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13 23:54:56

윤경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석(炅錫) / 율애(栗涯)
본관 해남 윤씨[1]
출생 1911년 9월 6일
전라남도 강진군 보암면 율포리
(現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학장리 율포마을 443번지[2])
사망 1934년 10월 9일[3]
전라남도 강진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3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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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1년 9월 6일 전라남도 강진군 보암면 율포리(現 강진군 도암면 학장리 율포마을 443번지)에서 아버지 윤재상(尹在桑, 1886. 11. 19 ~ 1949. 12. 14)과 어머니 안산 김씨(1884. 9. 17 ~ 1934. 8. 4)[4]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現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로 이주했다.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3월,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부당성을 깨닫고 항거하기로 결심한 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학 이용기(李容起)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주로 같은 학교 학우들을 대상으로 포섭 활동을 벌였으며, 여수군 여수면 동정(現 여수시 동산동)에 있던 종고산(鐘鼓山)을 집합장소로 하고 항일의식을 길러 나갔다. 이들은 매주 1회씩 모임을 갖고 일제의 민족차별 및 민족말살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항일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9월 조직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1930년 12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받았으나, 공범이 다른 지청에 송치되어 구류가 계속 이뤄졌다. 이후 10여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겪다가 1931년 7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9월 4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했으나 11월 12일[5]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 혐의에 대해 공소할 이유가 없다고 하여 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2심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34년 10월 9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만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12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호군공파(護軍公派) 28세 현(鉉) 항렬.[2]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경현의 아버지 윤재상(尹在桑, 1886. 11. 19 ~ 1949. 12. 14)의 소유였다.[3] 대전현충원묘적부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32년 8월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고, 해남윤씨대동보 권6 200쪽에는 1933년 10월 9일 옥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김중권(金重權)의 딸이다.[5] 형사사건부-1·형사사건부-2에는 1931년 12월 12일로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