 서기 야마카게(山陰)이 찾아와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듣지 않았다.
"여름 대나무 여름 소나무 세태 따르는 것 같아 보이나, 겨울 소나무 겨울 대나무의 마음 누가 알겠는가. 푸른 하늘에 오직 조선의 태양만이 있을 뿐이니, 창해 역사의 철퇴 소리 머지 않아 있을 것이다."
(夏竹夏松隨世態, 冬松冬竹有誰知, 靑天只有朝鮮日, 滄海椎聲必不遲.)
조선총독부 서기 야마카게(山陰)에게 읊었다는 시.#
1918년 2월 7일에는 칠곡군청에서 그가 양조면허 없이 밀주를 빚은 사실을 탐지하고, 가택 수색 끝에 막걸리 4되를 압수하였다. 유병헌은 이에 분개하여, 출장차 온 군서기 등에게 '일본인을 따르는 자는 살해해야 한다.'며 소리를 지르며 폭행을 가하였기에 동행한 경찰관이 이를 제지했으나, 유병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당시 군서기 고토 쿄사이(後藤強哉)에게 건네며 듣지 않았다.
우리 조선에서 태어나서 우리 황제를 배반하고 일본을 따른 군수와 같은 자는 개와 말만도 못한 자이다. 세금은 우리 황제에게 납부해야 한다. 죽어도 적국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보다 일본의 법률을 따를 것이 아니다.
면장·서기들이여, 우리 황제에게 납부해야 할 세금을 멋대로 빼앗음은 무슨 일인가.
역적이여, 국권회복 후 반드시 너희들을 노예로 하고 유배형에 처하며 그 가산을 몰수할 것이다.
1918년 2월 7일 칠곡군 서기 고토 쿄사이(後藤強哉)에게 건넨, 칠곡군수에게 부치는 첫번째 글.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한 놈은 왜놈이고 이 보복의 생각은 한시라도 잊은 적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 술을 만들고 나 스스로 마시는데 감히 일본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
1918년 2월 7일 칠곡군 서기 고토 쿄사이(後藤強哉)에게 건넨, 칠곡군수에게 부치는 두번째 글 「광고문」.
3월 6일에는 약목면 헌병파견소와 칠곡군청 등에 일제 멸망을 예언하는 시구를 보내어 또다시 체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일본의 정치는 분명하지 않으며 그 멸망은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늘 옛 임금을 원하고 이를 따르겠다.'
1918년 3월 6일 약목면 헌병파견소 앞으로 보낸「일본내각부 패문(日本內閣部牌文)」.
'국가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하고 죽음은 천추의 한이다. 일본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1918년 3월 6일 약목면 헌병파견소 앞으로 보낸「자서(自誓)의 절구(絶句)」.
'우리나라가 망해서 옛 임금의 근심이 한이 없다. 우리는 시종 복수의 생각을 끊은 적 없고 늘 옛 임금을 사모하고 융희 법률을 지키고 일본의 풍속은 하나도 따라 행한 적 없다. 우리 술은 우리가 빚고 우리 왕에게 바친다. 결코 일본의 간섭을 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몸은 마디마디 끊어지더라도 영혼은 반드시 당신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1918년 3월 6일 칠곡군청 앞으로 보낸「일본 병참 소시문」.

그해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주세령 뷔반 혐의로 징역 1년형 및 벌금 20원[7]의 처분이 내려졌으나# 이에 공소하였다. 당시 법정에서 "지세(地稅)도 안 내는데 주세(酒稅)를 내겠느냐. 너희 천황의 머리를 베어 술잔을 못 만든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그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금고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세 차례의 투옥만에 8일간 단식한 끝에 옥사·순국하였다.
"차라리 형벌당해 죽을지언정, 왜놈의 신하만은 될 수 없노라. 아아, 나 죽은 후에 수양산 곁에 묻어다오."
(寧爲湯…死, 不作犬羊臣, 嗟呼我死後, 埋骨修養隣.)
순국 직전 썼다고 전해지는 절명시.#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28세손 병(秉) 항렬. 아버지 유익원(劉翼源)은 27세손 원(源) 항렬.[2] 양력 12월 30일.[3] 강릉 유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220번지에 생가터가 남아 있다.#[4] 양력 8월 26일.[5] 숭오리 1464번지에 위치. 선봉사 대각국사비 건너편에 있다고 한다.[6] 생가터인 220번지 바로 옆 225번지에 위치. 이곳은 본래 강릉 유씨 중시조 유창(劉敞)의 영정각이 있었던 터라고 한다.[7] 벌금 납부치 않을시 20일간 노역장 유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