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리노 그라딘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191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
이사벨리노 그라딘 |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이사벨리노 그라딘 Isabelino Gradín | ||
출생 | 1897년 7월 8일 몬테비데오 | ||
사망 | 1944년 12월 21일 (향년 47세) 몬테비데오 | ||
국적 | 우루과이 | ||
신체 | 키 172cm | 체중 68kg | ||
포지션 | 포워드 | ||
소속팀 | CA 페냐롤 (1915~1921) 올림피아 FC[1] (1922~1929) | ||
국가대표 | 23경기 10골 (우루과이 / 1915~19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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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선수.2. 생애
2.1. 선수 생활
사진을 보면 바로 알겠지만 그라딘은 흑인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레소토 왕국[3] 출신의 노예였다고 한다. 그라딘은 몬테비데오 인근에서 성장했다.1915년, 18살의 나이에 CA 페냐롤에서 데뷔했고, 당시 남미 축구계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양강체제였다.[4]
그는 곧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그라딘의 피부색이요, 둘째는 그의 스피드였다. 그의 스피드는 정말 무지막지했는데 그는 축구 선수와 함께 단거리 육상 선수를 겸업했었고, 400m와 200m 달리기에서 무려 4차례나 남미 챔피언을 차지한 경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당시 페냐롤과 우루과이의 상대팀 선수들은 대륙 육상 챔피언을 상대로 스피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곧이어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는데 이는 후안 델가도와 함께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의 흑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된 것이었다.[5] 그리고 1916년, 19세의 그라딘은 역사상 최초의 대륙컵 대회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우루과이가 첫 우승을 차지했고, 그라딘은 3골로 대회 득점왕과 MVP를 모두 차지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있던 시대였던지라 되도 않는 태클에 걸리기도 했다. 당시 칠레에서는 불공평하게(!) 흑인을 대표팀으로 뽑았다는 이유로 우루과이를 공격했었다. 하지만 그라딘은 칠레를 상대로 2골을 넣어버림으로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듬해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도 그라딘은 명단에 들어갔지만 출전은 단 한경기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최종전에서 브라질과의 150분간의 혈투 끝에 1대0으로 패배하여 3연패에는 실패했다.[6]
이후에는 우루과이 대표팀에 명성만큼 자주 불리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우루과이 축구협회가 두 개로 쪼개졌기 때문이며, 그라딘은 그 반대편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7] 그 덕분에 그라딘은 우루과이 축구의 1차 전성기를 함께하지 못했다. 1928년에는 올림픽에 참가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라딘이 거부했다.
클럽에서도 그라딘의 활약은 성공적이어서 아우리네그로스[8]에서도 100골 이상을 득점했다. 하지만 페냐롤과의 갈등으로 인해 1921년에 페냐롤에서 나와 올림피아 FC에 들어갔고 1929년에 축구계에서 은퇴했는데 육상에 힘을 더 쓰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2.2. 육상 선수로서의 그라딘
1918년에 Campeonato de Iniciación에서 400m 금메달과 200m 동메달을, 이듬해 남미 챔피언십에서는 400m와 200m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1920년에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고, 1922년의 비공식 대회에서 400m 금메달을 땄다고 알려져 있다.2.3. 이후
축구와 육상의 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라딘의 말년은 빈곤의 연속이었고, 1944년 12월에는 결국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우루과이 리그에서 우승을 거둔 후 CA 페냐롤의 후배 선수들이 단체로 문병을 와서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12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왼발잡이였던 터라 스트라이커 또는 아웃사이드 레프트[9]가 그의 주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른발 사용에도 능했으며 정확한 크로스와 강력한 슈팅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월드컵 이전의 우루과이 축구계의 스타 중 한 명이었다.4. 기록
4.1. 대회 기록
- CA 페냐롤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1918, 1921
4.2. 개인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16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16
4.3. 육상
- 400m 금메달 4회: 1918(Campeonato de Iniciación), 1919, 1920(이상 남미 챔피언십), 1922(비공식 대회)
- 200m 금메달 2회: 1919, 1920(남미 챔피언십)
- 200m 동메달 1회: 1918(Campeonato de Iniciación)
[1] 현재의 이름은 CA 리버 플레이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연고로 하는 팀으로, 아르헨티나 CA 보카 주니어스의 수페르클라시코로 유명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CA 리버 플레이트와는 이름은 같지만 국적이 완전히 다른 팀이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당시는 레소토가 독립하기 전이었으니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4] 그라딘이 데뷔하던 1915년까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총 상대전적은 아르헨티나가 20승 8무 18패로 조금 앞섰다. 그리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다른 팀들과 A매치를 거의 가지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등과도 A매치를 가졌고 브라질에 한 번 패배한 것을 빼면 모두 승리했다. 브라질과 칠레는 1910년대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A매치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1900년대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서로밖에 붙을 상대가 없기도 했다[5] 남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표선수는 옆 동네 브라질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이다[6] 이 대회에서는 재경기가 아닌 승부가 날 때까지 30분간의 연장전을 치르는 형태였고, 2차 연장전 끝에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결승골로 승부가 났다.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이 골로 우루과이 사람들에게 El Tigr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7] 현재까지도 명맥을 잇는 주류 우루과이 축구협회와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하던 FUF로 쪼개졌었다. 그라딘은 FUF쪽이었다[8] 금색+검정. CA 페냐롤의 팀컬러이다. 비안코네리, 로쏘네리, 네라주리 등과 같은 어원이다[9] 현재의 왼쪽 윙포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