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파평 윤씨 |
출생 | 1895년 1월 6일 |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 대천리 (현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대천마을)[2] | |
사망 | 1958년 3월 20일[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5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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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윤장수는 1895년 1월 6일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 대천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대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필묵상(筆墨商)으로서 붓과 먹을 판매하던 상인이었다.구포면 장터의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와 동래군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와 구포면사무소 서기인 임봉래와 사립화명학교 교사인 윤경(尹涇) 등을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들과 윤정은(尹正殷) 등을 중심으로 구포 지역 청년들은 구포면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정하고, 3월 27일과 28일에는 거사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새도록 인쇄 및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날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군중 1,0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때 11명의 인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윤장수 등 젊은 청년은 붙잡힌 인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대오를 정비하여 1,2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면서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주재소로 돌진한 청년들은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윤장수는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구금되었다가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8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