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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래(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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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강래(밀양 독립운동가).jpg
출생 1869년 11월 16일[1]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남삼동면 상촌동
(현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상촌마을[2] 1213번지)
사망 1932년 9월 8일 (향년 62세)
본관 전주 이씨[3]
순구(舜九)
모련(慕蓮)
묘소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 금음산 선영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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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69년 11월 16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남삼동면 상촌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상촌마을 1213번지)에서 아버지 제천(霽川) 이기형(李起馨, 1845.7.3. ~ 1890.1.21.)[4]과 어머니 함평 이씨(1843.6.7. ~ 1926.12.26.)[5]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형은 무관으로 고종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도염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에서 살았다.

그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북간도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기지건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14년 6월부터 황해도의 재산가 남정호(南廷鎬)가 연백군 경내에 소유한 토지 매각을 주선하며 1,127엔의 자금을 확보했다.

1915년 음력 6월경에는 경성부 익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 차진원(車鎭源)의 집·김정빈의 숙소·도염동 자택 등지에서 김정빈(金正彬)·이승호(李承鎬)·이승규(李承奎)·이승직(李承稷)·남정호·유연건(柳淵建)·신언학(申彦學)과 함께 몇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임오군란 직후에 조선 주재 청나라 공사로 있으면서 고종황제에게 은 26만냥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이들은 차용증서를 의친왕을 통해 양도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위안스카이와 교섭하여 그로 하여금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제안하도록 하는 한편, 우리는 중국 간도로 이주하여 건북유한공사(建北有韓公司)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는 일련의 계획을 강구하였다.

또 같은 해 7월 그는 숭례문 부근 모 인쇄소에 고종 본명인 이희(李熙)와 의친왕 이강(李堈)의 위조 도장을 조각하도록 의뢰하였으며, 위안스카이에게 보내는 고종황제와 이강 명의의 '만국평화회의 날짜에 대한제국의 이미 추락한 종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취지의 성명서 1통, 위 성명서를 만국평화회의에 부치고 열강이 조선독립을 승인해야한다는 취지의 성명서 1통, 대한제국 황제 특파 대표위원 파견 취지의 위임장 1통, 대한제국 국민에 대해 국권회복에 충성을 다하라는 취지의 유시문 1통 등을 자택에서 작성하고 그 중요 부분에 도장을 찍어 완성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남정호와 신언학·유언건·이승직에게 배부하고서 황해도·경상도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동지 규합에 대한 근거 자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강래의 이 같은 활동은 일제에게 탐지되어 1916년 4월 11일 일본 경찰에 동지 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6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사문서위조 행사·사기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6],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7]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그해 12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8], 상고를 제기하였지만, 이듬해인 1917년 2월 5일 고등법원에서 결국 상고가 기각되면서[9]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2년 9월 8일 사망하였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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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결문에는 11월 2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집성촌이다. 낙주재(洛洲齋) 이번(李𤄫)은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봉화현감에서 파직되었고, 이후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3] 효령대군파-의성군(誼城君)-송산도정파(松山都正派) 19세, 시조 42세 '강(康)'자 항렬.[4] 자는 성로(性魯).[5] 이민행(李敏行)의 딸이다.[6] #[7] #[8]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