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51

이강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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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
2.1. 고등학교2.2. 대학교
3. 프로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개요

이강철의 선수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2.1. 고등학교

광주서림초, 무등중을 졸업하고 1982년에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1983년 광주일고의 전국대회 3관왕(대통령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당시 멤버였다.[1] 1984년 황금사자기에서 1년 후배 정회열, 이호성과 함께 황금사자기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했고 박준태가 2년 연속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이강철과 박준태는 같이 동국대로 진학했다.

2.2. 대학교

동국대에는 송진우, 백인호(백인수), 박철우 등이 있었고 이강철과 박준태가 가세하여 전력이 강화됐다. 송진우의 그늘에 가렸지만 자기 몫을 다했다.

3. 프로 경력

3.1. 해태 타이거즈 1기

1989년, 해태에 입단한 국가대표 투수 3인방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군산상고 출신의 조계현이광우. 3,500만원을 받고 입단했으나,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인 4,200만원을 받자 해태는 기를 세워준답시고 송진우와 같은 금액인 4,200만원으로 부풀려 발표했다. 막 입단한 선수의 기를 살려준다고 계약금을 부풀려 발표한 걸 보면 해태가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히스토리 20 이강철 '10년 연속 10승'의 전설 속으로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이강철은 1989년 데뷔시즌부터 15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통산 5번째 우승에 기여했으며,[2] 1998년까지 매년 150~200이닝을 기록하면서도 평균자책점은 최대 3.64를 기록할 정도로 기복 없는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잠수함 선발투수로 활약했고, 해태 왕조의 9번째 우승까지 큰 공헌을 했다. 또한 평균자책점 2점대도 2번이나 기록했고, 15승 이상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화려함도 갖추었던 선수였다. 이강철하면 떠오르는 10년 연속 10승-100탈삼진의 기록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다.[3] 선발투수 10승 하면 타자 3할과 비슷한 대단한 기록이었지만 이강철이 딱 10승에 그치면 겨우 10승?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너무 당연한 기록이었던 것. 거기에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총 6경기 중 5경기에 등판해 2승 1세이브 1완봉 평균자책점 0.56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고, 부상으로 현대정공에서 출시한 현대 싼타모를 받았다.



1998년에는 투수임에도 이례적으로 팀 주장을 맡아 고참으로서 선수단을 이끌기도 하였고, 10년 연속 10승-100탈삼진이라는 기록도 이 때 세웠다. 이러한 기록들만 봐도 이강철이 얼마나 꾸준한 선발투수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동안 쉴새없이 달려온 탓인지 1998년 시즌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으면서 1999 시즌은 한 경기도 못나오고 통째로 쉬었다.[4] 1999년 시즌 종료 후 FA 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이강철도 FA 자격을 얻었지만, 자금난에 시달리던 해태는 당연히 그를 잡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해태를 떠나게 된다.

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527220238468B3.jpg
1999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고, 당시 한창 우승에 목말라있던 삼성 라이온즈와 3년 최대 8억원에 계약하면서 이적했다.[5][6][7] 당시 FA 보상 선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박충식이었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무릎 수술 후유증과 노쇠화가 겹쳐 2000 시즌은 평균자책점 7.30 1승 4패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먹튀로 찍혔다.

3.3. 해태-KIA 타이거즈 2기

2001년 시즌을 앞두고 해태 시절 은사인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해오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결국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1년 7월 30일 2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 타이거즈로 돌아갔다.[8]

하지만 신기하게도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직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부활하면서 KIA 팬들의 환호를 받음과 동시에 삼성 팬들의 혈압만 올렸다. 비록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하고 더이상 선발투수가 아닌 불펜투수로 뛰었으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자책점 2.79 17승 29홀드 33세이브 WAR 7.08을 기록하며 계투로나마 부활을 알렸다. 특히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각각 66경기 105이닝, 67경기 68이닝, 79경기 85이닝을 소화하며 롱릴리프, 셋업맨,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 이강철은 역대 만 36~38세 선수 중 최다 등판을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계투가 엄청나게 불안했던 KIA에서 팬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하고 볼 수 있었던 중간계투는 이강철과 신용운 뿐이었다.

2004년 4월 14일 인천 SK전에서는 개인 통산 147승을 올리면서 선동열의 통산 최다승 기록을 넘어 타이거즈 투수 최다승 기록을 경신했고, 8월 15일에는 개인 통산 150승을 올리면서 타이거즈 투수 첫 150승 고지를 밟았다.

그러나 2004년 말부터 급격하게 노쇠화가 찾아오면서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2005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고,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대투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9] 은퇴식은 2006년 4월 12일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개최됐다.[10] 은퇴식 당시 사진 모음, 은퇴식 영상

4.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6 195⅓ 15 8 5 - .652 3.23 153 13 85
(5위)
138
(4위)
74 70 1.17
1990 44
(3위)
220⅔
(1위)
16
(3위)
10 5 - .615 3.14 165
(3위)
24
(1위)
93
(3위)
165
(2위)
84
(3위)
77
(1위)
1.12
1991 36 214⅔
(2위)
15
(5위)
11 3 - .577 3.19 158 29
(공동 1위)
69 193
(2위)
87
(3위)
76
(3위)
0.99
(3위)
1992 33 217⅓
(2위)
18
(2위)
9 0 - .667 3.44 179
(4위)
29
(1위)
87
(5위)
156
(1위)
88
(4위)
83
(2위)
1.15
(5위)
1993 31 154 10 10 1 - .500 3.04 113 9 78
(5위)
131
(4위)
60 52 1.16
1994 33 185⅔ 12 15 1 - .444 3.64 150 19 122
(1위)
140
(5위)
86
(2위)
75
(5위)
1.37
1995 29 150 10 10 1 - .500 3.24 127 15 71 126 60 54 1.20
1996 28 153⅔ 10 9 1 - .526 2.46 114 11 60 119 43 42 1.05
(5위)
1997 30 162⅔ 11 3 2 - .786
(2위)
2.99 130 14 75 128 63 54 1.17
1998 31 179⅓
(5위)
15
(3위)
11 0 - .577 3.11 165 18 65 160
(4위)
70 62 1.18
1999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삼성 14 37 1 4 0 0 .200 7.30 45 8 22 20 33 30 1.6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KIA 27 56 2 3 1 1 .400 6.91 59 9 31 50 43 43 1.41
2002 66 105 5 2 17
(5위)
8 .714 3.17 82 12 46 97 41 37 1.12
2003 67 68⅓ 6 4 9 14
(3위)
.600 1.98 42 7 31 57 21 15 0.95
2004 79
(3위)
85⅓ 6 2 7 7 .750 2.95 68 9 39 56 29 28 1.16
2005 18 19⅔ 0 1 0 3 .000 3.20 23 1 12 15 7 7 1.58
KBO 리그 통산
(17시즌)
602 2204⅔
(4위)
152
(5위)
112 53 33 0.576 3.29 1771 218
(3위)
986
(2위)
1751
(4위)
889 805 1.17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년 8완투 3완봉
1990년 10완투
(공동 1위)
1완봉
1991년 11완투
(공동 4위)
2완봉
(공동 4위)
1992년 12완투
(4위)
2완봉
(공동 4위)
1993년 2완투 1완봉
1994년 5완투 1완봉
1995년 4완투 2완봉
1996년 5완투 2완봉
1997년 5완투 2완봉
1998년 3완투 2완봉
KBO 리그 통산 65완투 18완봉
(5위)


[1] 1년 선배 문희수와 김성규, 동기생 박준태가 투-타에서 맹활약했고 이강철은 서브 투수였다.[2] 과거의 전후기 시즌제가 단일 시즌제로 바뀌고 치른 첫 한국시리즈였는데,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서 1위 빙그레를 한국시리즈에서 누르고 우승했다. 그러나 다음 2위 우승은 무려 29년 뒤인 2018년 SK 와이번스가 달성하게 된다. 그 외에 1992년(롯데), 2001년(두산), 2015년(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들(양대리그였던 1999~2000년 시즌은 제외)은 정규시즌 1위팀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했다.[3] 장원준도 10년 연속 100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강철은 최소 119개였던 반면 장원준은 102, 103, 107, 108개 등 조금 아슬아슬하기도 하였고 최다삼진도 이강철이 크게 앞선다.[4] 당시 이강철의 이탈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나마 곽현희가 팀내 최다승인 11승을 거뒀지만 방어율이 무려 6점대였다. 나머지 투수들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엄청난 타고 시즌이지만 타선이 210홈런을 치면서 역대 최강에 근접하는 포스를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이강철의 부재가 너무나 뼈아팠다. 특히 이강철의 이탈이 팀에 큰 구멍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는데, 2년간 WAR 13에 20승 60세이브를 거두었던 임창용이 199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선발진의 무게감을 양분하던 이대진도 이 해에 어깨 부상으로 인한 재활의 터널에 들어갔다. 거기에 어린 나이임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훌륭히 책임지던 김상진은 위암으로 인해 22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했다. 즉 1998년 팀의 핵심투수 4명이 이듬해 이대진의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전부 이탈해버린 것이다.[5] 이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후 FA 자격을 얻어 타팀으로 이적한 최초의 사례다. 이로부터 며칠 후 삼성은 LG와 계약에 실패하고 FA 시장에 나온 포수 김동수마저 3년 8억원에 데려오면서 FA 2명을 싹쓸이하는데 성공한다.그리고 둘 다 먹튀로 전락한 뒤 계약기간 다 못채우고 트레이드됐다[6] 당시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가 이강철과 사전 접촉을 했다며 이적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고 마찬가지로 김동수를 삼성에 빼앗긴 LG 트윈스와 함께 구단 이사회를 열어 FA 제도 폐지를 주장했으나 나머지 구단의 반발로 무산된다.[7] 이 시절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삼성 라이온즈의 자금력 동원은 엄청났다. 그 예로 1997년 시즌 종료 후 해태에서 조계현을 4억에 트레이드해왔다. 1998년 시즌 후 간판타자였던 양준혁황두성, 곽채진현금 30억까지 해태에 내주고 임창용을 데려왔고, 쌍방울에 현금 20억을 주고 투타 간판이던 김현욱, 김기태를 데려왔고, OB에 6억 5000만원을 주고 투수 김상진을 데려왔다. 1999년 시즌 후 실시된 FA 제도를 통해 이강철과 김동수를 영입한 건 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중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인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선수는 임창용과 김현욱 둘뿐이며, 나머지는 죄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먹튀로 전락해버렸다.[8] 해태가 KIA로 바뀐 것은 8월 1일이었다. 그래서 7월 31일 해태의 진짜 마지막 경기(인천 SK전)에서 이강철이 검빨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있었는데, 이 경기가 우천취소되어 7월 29일 광주 삼성전이 해태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9] 심지어 39살이던 마지막 시즌 성적이 나빴던 것은 또 아니었다. 평균자책점이 3점대였으니 1년은 더 두고볼 수 있던 수준.[10] 여담이지만 이 날 은퇴식에서 이강철에게 꽃다발을 전해 주는 광주제일고 선수는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강이었다. 2019년 이강철이 kt wiz 감독이 되고 김강이 kt 타격코치로 합류하면서 이 때의 인연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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