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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碩奎
1910년 ~ 1986년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벽진(碧珍)[1]. 일진회의 회장을 지냈던 이용구의 아들이다.2. 생애
1910년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아버지 이용구(李容九)와 어머니 이화사(李華師)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이용구가 죽은 이후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나고야시에서 자랐다. 그를 낳기 전에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로 두었으나 이석규를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 이후 도쿄도에서 소학교 및 중학교를 졸업한 뒤 릿쿄대학 영문과, 니쇼가쿠샤(二松學舍)를 졸업하였다.일본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이다. 성씨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오히가시 쿠니오)'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1937년 귀국해 아버지가 창설한 시천교를 대동일진회로 재발족해 창씨개명을 강권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39년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를 개최해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의 제사를 지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이용구 전기[2]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일본 제국과 아버지 이용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1984년 여름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 이용구가 평생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
1986년 일본에서 향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그와 그의 아버지인 이용구와 함께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