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26 23:48:19

이석(1910)

파일:이석(칠곡 독립운동가).png
1930년 12월 17일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이석(李李錫)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
출생 1910년[2] 12월 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3]
사망 1978년 12월 5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89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석은 1910년 12월 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수헌(李壽獻)과 어머니 순천 박씨[4]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거주하였다.[5]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그는 결사대에 가담,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후 1929년 11월에는 경성부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한다'는 격문을 제작·배포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월 29일부터 수감되었으며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귀향하여 고향 칠곡군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에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조선 독립 및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편으로 왜관면에서 이두석·박형동·윤억병(尹億炳) 등과 함께 독서회라는 이름으로 비밀결사 성진회(惺進會)를 만들고, 회원 70여 명과 더불어 농촌계몽과 민족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던 중 1938년 2월경 체포되었으며, 4년간 취조를 받고[6] 1941년 3월 7일이 되어서야 대구지검의 예심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 뒤 1여년 후인 1942년 2월 23일 비로소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통산 840일)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8년 12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6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2세 석(錫) 진(鎭) 항렬.[2]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2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두석·이수각·이수목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박희동(朴熙東)의 딸이다.[5]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지금의 화동 2번지, 서울특별시교육청정독도서관 자리에 있었으며, 1976년 2월 20일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였다.[6] 1940년에는 6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구류갱신결정 판결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