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33

의인(구원론)

의인론에서 넘어옴
1. 개요2. 성경에서의 언급
2.1. 구약2.2. 바울로 친서2.3. 바울로 제2 서간2.4. 해설
2.4.1. '의로움'의 개념
3. 가톨릭의 의인론
3.1. 종교개혁 전의 의인론
4. 개신교의 의인론
4.1. 종교개혁 당대와 그 이후4.2. 현대 개신교 교파 간 차이점4.3. 오해와 의문점
5. 가톨릭·루터교(+감리교+성공회+개혁교회[장로교]) 공동 선언

1. 개요

한국어의인(義認)
희랍어Δικαίωσις(Dikaiōsis)
라틴어Justificatio
영어Justification[1]

흔히 개신교에서는 '칭의', 가톨릭에서는 '의화'로 번역되는 '의인(義認)'은,[2] '의롭다고 인정(판결)하다'는 뜻의 희랍어 δικαιόω(dikaioō)에서 유래한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판결)"(δικαιόω)하는 것을 뜻한다.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죄악은 징벌 받아 마땅한 것이고, 하느님께선 죄악에 대해 무한히 진노하심으로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들은 일생동안 말과 행동, 생각으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기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자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죄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그로 하여금 죄인들이 받을 모든 심판과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그 뜻에 순종해, 지옥의 쓴 잔을 죄인들을 대신해 남김없이 들이키셨고, 결국 비워내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같은 희생을 믿는 자들에겐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를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인류의 대표로 삼아 그에게 모든 징벌을 쏟아내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겐 징벌이 임하지 않게 된 것.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값없이 죄사함을 받게 된 것이나,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인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외아들을 희생시키고, 무한한 진노의 대상인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마르틴 루터와 이후 개신교에서 강조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개신교만의 교리라고 흔히 오해되지만,

ㄱ. 오직 은총으로
ㄴ. 오직 믿음으로
ㄷ. 인간의 공로 없이 의인된다는 것

이 셋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유하는 가르침이다. 구체적인 신학적 해석 차이는 존재하지만, 결국 서방교회 전통을 공유하기 때문에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미묘한 차이이다.

종교개혁시기 해석을 두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리된 가장 큰 계기이며 둘 사이의 가장 큰 신학적 갈등이 있었으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루터파와 칼뱅파와 영국 국교회와 재세례파의 신학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으나, 도리어 개신교 내부의 복음주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초교파 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당연한 것인게, 일단 구원론에서 합의를 봐야 신앙적인 형제라는 의식이 생기기 때문.

2. 성경에서의 언급

2.1. 구약

הִנֵּ֣ה עֻפְּלָ֔ה לֹא־יָשְׁרָ֥ה נַפְשֹׁ֖ו בֹּ֑ו וְצַדִּ֖יק בֶּאֱמוּנָתֹ֥ו יִחְיֶֽה׃
(BHS)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가톨릭 성경)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개정)
-하바꾹(하박국) 2장 4절

2.2. 바울로 친서

καὶ ταῦτά τινες ἦτε· ἀλλ’ ἀπελούσασθε, ἀλλ’ ἡγιάσθητε, ἀλλ’ ἐδικαιώθητε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ἐν τῷ πνεύματι τοῦ θεοῦ ἡμῶν.[3](NA28)[4]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가톨릭 성경)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개역개정)
-고린토1서(고린도전서) 6장 11절
τὸν μὴ γνόντα ἁμαρτίαν ὑπὲρ ἡμῶν ἁμαρτίαν ἐποίησεν, ἵνα ἡμεῖς γενώμεθα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ἐν αὐτῷ.[5](NA28)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가톨릭 성경)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개역개정)
고린토 2서(고린도후서) 5장 21절
ὅτι δὲ ἐν νόμῳ οὐδεὶς δικαιοῦται παρὰ τῷ θεῷ δῆλον, ὅτι ὁ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6](NA28)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가톨릭 성경)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개역개정)
-갈라디아서 3장 11절
λογιζόμεθα γὰρ δικαιοῦσθαι πίστει ἄνθρωπον χωρὶς ἔργων νόμου.[7](NA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가톨릭 성경)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개역개정)
- 로마서 3장 28절[8]
δικαιοσύνη γὰρ θεοῦ ἐν αὐτῷ ἀποκαλύπτεται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9](NA28)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가톨릭 성경)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개역개정)
-로마서 1장 17절

2.3. 바울로 제2 서간

Τῇ γὰρ χάριτί ἐστε σεσῳσμένοι διὰ πίστεως· καὶ τοῦτο οὐκ ἐξ ὑμῶν, θεοῦ τὸ δῶρον·[10](NA2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가톨릭 성경)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개역개정)
-에페소서(에베소서) 2장 8절

2.4. 해설

바울로 신학의 중요 개념 중 하나로 오직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판결)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11] 이 개념은 유대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에 맞서 사용되었다. 바울로의 초기 서간인 고린토 서에도 비슷한 개념은 나오지만,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12]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다만 '의롭다 함(義認)'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표현이 있다면 '언약 관계에 있다'는 문구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불러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언약 관계가 신약에서 구체화 된다고 본다.[13]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서 '의롭다 인정된다'(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신학은 로마서의 의인(義認)을 토대로 성서 전체의 맥락을 해석한다.

바울로는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로마서 4장 2절의 말마따나 절대적인 신 앞에서 인간의 행위로 자랑할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짊어진 화목제물[14]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죄인들 대신 하느님의 진노를 받은 사실이 값없이 의롭다 판결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화목제물을 통한 설명 이외에도,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라는 구약 말씀을 십자가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나무(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다. 그러나 이는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 자신은 죄 없는 하느님이기에),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져서 대신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하느님의 저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하여 친히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바울로는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원교리인 것이다. 의인론과 대조되는 사상이 바로 불교, 불교의 구원은 수행을 통한 해탈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시각차이를 볼 수 있다.

주의를 주자면, 의인론이 순수하게 바울로가 새로 주장한 교리인 것은 아니다. "바오로가 의화론을 언급한 주요 대목(갈라 2,16; 로마 3,24-26; 1코린 6,11) 내용은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에서 전수받은 것으로 본다."(이영헌. 『바오로 신학의 기본사상』. 175쪽)

2.4.1. '의로움'의 개념

하느님의 의로움(의로우신 하느님)은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본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원의(뜻)와 권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진실함과 성실함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인간)과 맺으신 계약의 진실함과 계약 준수의 성실함을 가리키는데, 하느님의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맺어지고 지켜지는 구원 계약을 뜻한다.[15]
-이영헌. 『바오로 신학의 기본사상』. 175쪽

가톨릭 성경과 개역개정에서 의(로움)으로 번역된 δικαιοσύνη(dikaiosynē)는 (특히 영어 번역 justice에서 연상하기 쉬운) 징벌적 정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Liddel & Scott의 대사전에서 dikē에서 파생된 형용사 dikaios[16]에 대한 뜻풀이는 대개 이러하다. (A) 사람의 경우에는, 관습(dikē)이나 규칙, 특히 사회 규범을 준수하거나, 신들이나 사람들에 대한 도리 또는 의무를 준수하는 걸 그리고 (B) 나중에는, 공평한, 공정한, 합법적인, 적법한, 정의로운, 올바른, 정당한, 마땅한, 적절한 등을 뜻하게도 된다.
-플라톤. 『국가·政體』. 박종현 번역. 개정 증보판 765쪽[17]

뿐만 아니라, 칠십인역에서 dikaiosynē 등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צַדִּ֖יק류의 단어도 비슷한 뜻을 가진다.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서 정의를 지칭하는 용어인 '체데크'(tsedeq) 또는 '츠다카'(tsedaqat)는 어떤 규범에 들어맞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개념은 공동체에 대한 충실함, 질서에 부합함, 올바름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규범에 적합한 그 무엇이라는 의미에서 '올바른' 균형들, '올바른' 수단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행하는 사람을 '차딕'(tsaddiq), 즉 '의로운 이' 또는 '올바른 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의미에서 '츠다카'(tsedaqah)란 개념은 '미쉬파트'(審判[18], mishpat)와 연관된 개념으로 드러난다. 『70인 역 성경』(LXX)은 이 '츠다카'를 '디카이오쉬네'(正義, dikaiosyne)로, '미쉬파트'(mishpat)를 '크리시스'(審判, crisis)로 번역하고 있다.
-Jose Antonio Sayes. 『은총론』. 윤주현 번역. 290-291쪽

즉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은 기본적으로 주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 관계의 진실함, 성실함을 뜻한다. 이 이스라엘에 주님은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였"[19]으며 이를 통해 구약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성실히 준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신약의 이스라엘(=교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명제는 이미 그 자체로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를 함축하는데, '의롭다는 인정'은 희랍어로 풀이하자면 '계약 관계에 충실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믿음을 통하여 '율법의 의미(계약에의 충실)'가 충족된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믿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계약에 충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율법에 대해 너무 가혹해보일 수도 있는 바울로의 진술은 결코 율법을[20] 무효가 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21]자는 것이다.

3. 가톨릭의 의인론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075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075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가톨릭이 '행위 구원론'을 믿는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서 의인(義認)은 오직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의 응답이라는 관점에서는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인간 행위에 의한 공로는 부정된다). 이는 개신교도 공유하는 가르침이다.
2006 일반적으로, ‘공로’(meritum)라는 말은 공동체나 사회가 그 구성원의 행실에 대해 마땅히 주는 보상을 가리킨다. 그것이 선행일 때는 상이 주어지고, 악행일 때는 벌이 주어진다. 공로는 정의의 덕과 관계되며 정의의 원리인 공평에 상응하는 것이다.

2007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창조주께 받았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2008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공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은총에 협력하도록 자유로이 안배하셨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하느님의 어버이다운 활동은 인간을 감도하심으로써 시작되며, 반면에 협력을 통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실은 그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려야 하고, 그다음으로 신앙인에게 돌려야 한다. 실제로 인간의 공로 자체도 당연히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데, 인간의 선행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주도와 도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리서
인간공로를 이해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공로가 불가능한 영역과, 피조물의 공로는 유비적인 의미에서 공로라 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공로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성화은총에 의하여 인간이 동등하지 못한 수준에서 유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진정한 상대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상대자가 된 것은 인간의 독립된 지위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서이다. 이로써 공로의 교리는 구속된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긍정하는 셈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톨릭 대사전, '공로' 문서
사실 의화는 오로지 은총만에 의하여 이루어지되 인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신앙만이 의화시키나 진정한 신앙에는 선행이 없지 않다. 의화는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면서도 일생에 걸친 과정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수 없으나 성서는 공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톨릭 대사전, '의화' 문서
은총은 선물이니만큼 어떤 강요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신 인간의 반응과 관게없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은총에는 증여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은총은 당사자의 일방이 자기 재산을 무상으로 상대분에게 줄 의사를 표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은총 문제에 있어서는 그 차원과 성격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입장과 동시에 인간의 입장도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계시되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대사전, '은총론' 문서
예를 들어 장애인용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는 자기 힘만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 그러나 그 환자 곁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이 그의 의자를 밀어주면서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준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이 경우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으로써는 일으킬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자신이 운반되는 것에 동의하는 일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은총 질서 속에서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놓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드러나는 수동형 동사(dejarse amar: 자신을 내어놓는 것)는 구원 질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역할을 보여주는 데 있어 능동적인 표현보다 훨씬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수동형은 구원 질서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순전히 '수용적'(受容的)이라는 점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무엇을 생산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은총론》, 윤주현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283쪽[22]

엄밀한 의미에서는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 공로를 부정한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 공로가 가능하다고 가톨릭이 말할 때는, 유비적(類比的, analogous) 의미에서 공로라고 불리는 것이지[23] 일의적(一義的, univocal) 의미에서의 공로가 아니다. 물론 다의적(多義的, equivocal) 의미에서의 공로도 아니다.[24]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증여를 할 의사를 표하고 자식이 이를 수용했다면, 그 증여의 공로는 아버지에게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사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이를 거절했다면, 증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자식 탓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화된다면 하느님 덕분이고, 어떤 사람이 의화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 탓이다. 따라서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 오직 은총으로 인간은 의화한다. 또한 자식이 아버지의 증여 의사에 동의하여 증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화한다고도 가톨릭은 말할 수 있다.

물론 가톨릭에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라는 지극히 바오로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도 믿음의 일부이니)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25] 또한 야고보서에 '행함(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와있듯이 진정한 신앙에는 선행이 없지 않다는 것은 개신교에서도 부정할 수 없다.

후술할 트렌토 공의회 문헌에서 보듯, "선행은 얻은 의화의 열매와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의화의 증대 요인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서술이다. 또한 역시 트렌토 공의회 문헌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 바로 당신께서" "의화한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주입해주시"며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선행을 이끌고 동반하며 또한 뒤따르는데, 그 능력 없이 선행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거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오직 은총으로 의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총'이 의화시키는 것과 '선행이 의화의 증대 요인'이라는 것이 모두 가톨릭의 가르침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톨릭 교회에서는 개인이 착한 일만을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성사를 통해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으로 의화된다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인 선행도 중요시하는 것이다.[26]

끝으로, 트렌토 공의회(=트리엔트 공의회) 6차 회기에서 의화에 관하여 선언한 것들 중 일부를 서술하겠다. 이는 해당 공의회가 개신교 신학자들을 의식하였고, 이들에게 가톨릭의 교의를 분명히 하는 것을 목적 중 하나로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와 통교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의인이 될 수 없긴 하지만, 죄인의 의화는 지극히 거룩한 그 수난 공로로 의화하는 자들의 마음에[27] 성령께서 작용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확산되고 그들 안에 자리 잡을 때 실현된다. 그 결과로, 의화과정에서 인간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자신이 가지처럼 붙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에 천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모든 선물을 받는다. 즉, 믿음, 희망, 사랑이 그것이다. 희망과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는 인간은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 신비체의 살아 있는 구성원도 될 수 없다. 이런 연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무용이라고[28]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의미가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라고[29]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제6차 회기 의화에 관한 교령. 제7장 죄인의 의화가 무엇이며, 그 원인들은 무엇인가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30] 그리고 무상으로[31] 의화한다고 사도(바오로)가 말하였는데, 이 말은 가톨릭교회가 옹호하며 표명해온 항구하고 일치된 견해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의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요, 온갖 의화의 기본이며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이고",[32]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과 친교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33] 또한 우리는 무상으로 의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화에 앞서 그 어떤 것도, 믿음이나 행업도 이 의화 은총을 얻는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화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 공로로 얻어지는게 아니며, (앞서 언급한 사도의 말대로) 만일 무슨 공로가 있어서 의화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더는 은총이 아니다."[34]
같은 교령. 제8장 믿음을 통하여 무상으로 주어지는 죄인의 의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죄가 용서되지 않고 용서된 적도 없다는 믿음은 필요한 것이다.
같은 교령. 제9장 이단자들의 헛된 믿음을 거슬러
이제, 받은 은총을 지속적으로 간직했든, 잃었던 은총을 다시 회복했든, 이처럼 의화한 자들에게 사도(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제시되어야 한다.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35]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보여준 선행과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36] 그리고 "여러분은 신념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신념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37] 그러므로 끝까지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들과[38]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으로 하느님의 자녀에게 자비롭게 약속된 은총인, 또한 하느님 바로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따라 그들의 선행과 공로에 신실하게 부여해야 할 상급인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 실로 이것은 사도(바오로)가 자신의 투쟁과 달음질 이후에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고, 정의의 심판관에 의해 자신에게 수여될 것이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던 바로 그 정의의 월계관을 의미한다[39]. 예수 그리스도 바로 당신께서 지체들의 머리로서, 그리고 가지들을 위한 포도나무로서[40] 의화한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주입해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선행을 이끌고 동반하며 또한 뒤따르는데, 그 능력 없이 선행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거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화한 자들이 삶의 처지에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일들을[41] 통하여, 하느님의 법을 충만하게 만족시키고, 때가 오면 (그들의 은총 지위의 상태에서 죽는다는 조건으로[42])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갖추는 데 그들에게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실로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43]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의로움은 마치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도 않는다.[44] 우리 안에 머물면서 우리를 의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그 의로움은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그 의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록 성경에서(보잘것없는 당신 제자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상급을 못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고 또한 사도가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라고[45] 증언하실 정도로[46]) 인간의 선행에 비중을 상당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은총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기를 바라실 정도로 모든 인간에게 그토록 좋으신 분이신[47] 주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그 어느 그리스도인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48] 그리고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많기"[49]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비와 선만큼 엄격함과 심판도 눈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조금도 없을지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50] 인간들의 전 인생은 인간의 판단에 따라 측정되고 심판되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 "그분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실 것이며 마음속의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하느님으로부터 각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51] 하느님은 성경에 쓰인 대로, "각자에게 행실대로 갚아주실"[52] 분이시다.
이러한 의화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에 이어서(이 가르침을 각자가 성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의화할 수 없을 것이다.)[53] 본 거룩한 공의화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을 첨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마음에 간직하고 따라야 할 사항들뿐만 아니라, 피하고 멀리해야 할 사항들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같은 교령. 제16장 의화의 열매, 곧 선행의 공로와 그 공로의 성격
1. 만일 누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로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 본성의 힘으로 행하거나 법의 가르침에 힘입어 행한 자신의 선행만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2. 만일 누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단지 더욱 쉽게 의롭게 살게 하고, 더욱 쉽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뿐이기 때문에, 비록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마치 은총 없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로운 삶과 영생을 구현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3. 만일 누가 의화 은총을 얻는 데 성령으로부터 내려오는 영감(靈感) 없이, 그리고 그분의 도움 없이 필요한 만큼의 믿음, 희망, 사랑 그리고 회개를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중략)
10. 만일 누가 우리에게 공로가 되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 없이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바로 그 의로움으로 인해서는 허울뿐인 의인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중략)
24. 만일 누가 인간이 받은 의로움이 하느님 대전에서 선행을 통해서는 보존되거나 증대되지도 않고, 선행은 얻은 의화의 열매와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의화의 증대 요인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같은 교령. 의화에 관한 법규들.

결국 의인론에 관한 가톨릭의 핵심 키워드를 3가지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 오직 은총
* 오직 믿음
*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3.1. 종교개혁 전의 의인론

이제 다시 교부들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가 아무리 중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치프리아노가 이를 암시하고 있고, 힐라리오도 역시 그러하다. 암브로시오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례적이다. 예로니모는 한 발 더 나간다. "어떤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살았다면, 그가 비록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신앙 때문에 영원히 살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구원이야기』, 80p

위와 같이 교부들 사이에서 의인(義認) 사상의 맹아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이전 의인론을 본격적으로 다룬것은 서방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근거하여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54]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바울로의 서신의 의인론에 대해선 언급이 거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와의 원죄, 은혜, 자유의지 등의 논쟁에서 인간의 수동성과 절대적인 하느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서 참고) 여기서 의인론을 근거로 신약성서를 해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서방교회의 정통이 되었다.[55] 의인론에 대한 연구는 상당기간 잊혀졌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5~6세기 지역 공의회에서 언급된 바는 있지만 그 이후 학자들의 인용빈도가 매우 적고 거의 잊혀져 갔다. 한편 동방 교부들은 바울로 신학의 이해에서 서방 신학과 비슷하기는 했으나 강조점이 달랐다.[56]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철학자들에게는 의인론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스콜라 철학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당연히 의인론을 연구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렐레스 철학에서 개념을 취하여 본성적(naturalis)인 것과 초본성적(supernaturalis)[57]인 것을 구분하여 은총(gratia)의 무상성을 강조했다.

스콜라적 개념에 의하면 은총(gratia)은 절대적으로 초본성적(supernaturalis)이며 인간 본성(natura)에 속하지 않는다. 은총이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상으로' 선물된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은총의 무상성'을 부정한다면, 매우 스콜라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4. 개신교의 의인론

4.1. 종교개혁 당대와 그 이후

스콜라 철학 시대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길(Via moderna)라는 새로운 사조가 15세기부터 유럽신학계에 퍼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오컴의 윌리엄이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제시하며 이성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는데,[58][59] 이러한 사조를 실재론에 반대되는 개념이라 하여 유명론이라 한다. 처음에 루터도 한때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도로 유명론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다. 유명론의 대표격인 오컴주의자들의 구원론은 "하느님은 구원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저버리시지 않는다" 로 요약할 수 있는데 루터도 초기 신학의 입장은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고 수도생활과 사제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도 죄인이 스스로 자격을 갖춰 하느님의 의로움에 다가설수 있다는 주장에 점차 회의적이었다. 그러던 중 로마서의 연구와 유명한 '탑 체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칭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악으로만 기울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해질 뿐이고 속성은 여전히 죄인이다.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 인간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만 루터는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저작을 썼지만 칭의 이후 인간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이들이 칭의 받는지에 대해서 저작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루터는 그때그때 이슈에 대하여 질문에 응답하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는 짤막한 글들을 많이 썼지, 신학을 체계화고 정리하는 조직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60][61]

그렇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독일 츠빙글리 계열 마르틴 부처와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 등은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칭의론을 연구했고 칭의 이후의 성화 단계(의로움 이후 완전해지는 단계)를 제시했다. 한 세대 후 신학자 장 칼뱅이 종합하여 개신교 내부의 여러 신학을 체계화 시킨다. 루터의 기본적인 입장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정리하자면
  • 칭의는 과정이나 변화가 아니라 법정적 판결이다.
  • 칭의를 통해 죄인은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얻고,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진다.
  • 칭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적용되며 반복되지 않는다.
  • 칭의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로만, 믿음을 통하여 이뤄진다.
  • 인간에게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기 하느님의 외재적인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전가되는 것이다.
  •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나 분리될 수 없다.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동반한다.[62]
  • 칭의는 하느님이 외부에서 개입하시는 일이며, 성화는 사람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일이다.
  • 칭의 후의 삶에서 선행은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보다는 신학적 견해차로 교회를 비판했다.[63] 이신칭의가 옳다면 모든 이가 자신만의 사제가 되기에(만인사제설) 고해성사도 필요 없고, 사제계급도 필요 없으며, 로마교회의 수위권도 필요 없고, 선행의 보고를 전제로 하는 면벌부나 성유물도 필요 없으며, 수도원이나 성지순례, 고행 등도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봤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리들 중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중요한 것을 떠받치는 유일한 것, 즉 교회를 서게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 교리이다.

4.2. 현대 개신교 교파 간 차이점

개신교파에선 종교개혁시기 모두 이신칭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개혁시기 루터와 칼뱅주의에 날을 세웠던 재세례파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개교회주의 성향이 있는 개신교 특성상 같은 교단이라도 목사나 신학자에 따라 갈리기 때문에 각 교단의 입장이 교단에 속한 목사나 신학자의 입장과 동일하진 않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만 하더라도 이신칭의는 바울시대 율법주의를 경계하려는 산물이지 신약성서 복음의 핵심적인 문구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었다.[64]

대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감리회와 성결교회, 구세군과 성공회 일부[65]는 이신칭의는 받아들이지만 부드러운 편이고 루터와 칼뱅의 영향으로 루터교회와 칼뱅주의 개혁교회(=장로회)에선 종교개혁시기의 바탕한 엄격한 해석을 하고 있다. 감리회에선 루터교회나 칼뱅주의 계열 교단과는 조금 다른게 선재은총을 중요히 여기며 법정적 칭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감리회 성결회의 경우 전자와 달리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신학에 가깝다.

다만 장로회 내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 구원론을 원리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루터교회에서 조차 종교개혁 시기 순수 루터를 따르는 의견과 수정하는 의견이 대립할 정도였다.

4.3. 오해와 의문점

종교개혁시기부터 이신칭의 구원관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다. 특히 윤리의 부재에 대해서 비판이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 구원은 복음으로 하는 것이고 선행[66]은 의인이라 칭해진 결과로 따라온다며 구원관과 윤리관의 분리를 주장했었다. 그래서 칭의 그리고 땡 하면 다음 단계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칭의 뒤의 성화도 종교개혁 시기부터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논제다. 따라서 개신교의 신학에는 윤리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가톨릭 신학을 행위 구원론이라 말하는 것처럼 섀도 복싱에 불과하다. 오히려 성화 교리 때문에 개신교는 세속적 윤리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종교개혁시기부터 오해를 불러오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가 정확하다. 믿음이란 믿는다는 행위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이는 종교개혁시기 평신도 물론이고 신학자 사이에서도 오해를 불러오기 때문에 루터가 직접 여러번 글을 써서 적극적으로 반박한 내용이다.

또한 구원 받았으면 아무 짓이나 저질러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종교개혁시기에도 과격 개혁파와 재세례파에서 율법 폐지를 주장했으나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배격했다. 루터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simul iustus et peccator)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죄인이 하느님의 은혜로 의인의 옷을 입었을 뿐 죄인의 속성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칭의 받은 후에도 죄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즉 칭의 전이나 후에나 인간이 선행을 한다 해도 행동으로는 절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선행보다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욕을 통제할 것을 우선 권한다. 루터에 해석에 의하면 믿음 없이 인간이 간혹 저지르는 선행은 자기숭배로 연결되거나, 열렬한 자기만족 욕구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구원받기 위해 또는 보속의 수단으로 용서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인간이 선하다 인정을 받은 후에 나오는 칭의의 결과로 본다. 즉 선한 행위 자체는 인간의 속성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이신칭의 구원관은 당시 유럽에서 만연한 타락의 기조를 바로세우고, 개인의 양심을 회복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7] 왜냐하면 이전에는 개인단위의 양심과 구원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이전 문맹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서에 접근할만한 식자층이 적었다. 따라서 믿음 보다는 당시 시대상에서 교회에서 가르침에 의존하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적으론 의미가 퇴색되어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칭의와 구원교리는 행위도 중요하다. 야고보서에는 분명히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와 있다며 행위 없는 개신교 믿음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는데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 토론은 오래된 논쟁이다. 대체로 현재에는 이것이 상충되는 관계라든가 다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68] 일반적으로 장로회 같은 칼뱅파의 경우 선한 행위는 칭의의 증거라고 여기며 웨슬리안 계통 교파들은 칭의 이후 구원에 다다르는 성화의 과정으로 여긴다. 그래도 둘 다 선행을 구원받은 자의 징표 정도로 본다는 점은 비슷하다.

5. 가톨릭·루터교(+감리교+성공회+개혁교회[장로교]) 공동 선언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화와 루터교 세계연맹의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 1998년 6월[69]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은 30년이 넘는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간 교회 일치 대화의 결과들을 요약하고 있다. 합동 선언문은 1999년 10월 31일에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에 의해 부록이 첨가된 공동 성명서에서 받아들여졌다.
출전: The Pontifical Council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 Information Service Nr. 98 (1998/III), Vatican City, 83-86.

3. 의화에 대한 공동 이해
14. 최근 루터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에서 선포된 복음을 함께 듣고 특히 신학적 대화를 나눈 것은 의화에 대한 이해 안에서 공통점을 이끌어 냈다. 그것은 근본 진리 안에서 의견 일치를 포함한다. 개별 서술 안의 다양한 전개는 근본 진리와 일치를 이룬다.

15. 의화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공동 신앙이다. 성부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은 의화의 근거이며 전제이다. 따라서 의화란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의로움이시며, 우리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그 의로움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으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선행을 하도록 하시며 부추기시는 성령을 받는다.[70]
16.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 구원을 받으면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화된다. 신앙 자체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신자 공동체에서 활동하시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성하시는 신자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17. 우리는 의화에 대한 메시지가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증언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다고 공동으로 확신한다. 이 메시지는 우리 죄인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용서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자비를 우리는 선물받을 뿐이며, 믿음 안에서 얻지만, 어떠한 형식으로도 보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18. 따라서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전개하는 의화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의 한 부분만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내적인 연관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신앙 진리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외화 교리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실천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지향하고자 하는 푀할 수 없는 시금석이다. 루터교 신자들이 이시금석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한다면, 그들은 모든 신앙 진리의 연관성과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여러 시금석을 따를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의화 메시지의 특별한 기능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 목적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이신 중개자(1티모 2,5-6)로서 모든 것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는 분이며,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주시며 당신의 새로운 선물을 선사하신다. …

5. 도달한 의견 일치의 의미와 영향

43. 의화 교리의 근본 진리 안에서 우리의 의견 일치는 교회의 삶과 가르침에서 실행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 여러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문제들은 특히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의 관계, 교회론, 교회 안의 권위, 교회의 일치, 직무와 성사, 마지막으로 의화와 사회윤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도달한 공동 이해가 그러한 설명을 위한 적절한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

세계감리교협의회와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

감리교 성명서
1. 루터교 세계 연맹과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공식 승인을 거쳐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의화 교리의 기본 진리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분명하게 설명한 이 실질적인 합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가 16세기 서구 교회 분열의 주요 원인이었던 신학적 논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합의에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 세계감리교협의회에 소속된 우리 교회들은 이 동의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서 설명하는 의화에 대한 공동 이해(15-17항)가 감리교의 교리에도 부합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특히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삼위일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다음 항들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15.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의화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라고 확신합니다. 성부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의화의 토대와 전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래서 의화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의(義)가 되심을 뜻하며,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이 의(義)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함께 고백합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께 수락되어, 우리를 선행으로 준비시키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16.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이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의화됩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서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일하시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성으로 이끄실 삶의 쇄신으로 신자들을 인도하십니다.
17. 우리는 또한 의화 메시지가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신약 성경 증언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는 확신을 공유합니다. 곧, 죄인들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새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부여하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받게 될 뿐,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공로로 취득할 수 없는, 용서하고 새롭게 하는 자비의 덕임을 말해 줍니다.
3. 우리는 종교 개혁 이래로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의화 교리의 몇몇 중요한 쟁점들에 관하여 공동으로 선언한 내용에 동의합니다(공동 선언문, 19.22.25.28.31.34.37항 참조). 나아가 우리는 이 쟁점들에 관한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 각자의 입장에 대한 설명(공동 선언문, 20-21.23-24.26-27.32-33.35-36.38-39항)을 수용하며,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가 두 교회 어느 쪽과도 감리교를 갈라지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루터교 세계연맹: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을 위한 공식 공동 성명서와 공식 합동 선언문의 부속 문서(Annex), 1999년 10월 31일[71]

공식 공동 성명서로써 루터교 세계연맹과 가톨릭 교회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이 인준되었다. 동시에 두 당사자는 대화를 계속 이루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첨부된 부록(Annex)은 양편이 도달한 의견 일치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전의 상호 교리 판견들은 더 이상 오늘날 대화 당사자들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
출전: The Pontifical Councio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 Information Service Nr. 103 (2000/I-II), Vatican City, 4-6.

…더욱 완전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다양성 안의 일치에 이르기 위하여, 또 여전히 남아 있는 차이점들 안에서 서로 "화해"를 이루고, 더 이상 분열시키는 힘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명료화 작업으로서, 공동 선언문 자체에서 특별히 언급된 쟁점들(선언문, 43항)에 대하여, 이미 이루어진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지속적인 대화가 각별히 요청된다.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의화 메세지를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설명하고자,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개인적 관심사와 사회적 관심사 양편과 관련시켜 이해하고자, 공동의 증언 안에서 교회 일치적으로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이 서명 행위로써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을 전체적으로 추인한다.

공식 공동 성명서의 부속 문서

1. 이하의 설명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서 의화와 기본 진리와 관련하여 도달된 합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과거 시대의 상호 단죄들은 합동 선언문에서 발표된 것과 같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의 의화 교리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2. "우리는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박한다. 우리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우리를 선행으로 준비시키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게 된다"(선언문, 15항).
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동시에 죄의 구속력(拘束力)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신다는 것을 … 함께 고백한다"(선언문, 22항). 의화는 죄의 용서이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선물을 베풀어 주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선언문 22항).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 5,1).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진정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새로워졌으며, 우리 안의 그분의 역사에 언제나 의지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의화된 이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들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1요한 1,8-10; 참조: 선언문, 28항).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야고 3,2). "뜻 아니한 허물을 누가 알겠습니까?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3).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에 오직 세리와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이것이 우리의 전례들 안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함께 다음과 같은 권유를 듣는다.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로마 6,1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죄의 권세와 그 작용에서 오는 끊임없는 위험을 상기시켜 준다.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합동 선언문 29-30항에서 표명한 것과 같이 이 주제에 대한 상이한 접근 자세에도, 함께 이러한 정도까지,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이해한다.
나) "사욕 편정"이라는 개념은 가톨릭과 루터교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교의 고백 문서들 안에서 "사욕 편정"은 인간 존재의 자기 추구 욕망으로서, 영적으로 이해된 법의 빛으로 볼 때 죄로 간주된다. 가톨릭의 이해에서 사욕 편정은 세례 이후에도 인간 존재 안에 남아 있는, 죄로부터 오고 죄를 향하도록 압박하는 한 경향이다. 여기에 포함된 상이성에도, 루터교의 관점에서 욕망은 죄가 공격을 가하는 틈이 된다. 죄의 세력 때문에 전체 인간 존재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경향을 지닌다. 이 경향은, 루터교와 가톨릭 양편의 개념에 따를 때,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원초 계획과 부합하지 않는다"(선언문, 30항). 죄는 인격적 성격을 지니며, 그렇기에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낡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결여이다.
세례에서 선사된 구원의 실재와 죄의 세력에서 오는 위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죄의 용서와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의 쇄신이 강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화된 이 또한, "공격을 가하는 죄악의 세력 앞에 끊임없이 내던져져 있으며(로마 6,12-14 참조), …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하여 평생 투쟁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선언문, 28항).

다) 의화는 "오로지 은총에 의해서만" (선언문, 15-16항),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인간은 "행위와 상관없이"(로마 3,28; 참조: 선언문, 25항) 의화된다. "은총은 신앙이 한 인간 안에서 시작될 때 뿐만이 아니라, 신앙으로서 존속하는 한, 신앙을 이룩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II/II 4, 4 ad 3).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곧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애쓰도록 부름 받는다(필리 2,12 이하 참조). … "성령께서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재생과 쇄신의 당신 역사를 시작하시는 즉시,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이 확실히다"(협약 정식, FC SD II,64-65; BSLK 897,37 이하).
라) 의화된 이가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인 은총은 언제나 하느님의 구원과 창조의 역사에서 받게 된다(선언문, 27항 참조). 그러니 이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의화된 이들의 책무이다. 선행을 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신앙을 실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BSLK 197,45 참조). 의화된 이들의 선행은 "그들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곧 다시 범죄함으로써 소명으로부터 추락하지 않도록 행해져야 한다"(Apol. XX,13; BSLK 316,18-24; 2베드 1,10 관련. 또한 FC SD IV,33; BSLK 948,9-23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합동 선언문 38항과 39항에 언급된 "은총의 보존"에 대해서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확실히, "의화된 이들에게 전제되거나 뒤따르는 것이 무엇이든, 신앙의 자유로운 선물은 의화의 바탕도 아니고 그것을 공로로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선언문, 25항).
마) 의화로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포함한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참조: 요한 3,36; 로마 8,17). 최후 심판 때에, 의화된 이들도 그들의 행업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마태 16,27; 25,31-46; 로마 2,16; 14,12; 1코린 3,8; 2코린 5,10 등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찬 선고가 당신의 뜻에 일치하는 우리 삶과 활동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승인하실 것이라는 심판을 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릇된 모든 것은 드러날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협약 정식 또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신앙인들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행들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명백한 명령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저들과 더불어 기뻐하시고, 현세와 미래의 생활에서 그들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FC SD IV,38). 어떠한 상급도 우리가 주장할 권리를 지니지 않는 은총의 상급이다.

3. 의화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척도이며 시금석이다. 어떠한 가르침도 이 기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화 교리는 "우리 교회들의 모든 가르침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하는 불가결한 기준이다"(선언문, 18항). 이와 같이 의화 교리는 교회의 근본적인 삼위일체 신앙 고백의 전 맥락 안에서 그 나름의 진리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그분의 새롭게 하시는 선물을 부어 주시는, 곧 그리스도를 한분 중개자(1티모 2,5-6)로서 그 무엇보다도 신뢰함을 공동의 목표로 한다"(선언문, 18항).

4. 가톨릭 교회의 논편은 루터교 시노드나 루터교 세계연맹의 권위를 의문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은 대화를 시작하였으며, 서로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대화 상대로서(par cum pari) 전진적으로 대해 왔다. 교회 안에서 권위에 대한 상이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두 대화 당사자는 상대방의 교리 결정 과정을 존중한다.

앞서 서술했던 대로 현대에 와선 의인론으로 갈려졌던 서방교회 중 일부 교파들이 의인론 합의를 통해 대화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에선 1999년 루터교회, 2006년 감리회와의 의인론 합의를 통하여 어느 정도 일치를 이뤘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 원죄의 결과 모든 인간은 의인(義認)이 필요하다.
  • 하느님의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고, 의(義)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이다.
  • 우리는 의인되므로 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선언 받는다
  • 의롭다 하심 받은 자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계속 새롭게 세워지고 선행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제공받는다.

물론 가톨릭과 루터교, 감리교의 의인론이 모두 똑같아진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차이를 단순화하여 슬로건화[72]하는 것을 방지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가톨릭과 칼뱅주의의 차이급라면 모를까, 가톨릭과 루터교/감리교의 의인론은 문외한들이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 단순화시키기에는 그 차이가 굉장히 미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선언에 참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칼뱅주의 교단들 및 성공회 등 다른 주요 교단들도 개신교 내부의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 받기에 과거보다는 분명히 가톨릭-개신교간 적개심이 상당히 누그러진 상태이다. 물론 의인론 외에도 결코 하찮다고 여길 수 없는 차이점들이 현실적으로 많이 있으나, 분열의 원심력으로 작용하던 의인론이 대화의 구심력으로 작용하도록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역사적 발걸음이다.[73]

의인론에서 아직 신학적으로 갈리는 문제는 인간론 부분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이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안에 내재적인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74] 하느님의 은혜가 주입된다고 보는 측면이라면 개신교[75] 에서는 완전히 타락하여 내적인 의로움이 없고[76]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전가(Imputation)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의인(義認)을 죄인인 인간이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계약으로 바라보지만, 그 관점이 조금 다른데, 개신교는 법정적 의미처럼 해석하여 의인을 사건(event)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가톨릭은 인간관계처럼 해석하여 의인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일부 교파들은 성화단계에 있어선 많은 부분의 일치를 이루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온건 가톨릭 신학자(콘타리니 추기경)와 이미 온건 개신교 신학자(필리프 멜란히톤) 이래 거의 동일한 개념을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으로 오해를 했던 측면이 크다고 본다.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주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우는 인간의 태도를 비판하지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77]하다. 야고보가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78]라고 하고 바울로가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79]라고 할 때 둘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며, 다만 바울로가 '사랑'이라 말한 것을 야고보가 '행동'이라 말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로가 '사랑'이라 말하고 야고보가 '행동'이라 말한 것을 가톨릭과 개신교 둘 다 중시한다. 비록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80]의 범주에 무엇 무엇이 들어가는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시선이 다르지만.

결론적으로는 분파적인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이 있다는 대전제는 모두가 공유한다. 이외에도 무수한 성경구절에 따라 사람마다 또한 의견 차이가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일 수 있는 것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 교리는 상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은총,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진정한 믿음에는 행위가 따른다. 개인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자리잡았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변화를 주게 마련이다. 단순하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사랑 없이도 이런저런 행위(선물 등)가 있을 순 있겠지만, 참사랑이 있는데 이게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종전과 같은 상태로 살테야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경계로 사용된다.

1999년 천주교와 루터교회가 공동선언을 한 이후 주요 교단이 차례로 이 선언에 동참하였다. 세계감리교연맹(2006), 세계성공회협의회(2016), 세계개혁교회커뮤니온-장로교(2017). 이로써 의인론에 국한하여 서방교회 계열의 주요 교단은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


[1] 가톨릭 개신교 공통[2] 엄밀히 말하면 의인도 개신교의 번역이지만, 가톨릭에서도 의인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 용례(요아힘 그닐카 몬시뇰, 《신약성경신학》 한국어판, 분도출판사)가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중립에 가깝다. 또한 의인은 희랍어 원문에 잘 맞을 뿐더러, 한자어 자체로는 '의롭지 않은 자가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인지(개신교 관점) '의로워졌기에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인지'(가톨릭 관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3] 로마자 전사: kai tauta tines ēte· all apelousasthe, all hēgiasthēte, all edikaiōthēte en tōi onomati tou kyriou Iēsou CHristou kai en tōi pneumati tou theou hēmōn.[4] Nestle-Aland 28판[5] 로마자 전사: ton mē gnonta hamartian hyper hēmōn hamartian epoiēsen, hina hēmeis genōmetha dikaiosynē theou en autōi.[6] 로마자 전사: hoti de en nomōi oudeis dikaioutai para tōi theōi dēlon, hoti ho dikaios ek pisteōs zēsetai·[7] 로마자 전사: logizometha gar dikaiousthai pistei anthrōpon chōris ergōn nomou.[8] 루터는 이 부분에 '오직'을 추가하여 '오직 믿음'으로 번역했다. 다만 비록 '오직 믿음'이 (루터교 관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가톨릭의 관점으로도)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원문에 없던 단어를 추가하여 의역한 것이라 평가가 엇갈린다.[9] 로마자 전사: dikaiosynē gar theou en autōi apokalyptetai ek pisteōs eis pistin, kathōs gegraptai· ho de dikaios ek pisteōs zēsetai.[10] 로마자 전사: Tēi gar chariti este sesōismenoi dia pisteōs· kai touto ouk ex hymōn, theou to dōron·[11] 여기서 개신교는 '실제로는 상태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신분은 바뀌어서 하느님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진다'(칭의)고 보며,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의화)고 본다.[12]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통상적으로 바울로는 사목적(司牧的)인 목적에서 세련되었다기보다는 격정적 문체로 서간을 썼는데, 특히 갈리디아서는 투사(鬪士)로서의 면모가 많이 보이는 서간이다. 반면 로마서는 (역시 사목적이긴 하지만) 로마 공동체에 보내는 프레젠테이션으로 비교적 차분한 태도에서 쓴 서간이기에, 갈라디아서보다 율법에 대해 부드럽게 말한다.[13] <이신칭의> (알리스터 맥그래스)[14] 유대의 제사 중 한 종류로, 죄를 지었을 때 정해진 몇가지 동물 중 하나에 죄를 전가시켜 죽인다. 그럼으로서 죄를 전가한 사람은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영원한 속죄가 아니니 죄를 지었을 때마다 새롭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15] (책 속 주석) 이 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이영헌, "바오로의 의화론에 대한 성서적 고찰", 「신학전망」 154(2006), 2-34 특히 16-19참조.[16] (발췌자 주석)δικαιοσύνη의 어원.[17] 박종현 교수는 dikaiosynē의 번역어로 '올바름'을 미는데, 이를 '정의'로 번역하는 것은 중역의 폐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 성경 중에서는 공동번역성서가 박종현 교수와 비슷하게 dikaios 등을 번역할 때 '올바름'의 어간을 사용한다.[18] (발췌자 주석) 심판[19] 로마서 11장 17절(공동번역)[20] 바울로가 율법을 비판할 때, 강조점은 율법보다는 율법 행위에 있고, 더 정확히 말해서 '율법 행위로 구원 받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기에 마치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로 서간과 야고보서의 진술도 함께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7절이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공동번역)이라고 할 때 '행동'은 바울로의 언어로 말하자면 '사랑'이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서 13장 8절, 공동번역)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토1서 13장 2절, 공동번역)[21] 로마서 3장 31절(가톨릭 성경; 개역개정)[22]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의 두 교수인 M.Flick과 Z.Alszeghy의 견해를 소개하는 부분.[23] 유치원생 자녀를 둔 부모가 아이와 함께 색칠공부를 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가 시키는대로 색깔을 칠해서 그림을 완성했다고 해보자. 그 그림은 그 자체로는 별볼일 없는 것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그 그림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를 칭찬해 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공로도 이 상황에서 유치원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으로 그린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도 인간을 향하여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시나, 죄 문제 때문에 엄하실 때가 많은 것이다.[24] 유비(類比)란, 일의(一義)도 다의(多義)도 아닌 개념으로, 가령 "A는 얼굴이 예쁘다"와 "A는 마음씨가 예쁘다"에서 두 문장의 '예쁘다'라는 말은 일의적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의적인 것도 아니며, 서로 다르면서도 어떤 같은 근거 때문에 같은 표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 '유비'가 성립한다. 또다른 예시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유(有)(라틴어: ens, 영어: being)를 일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유와 인간의 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범신론이 성립한다. 반대로 유를 다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유와 인간의 유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감각적·물질적 인식에서 초감각적·비물질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므로, 불가지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 학파 학자들은 유의 일의성과 다의성을 거부하고 유의 유비성을 인정한다.(참고: 정의채, 《형이상학》 4판 171-177쪽)[25] 상해천주교요리에서는 신덕(믿음) 뿐만이 아니라 애덕(사랑)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신덕만으로는 부족하다' 할 때의 신덕은 애덕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협의의 신덕이다. 그리고 바울로 역시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협의의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사랑도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토 1서, 공동번역) Heinrich Schlier에 의하면 "사랑은 믿음이 드러나는 방식"이다.(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번역. 117쪽)[26] 물론 개신교라고 해서 '예수님 믿기만 하면 대강 살아도 천국감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의 회개도 필요 없이 천국 간다"는 식의 구원파는 100% 이단이다.[27] 참조: 1코린 12,11[28] 야고 2,17.20.[29] 갈라 5,6[30] 참조: 로마 3,28 그리고 다른 곳들.[31] 참조: 로마 3,24.[32] 히브 11,6.[33] 참조: 2베드 1,4.[34] 로마11,6[35] 1코린 15,58[36] 히브 6,10[37] 히브 10,35[38] 마태 10,22[39] 참조: 2티모 4,7-8.[40] 참조: 요한15,1 이하.[41] 참조: 요한 3,21[42] 참조: 묵시 14,13[43] 요한 4,13-14[44] 참조: 로마 10,3[45] 2코린 4,17[46] 참조: 마태 10,42; 마르 9,41.[47] 참조: 교황 첼레스티노 1세,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보낸 서간」 제12장(PL 50,336; D 141번.[48] 참조: 1코린 1,31; 2코린 10,17(예레 9,23-24).[49] 1코린 4,5[50] 마태 16,27; 로마2,6; 묵시 22,12[51] 1코린 4,5[52] 마태 16,27; 로마 2,6; 묵시 22,12[53] 참조: 아타나시오 신경의 초반부.[54] 의인론은 루터 이후에 본격적으로 쓰였는데,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칭하는 개념은 똑같지만 그 표현방식이 달랐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의가 주입된다고 본 반면에 루터는 전가된 의로 보았다. 무슨차이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어느 해석이 맞느냐에 따라 대사의 효력 존재 여부가 갈린다.[55] 가톨릭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변형된 펠라기우스 (반(半)펠라기우스주의) 또한 역시 이단으로 선고된다.[56]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바오로의 의인(의화)에 관해 물론 말할 수 있었거니와, 의인론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이 교설은 그러나 요한에게는 바오로 신학의 중심은 아니었다. 이런 관점을 요한은 다른 동방 교부들과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조점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실존에 두었고, 그로써 바오로 신학의 중심점을 의인론에 고정시킨 서방 신학자들과 똑 마찬가지로 깊이 바오로를 이해했음은 확실하다. ...... 마르틴 루터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혹평했다. 요한을 자신에게 거의 가치 없는 '빨래꾼'으로 간주했다. 물론 루터는, 그 자신의 언급에 따르더라도, 히브리서에 관한 설교들만 읽어 보았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젤의 종교개혁가 외코람파드는 이 교부에게 몹시 마음이 끌림을 느낀다고 기록했다. ...... 칼뱅도 이 교부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Rudolf Brändle.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종한 번역. 80-81쪽)[57] 영어 supernatural(초자연)과 동일 어근이다.[58] 그리하여 현재 근대 철학의 선구자로 꼽힌다.[59] 실제로 그의 유명론은 그가 활동했던 옥스퍼드 대학의 학풍이 되었고 그러한 사조는 현대의 영미분석철학으로 이어진다. 보편성을 강조하던 가톨릭 스콜라철학과 달리 개별성에 초점을 두게 된 것.[60] 마르틴 루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신학교수, 저술, 설교, 목사 양성, 각지 교회와 신학자들의 문답 등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다. 그리고 예정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못한 건 재세례파들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백성, 기존 가톨릭교회와 지배세력들을 가나안 백성이라며 쳐죽이는 걸 정당화했기 때문이다.[61] 또 하나의 이유로는 정치적인 이유와 더불어 루터가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론 논쟁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것은 노예의지론과 평신도 교육용 교재인 소요리문답이다.[62] 가톨릭 교회는 성화 역시 의화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둘이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63] 작센지역 면벌부종교개혁의 직접적 계기이기는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를 직접 비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이 교회를 잘못 이끌었다고 봤다. 다른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셈[64] 사실 20세기 들어서 목소리를 내는 유대교 랍비들(19세기 이전에는 거의 금기시 되었기에)들은 바울의 서신내용에 반발하며 유대교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에도 율법주의에 얽매인 고리타분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65]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예정론 구원관을 취한다고 하지만(성공회 39개 신조), 특정 구원관을 신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감리교식 구원관이나 천주교식 구원관을 취하는 성공회 신자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저교회파 일부는 온건파 장로교와 흡사한 구원관을 지닌다면, 고교회파 일부는 천주교와 흡사한 구원관을 지닌다는 얘기.[66] 세속적인 선행과 다르다. 루터는 하느님 보기에 합당한 행동이라 본다.[67]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68] 다만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하며 정경 목록에서 빼려고 시도한 바가 있었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행보를 비판한다.[69] 번역 출처: 덴칭거 5073-5074[70] (문헌 내 주석)"모두 한 분 그리스도 아래"(All under One Christ), Nr. 14: Growth in Agreement, 241-247 참조.[71] 번역 출처: 덴칭거 5081[72] 예: "너희는 행위구원론"/"너희는 실천 없는 죽은 믿음"[73] 가톨릭과 개신교애서 각각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1#2#3)와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관계 및 대화를 다룬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폰 발타살은 바르트에 대한 저술을 통해서 특히 두 분야에 대해서 숙고한 것으로 보인다. 한 분야는 신론, 창조론, 그리고 은총론과 관련한 것이고 또 다른 분야는 교회론과 성사론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분야라고 폰 발타살은 말한다. 즉 신론, 창조론 그리고 은총론이 다른 것들보다는 우선한다는 것인다. 왜냐하면 교회론과 성사론은 첫 번째 분야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그는 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분야는 '근본적 그리스도 중심주의'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및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단지 바르트와 폰 발타살 사이에서의 일치만이 아니라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사이에서도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내용이다. 교회론과 성사론을 포괄하는 두 번째 분야에서는 서로 주장하는 바가 많이 다르고 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기에 당분간은 일치된 의견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간주된다. 두 번째 분야에서 드러나는 신학적인 과제는 교회분열을 야기하는 신학적 문제들이 과연 첫 번째 분야로부터 정당하게 그 근거를 갖고 있는지 여부를 탐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과제는 교회분열 이후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양측의 입장 모두가 과연 첫 번째 분야로부터 정당하게 도출되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상호 인정이 가능한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고 나아가서 서로 간에 극도의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폰 발타살은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를 막는 불필요한 신학적 근거들이 제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론과 성사론에서는 아직도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이지만 바르트나 폰 발타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교회분열의 주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개신교 신학의 가톨릭적 수용 가능성: 칼 바르트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의 신학적 대화를 중심으로〉. 이규성 S.J.)[74]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대로 자유의지속에 선과 악이 있지만 악으로 균형추가 심하게 기울어있어 악을 행할수 밖에 없다고 본다.[75]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또는 본래의 모습이 왜곡되었지만 하느님의 선재은총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감리교는 절충안에 가깝다.[76] 루터와 칼뱅은 인간은 악으로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죄를 짓는 방향만으로 간다고 본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신학전제와 개념은 다르다.[77] 갈라디아서 5장 17절, 공동번역[78] 야고보서 2장 17절, 공동번역[79] 고린토1서 13장 2절, 공동번역[80] 갈라디아서 5장 17절, 공동번역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