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평택 임씨 |
출생 | 1890년 4월 22일 |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 (현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와석마을)[1] | |
사망 | 1968년 2월 15일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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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임봉래는 1890년 4월 22일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와석마을)에서 태어났다.그는 구포면사무소 서기로 있던 중 1919년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으로부터 경성부와 평양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세히 전해듣고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27·28일에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등의 집에서 김옥겸(金玉兼)·김윤길(金潤吉)·유기호(柳基護)·윤경(尹涇)·허정(許楨)·김용이(金用伊)·최종호(崔鍾浩)·유진영(兪鎭榮)·윤대근(尹大根) 등과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면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는 구포면 장터에서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그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명학교 앞에서 출발하여 양산군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8월 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8년 2월 15일 별세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