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민복 李民馥 | Lee min-bo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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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57년 12월 ([age(1957-12-31)]세) |
| 황해북도 서흥군 | |
| 국적 | |
| 종교 | 개신교[1] |
| 가족 | 아버지 이포구(1925~1985), 어머니 |
| 배우자[2], 아들[3], 딸 | |
| 학력 |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 |
| 경력 | 남포농업대학 연구소 연구원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 연구원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
| 링크 | |
1. 개요
북한 前 북한과학원 과학자, 농업 연구원.탈북자로서 첫 UNHCR(유엔난민) 등록자이며, 당시 널리 쓰이던 '귀순자'를 대신해 '탈북자'라는 명칭을 최초로 제안하였다.
1995년 2월 18일에 러시아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탈북하였고 현재는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로 대북풍선 활동 등을 하고 있다.
2. 생애
2.1. 북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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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은 아버지 이포구이고 오른쪽이 이민복이다. |
이민복의 부친 이포구는 1927년 전라도 익산시 함라면 출신으로 형제들 중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나와 10대 후반 일제의 강제징용을 가까스로 모면하였고, 1945년 해방이후 남로당에 가입하어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인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때, 익산군당 선전부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다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황이 바뀌자 인민군 6사단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이후 사리원공산대학과 평성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원유공급소, 산업은행, 수산물상점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민복은 이런 안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부친 이포구가 1967년 진공관 라디오로 남한 라디오를 들었다는 혐의로 이웃에게 고발당해 보위부에 끌려가버렸다. 중앙당 간부로 있던 친인척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남로당 시절 활동이 인정되어 간첩 혐의를 벗게되지만 이후 평생동안 감시속에서 살게된다.
이런 와중에도 이민복은 공부를 아주 잘해서 고등중학교 시절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 할 정도였고 북한 최고의 기술대학인 김책공대 반도체공학부에 응시했으나, "쌀은 공산주의"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농업 분야를 선택해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업과학원 토양학 연구소 토양개량실, 밭작물연구소 수수연구실 연구원 겸 사로청위원장(청년비서)으로 있다가, 1979년에는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대학연구소보다 수준이 높은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기병(soposporim rerianim)을 1982년부터 연구를 한다. 과학원에서 최연소 연구원이었으며 북한주민의 주식인 옥수수생산의 난제인 깜부기병 유일 연구원이었다. 깜부기병은 옥수수를 연작하는 북한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야 50% 이상의 소출감소를 불러오는 암과 같은 병이다.
토양속에 있다가 옥수수 어린 싹에 침투하는 깜부기병은 토양 전체를 소독해야 하기에 퇴치 불가라고 하던 것을 이 병에 강한 종자 육성으로 퇴치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85년, 남조선 간첩 혐의로 평생을 감시속에서 살던 부친 이포구가 "정치는 최대 협잡" 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해 이민복은 양강도와 북부지역에서 50%까지 발생한 깜부기병 퇴치 임무를 받고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황실험을 통해 개인농과 집단농의 차이가 5 내지 7배 수확량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4]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과학원 국장이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당신을 정치범으로 체포하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여겨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연구로 인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반동 사상으로 분류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김일성에 대한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이후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군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대북전단을 보게 되었고 남한의 북침이라고만 알고 있던 6.25 전쟁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찾아보아도 침략자의 수도를 3일 만에 수복한 전례가 없다는 게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다고. 결국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참전용사였던 연구소의 화부[5]에게 술과 담배를 주며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물었더니 백골부대 군인들이 팬티바람으로 도망다녔다는 말을 듣고 전쟁이 김일성에 의한 북한에 의해서 일으켜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서로의 증오심으로 통일이 안 되는 것을 해소하자면 거짓에 속고 있는 북한 동포에게 진실을 알려야 싸우지 않고 통일하는 방법임을 확신하고 이를 대북 풍선에 담아 보내야 한다는 사명심을 가지고 탈북을 결심하였다.
외부 라디오와 인터넷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북한을 자유롭게 뚫고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은 레이더와 육안으로 보이지 않고 열과 소리가 나지 않아 탐색당하지 않는 풍선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남한에 도착하여 3일 만에 제출한 대북정보에서 첫째가 원자탄보다 더 위력한 대북풍선 삐라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료가 남아 있어 그의 탈북의도가 증명된다.
1990년 11월 1차 탈북은 실패, 중국 변방대에 체포 중국감옥과 북한정치보위부 감옥(정치보위부 집결소)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문익점처럼 공화국을 위해 중국 종자를 훔쳐오려 했다고 시종일관 주장한 것이 먹혀들어 <과잉충성분자>로 석방된 것이었다.
1991년 6월 재시도 끝에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이후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렀고, 19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가 생활하던 중 1995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2.2. 탈북 이후
1994년 3월 모스크바 망명시절 월스트리스트 저널 로제트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북한 사람으로서 처음 UNHCR에 등록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든 탈북자들을 UNHCR 즉 유엔 난민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는 길을 개척하였다.1994년 3월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 기자가 파견한 황성준 레닌그라드 대학 전임강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쓰이던 <귀순자>대신 <탈북자>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모스크바에서 탈북자들을 규합하여 <러시아 탈북난민협회>결성한 사건이 국제앰네스티 운동에 기재되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남한에 정착한 다음해인 1996년 안혁, 강철환과 함께 북한인권운동의 첫 시작인 북한인권시민연합 창설 멤버로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중국 감옥, 북한 감옥, 러시아 감옥을 거치며 1995년 2월 18일에 한국 서울에 도착했다.
1998년 12월 13일 첫 자율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를 결성하고 탈북자 입국시 조사과정 인권유린 중지, 정보기관에 제한을 받던 결사와 언론, 여권발급의 자유를 찾게 하였고 조사위주에서 정착위주의 체계인 하나원을 출범시키는 촉매재 역할을 하게 하였다.[6]
2003년 3월에는 첫 유엔 북한 인권 회의 차 제네바에 방문하기도 했다. 회의에는 김상헌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영국 국회 부의장 콕스 여사, 조선일보 탈북출신 기자 강철환이 함께 참가하였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의 합의로 대북방송과 전단이 중단되자 2003년부터 자체적으로 대북풍선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대북풍선단장 및 대북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남한입국 후,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서울에서 삼육대 신학대학원과 장로교 합동 총신(총회 신학대학원), 직업 전문학교을 다녔고, 약 3천회 안보 강연, 북한 세미나, 교회 간증을 다녔다고 한다.
3. 북한인권운동
고난의 행군 직전에 탈북한 전형적인 신념형 탈북자로서 북한 김씨왕조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했고, 2003년 이후 민간 대북전단 살포에 뛰어들었다.3.1. 이민복의 주장
이민복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대북전단에 의해 탈북의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대북전단의 중요성을 크게 느낀다고 하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대북 정책은 대북풍선밖에 없다고 한다. 남북이 전쟁하면 남한이 백번 이기지만 동족의 피가 흐르며, 또 핵을 가진 북한이기에 전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이제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백전백승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인데 이는 북한사람에 의해서 북한이 변화되게 하는 길이다. 그러자면 북한 사람을 깨우쳐야 한다. 이렇게 깨어날가봐 3대세습신정자는 라디오 인터넷을 막은 유일 폐쇄국으로 만들었다. 유일 폐쇄 북한을 자유롭게 뚫고 들어가는 평화적 수단이 풍선이다. 대북풍선은 레이더, 열, 소리, 육안 추적이 안 되는 완벽한 스텔스기구이다. 이러한 풍선에 진리를 담아 보내면 북한사람에 의해서 북한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거짓말로 지탱하기에 진실을 보내면 백번 승산이 있다. 또한 수령을 우상화한 북한을 대적하여 기독교 진리를 보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을 사역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대북 전단 물품은 주로 개신교 신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구매하고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단 내용은 선교용과 일반용으로 한다. 전단종류는 아날로그 식(비닐과 종이에 인쇄된 것)과 디지털 전단(CD, USB)이며 약품을 비롯한 기타 구제품도 보낸다.
대북풍선운동은 철저히 조용히 해야 한다. 북한을 자극하고 접경주민에게 불안을 야기시키는 공개적 대북풍선행위는 대국민사기이며 불법자들이다.
3.2. 활동
다른 북한인권운동가들과 달리 보수정부에도 비판을 많이 날린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처음으로 전단을 날린 이후 “대북정책 기조가 노무현 정부와는 나와 맞지 않았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제재는 없었는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절에 더 많은 인권 침해적 통제를 가했다.”며 2014년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또한 다른 탈북민 대북전단 활동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박상학 대표를 매우 비판하며 사이비 활동가라 지칭한다. 이 둘은 비공개와 공개적이란 풍선행동이 매우 다를 뿐더러 온건파인 이민복 대표에 비해 강경파인 박상학 대표의 활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에 피해를 주는 활동이라 이야기한다. 실제 하태경 국회의원은 2014년 경찰청과 기상청 조사자료에 근거하여 박상학 풍선은 대국민사기극으로 평가, 즉 남한에 떨어진 전단은 전부 박상학 것이며 한편 풍선행사 7번중 6번은 풍향이 북한으로 가지 않은 때 날림으로서 사실상 대북풍선이 아니라 대남풍선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이승만 상, 2023년 북한인권상을 수상했다.
2021년 대북전단 금지법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 시위를 하였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4.1. 대북전단 북한군 총격 사건
2014년 10월 10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이민복 대표가 날린 대북전단 풍선을 북한군이 고사포로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조용히 작업하던 그가 북한군에 발견된 것은 오전 10시경으로, 바로 그날 아침 10시부터 임진각에서 자유북한운동 박상학이 20개 언론사를 대동하여 공개적 행사를 하는 통에 북한군에 발견된 것이다. 다음날 남은 대북전단을 살포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래선지 공개적 풍선행위를 가장 반대한다. 대북풍선은 풍향이 결정적인데 남한 내 대기환경 상 백령도가 최적지이다. 하지만 박상학이 벌인 공개적 풍선행사 단 한번으로 백령주민들이 반대가 거세지며 중지되었다. 백령도에 풍선기지까지 만들고 다년간 날리던 이민복 대북풍선에 결정적 피해를 끼친 것이다. 백령도는 미래해운이란 유일한 수송선에 풍선차를 싣고 가야 하기에 몰래 들어갈 수 없다. 백령주민들이 미래해운에 풍선차를 실어주지 말라고 압력을 넣어 조용히 진짜 대북풍선하는 이가 못하게 된 것이다.
4.2. 공금 횡령 논란(무혐의)
2020년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금유용 등의 혐의로 대북전단 살포단체 4곳을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이 중 한곳으로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또한 지목되어 경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당시 대북전단 기부금이 단체의 돈벌이로 유용된더는 의혹이 언론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횡령혐의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 3곳은 송치되었다.
다만, 이민복 대표는 수사결과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되었다.#
5. 비판
전방지역에서 군복무를 한 사람들 중에서는 '이민복'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박상학과 함께 군생활 빌런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이민복이 풍선을 날리는 지역의 부대는 비상이 걸려 상황 대기하느라 잠도 못 자고 상당히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이민복을 검색하면 경험담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1#2#3#4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사고방식이 자신이 탈북한 1990년대 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남한 사회가 지난 30년간 극심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은 것처럼 이제 한류가 유행할 정도로 북한 사회도 고난의 행군과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 2009년 화폐개혁 실패[7],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그리고 최근에는 러-우전쟁 참전 등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있다. 당장 북한 주민들이 중국휴대폰을 통해서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과 실시간으로 통화하고, 그 탈북자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떵떵거리면서 사는 상황에서 옛날처럼 조선로동당의 세뇌에 속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북한 인민 흑흑 이런 관점에서 그들에게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사명감만으로 대북전단 날리기에만 집착하는게 과연 이민복 본인이 주장하는 김씨왕조체제 붕괴에 얼마나 기여하겠냐는 것이다.
6. 여담
- 라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탈북 후 처음 맛 본 남한 음식이 날계란을 푼 라면이라고 한다. 또한 계란은 북한에서 워낙 귀해서 못 먹는 음식이라고 증언했다.
- 군대를 가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으로 간 직통생 출신이다. 북한에서 직통생이 되려면 출신성분이 매우 좋거나 혹은 공부를 매우 잘 해야 하는데, 바로 후자 케이스.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탈북 후 국정원에서 '어디에 가보고 싶냐'는 말에 '교도소'와 '쓰레기장'에 가보고 싶다고 말해서 국정원 직원들이 놀랐다고 한다. 저 두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한 이유는 진짜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인지 알고 싶은데, 잘 사는 동네나 화려한 장소는 어느 나라든 잘 꾸며 놓기 때문에 실제로 그 나라가 잘 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일 열악한 곳을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직접 가본 교도소가 북한의 호텔보다 좋고, 쓰레기장에 버려진 물건들이 북한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거의 새것들인 것을 보고 한국이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1] 탈북민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2] 재혼[3] 전부인과의 소생으로 현재는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4] 사실 구 소련, 동유럽, 중국 등 공산권의 고위층들은 이미 수십년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단지 모든 생산수단의 협동화, 공유화라는 레닌주의의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무시하고 있었을뿐. 거기에 개인농을 인정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농민계층 안에서도 부농과 소농의 빈부격차가 발생하면서 체제유지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두렴움도 한몫했다.[5] 보일러의 불을 때는 인부[6] 이것은 이민복보다는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인권중시 정책의 결과물이다. 당시 정권출범과 함께 취임한 이종찬(1936) 안기부장이 정치공작 관련자들을 모조리 해직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는데 이 와중에 탈북자 대책도 정보추출에서 국내정착 지원쪽으로 프로세스가 완전히 바뀌게 된것이다. 하나원도 이런 영향으로 1999년 처음 출범하였다.[7] 이 사건은 그동안 장마당을 통해서 어느 정도 자생력을 확보했던 북한 인민들의 삶을 다시금 나락으로 보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