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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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주연 5부작 영화는 틀:이소룡 주연 장편 작품 참고 |
1. 개요
이소룡이 영화인으로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회자되고, 철학적 면모는 물론,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술에 도입한 선구자라는 말도 있다. 그의 실제 무술실력은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논란에 절권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해서는 선후가 뒤바뀌거나, 왜곡 혹은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다.2. 철학
그의 철학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생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행동이 있어야 한다」[1]라는 말처럼, 능동적인 삶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물이 되십시오#와 같은 말을 미국의 방송에서 언급하며,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후술하겠지만 그의 사후에 재조명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이소룡을 철학자로 보기는 힘들다.동양철학, 특히 노장 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하는 도가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렇게 이소룡의 입을 통해 북미에 전파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8세기부터 서양에 도가 사상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관련서적들도 유럽국가에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었다. 노자와 장자 관련 서적만 해도, 출판시기가 1842년, 18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소룡의 인지도가 너무나 높았던 덕분에, 이소룡을 통해 북미의 일반대중들에게도 도가사상이 알려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상기 언급한 발언 등을 인용하며 이소룡을 철학가/철학자라고 보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는 노장사상 등을 자신의 무술에 맞게 인용하거나 각색했을 뿐,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새로운 철학을 정립했다거나, 철학적 연구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다. 학원가의 유명 과학강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공인된 연구 성과가 없으면 그를 과학자라고 하긴 곤란하듯, 그를 철학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당시에 무술가나 영화배우로서는 드물게도 철학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무술 철학가라고 하는 게 좀 더 공정한 평가일 듯. 그의 저서나 사후 출판된 책들을 읽어보면,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했거나 정리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의 이상, 주장, 기술에 맞는 동양철학의 경구나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짜 맞춘 정도이다.[2] 정리하자면 여러 철학 사상을 자신의 무술관에 접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소룡 이전부터 시작된 동양무술 열풍에 이어,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의 등장 덕에 부쩍 더 커진 무술시장이지만, 이소룡 사후의 반응은 '이소룡의 생전 사상과 자료에 대한 정리 및 보급,'그리고 '유명세를 이용한 상업주의 마케팅'으로 나뉜다. 상업주의를 통해 그의 유산을 알리는 것엔 생각보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소룡 본인이 기록, 정리에 꼼꼼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상업주의로 인해 이소룡 관련 자료, 사진, 영상 발굴이 이어져, 관련 동영상과 사진이 넘쳐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니까.[3] 최고 전성기에 급사한 동양의 무술영화배우라는 소재는, 특히 서구권의 대중들에게는,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워 홍보전략으로도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 북미에서는 대형 소매 체인점 등의 등장과 함께, 이전까지 사치품 취급 받았던 카메라, 컬러TV 등이 1960년대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던 호재[4]도 있었기에, 이소룡 관련 영상물, 출판물, 잡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소룡의 대표적인 저서라는 《절권도의 도(Tao of Jeet Kune Do》의 첫 출판은 1975년(이소룡의 죽음은 1973년)이란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동양무술 + 이소룡 + 오리엔탈리즘 + 북미 절대다수 대중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을 동양철학 = 좋은 신상”이었을 거라는 게 상식적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 등에서 일어난,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의 정신문화와 동양철학을 배우자는 움직임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는 이소룡 유족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었던 린다는 남편의 유산 및 재산관리에서 자신이 손을 떼던 2001년까지 이소룡의 절권도를 홍보하는 데 열심이었고, 지금은 그녀의 딸 섀넌 리가 그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녀의 남편 키슬러(Keasler)와 함께 비영리단체인 이소룡 재단(Bruce Lee Foundation)을 운영하며, 무술에 대한 이소룡의 철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정리노트 등을 홍보, 보급하는 데에 열심이다.
그 발단과 과정은 어쨌든 간에, 그 결과, 이소룡은 여러 분야에 영감을 준 셈이 되었다. 무술인은 물론, 배우, 영화감독, 음악가, 프리러닝 선수들까지 "나는 이소룡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 북미권에서는 액션스타는 물론 정신적인 스승으로도 인식되기도 한다. 한 예로, 기타리스트인 잭 와일드가 기타 잡지에서 "이소룡이 말하길, '자주 쓸 동작이 아니면 잊어버려라'라고 했다" 라며 인용[6]하는 등 이소룡의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서 추앙되기도 했다. 실제로 어록 중에 적극적인 삶이나 자신에 대한 구속을 푸는 자유 등을 중시하는 말이 많은데, 이는 특히 북미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말이 많기에 영감의 보고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소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무술 철학가로서는 공이 크다. 그러나 다른 무술 철학가들은 없었고, 있었다 해도 이소룡보다 수준미달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소룡은 넘사벽으로 베스트셀러였고, 다른 이들은 사이비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소룡이 대중들에게 철학자로서 각광을 받은 것은 아마도 유약해보이는 외모에 난해한 용어와 근엄한 이미지로 고식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동양의 문인과는 다른 강건한 신체와 화려한 무술실력을 바탕으로 한 강한 모습에 지적인 모습까지 엿보이는 점이 강함을 추구하는 서양, 특히 미국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지적인 근육맨으로서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것과 비슷하다.[7] 이소룡이 전술했듯 대단한 철학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불필요한 동작 등 형식적인 측면에 사로잡힌 전통 무술계에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초적인 투쟁이자 자기단련으로서의 무술의 본질을 일깨우고 간결하고 실용적인 길을 모색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스스로 강해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산파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는 할 수 있겠다.[8]
3. 실전 무술 실력에 대한 논쟁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이소룡이 일반인이나 아마추어 보다는 기량이 출중했겠지만, 그 이상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다. 사실상 그의 실전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이소룡이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사망한 지 50년도 넘은 현재까지도 뜨거운 떡밥으로 무술적인 면을 보면 그는 가라테 대회에서 공연시간[9]을 얻어 두 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 4개를 하거나, 원인치 펀치를 시전한 것이 유명하다. 당시 롱 비치 무술대회 등에서의 시범영상이나 사진 등을 보면 두 손가락으로 하고 있다. 다만 개인수련 등에서 두 팔로 할 경우는 한손가락만으로 하기도 했다. 참고로 극진공수도의 실력자들 중에서는 헤비급 체중인데도, 한팔+한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수십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배달이나 브라질의 프란시스코 필리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증명이 가능한 건 딱 거기까지다. 이 이상으로 그가 강한 파이터라느니, 프로 파이터를 이길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이소룡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는, 이소룡의 지인들에게서 나온, “이소룡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대단하더라” 식의 카더라에 불과하고, 그의 영상 역시 기술 시연(試演: 시범, 공연, performance)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의 모습을 예로 들면서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소룡 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상대의 공격을 물처럼 자연스레 받아넘기는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나 시합이 아닌, 시범/시연(試演)으로 실제 기량을 판단하는 건 좀 곤란하다.[10] 또한 《다이 하드》 시리즈가 브루스 윌리스의 실전능력(?)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이소룡의 영화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이소룡이 활동하던 1960년대엔, 이미 많은 격투기가 체계를 잡아가거나 체계를 완성한 시점으로, 근대 격투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복싱은, 1920년대부터 라이트급(이소룡의 체급) 세계 챔피언전을 치를 정도였다.[11] 레슬링도 20세기 초부터 체계적으로 전해져왔다. 복싱과 레슬링은 19세기부터 프로대회는 모두 기록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에도 미후네 코죠나 사이고 시로, 기무라 마사히코 등의 유도 영웅들이 있었고, 1961년에는 최배달이 자신만의 가라테를 완성하여 극진회관을 설립했으며, 그 이전부터 마에다 미츠요를 비롯한 많은 무술가들이 세계각지에서 본인의 무술을 홍보하거나, 실제 시합으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려 해왔다. 태국 같은 동남아에서는, 소년 시절부터 무에타이나 렛웨이, 프레달 세레이 등을 익혀 온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치고받고 있었고, 브라질에선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창시하고 익힌 그레이시 가문이 타 무술 선수들을 박살내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선 발리 투도의 초석을 쌓고 있던 시대였다. 이렇듯, 격투기를 업으로 삼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피 튀기는 실전과 시합을 하던 무술가, 격투가들이 이미 즐비하던 시대에, 사실상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공식 전적(戰績)은 없는 이소룡을 최강자라 칭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소룡과 교류가 깊었다는 미국의 무술가, 조 루이스(Joe Lewis, 1944~2012)를 이소룡이 가르쳤다든지, 미국의 많은 가라테인들과 교류할 때 그들은 이소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든지 하는 말도 전해진다. 실제로 마이크 스톤, 척 노리스, 조 루이스와 교류하고 훈련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이 셋은 각 가라테 챔피언수준의 무도가 들이였다. 이소룡이 이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스파링시 압도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나 그것은 확실치는 않다.
미국식 킥복싱 선수로 일류 수준에 오르기도 했던 조 루이스는, 사실상 독학으로 무술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독학으로 시작한 단 22개월의 수련만으로, 1966년, 제1회 전미(全美) 대회에서 우승했고, 1966~1969년, 미국 챔피언이었다. 척 노리스를 이긴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척 노리스는 조 루이스를 꺾고, 빅터 무어, 스티브 샌더스 등 당시 유명 무술가들을 패배시키며, 조시학(S. Henry Cho, 1934~2012)이 주최한 무술대회(All American Open Tae Kwon Do/ Karate/ Kung Fu Championship)에서 2회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생전 이소룡은 스스로 강함을 추구했고, 자신의 근육이나 기술 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하는 걸 즐겼다는 증언이 많은데, 정작 진짜 격투에서의 강함을 증명하는 실제적인 행위, 즉 대회 출전, 공식 시합 등은 전혀 없었으며, 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나마 고교시절 이소룡이 홍콩의 복싱 대회에 출전하여 14세의 개리 엘름스[12]를 결승에서 3라운드에서 녹아웃으로 이겨 우승한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의 기록으로는 이소룡이 최강, 혹은 그에 준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진 않는다.
이소룡이 유명한 이유는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자신만의 격투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상을 통해 현대 격투의 토대를 배우로써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식시킨 결과가 되었다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이소룡 자신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소룡이 그런 토대를 최초로 만들거나 혼자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이소룡은 영화를 통해 이를 대중적으로 널리 퍼뜨렸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어떤 무술가도, 그 어떤 격투기 스포츠 선수도 이소룡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소룡은 후반으로 갈수록 현대 격투기보다 중국의 무술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복싱, 유도, 태권도를 배웠던 그의 젊은 시절과 대비되는 이야기다. 재밌는 건 중국 무술계의 반응인데, 정작 그들은 절권도를 호신술로 평가했지 무술로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중화사상 때문에 분위기가 다르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러한 풍토가 남아 있었을 정도. 그래도 이소룡이 가진 기본적인 무술에 대한 아이덴티티는 전통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전통권을 어떻게 하면 고도로 도시화한 현대사회에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만한 형태가 될 것인가 대해서 고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고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즉, 이소룡의 성공과 절권도의 탄생은 복잡한 기교와 훈련과정을 가급적 생략하고 보다 직관적인 형태의 무술을 추구한 영춘권 엽문 노사의 방향성과, 필요한 것이라면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며 현대사회에서 중국무술이 대중들과 어떻게 나가야하는지 고민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4. MMA와의 관계
이소룡의 유명세와 후대의 평가 작업과 자료 공개를 통해 그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이지, 이소룡 이전부터 MMA의 토대를 구축했던 무술가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그를 'MMA의 아버지'로 보기는 어렵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소룡이 아닌 그런 선구자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서 현대 격투기가 꽃을 피웠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 격투와 실전을 치르며, 실제 무술가와 무술, 격투계에 여러 영향을 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다만 이소룡과 그들은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달랐을 뿐이다. 물론 이소룡이 그들 중 몇몇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 주장의 큰 근거는 데이나 화이트 같은 UFC 관련 인물들이 이소룡을 현대격투기의 아버지라고 간간히 코멘트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북미(北美) 등지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홍보효과를 위해 그를 언급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UFC 등이 주류에 남기 위해 벌이는 악전고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이소룡이 그 모든 토대를 만든 건 아니지만, 이소룡 덕분에 일반인들이 그런 격투기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그 공이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K-1이나 프라이드, UFC 등이 방송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근데 이소룡이 죽은 것은 1973년이다. 20년도 더 지난 후에 그의 업적이 꽃을 피웠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전술(前述)했듯, 현대 이종격투기와 비슷한 경기나 대회 등은 이소룡 이전에도 세계 곳곳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봤을때도 북미 MMA 시작은 호리온 그레이시가 주짓수를 홍보하기 위해 UFC를 연 것이 시작이고 일본의 경우 실전 지향 프로레슬링이 그 시작이다.
5. 웨이트 트레이닝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 이미 실제 시합에서의 강함으로 전 세계에 유명했던 최영의의 경우 벤치 프레스나 스쿼트(squat) 등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단련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실제 극진공수도에서는 승단 심사에서 100~120kg 벤치 프레스가 포함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그에비해 이소룡은 영화배우로 워낙 유명해졌기에 그의 사후(死後) 상업주의 열풍 덕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접목한 그의 훈련법을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즉, 이소룡을 웨이트 트레이닝의 선구자로 보기는 힘들다.1960년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분야였던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소룡이 무술 훈련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적어도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의 몸은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선망하는 멋진 몸의 좋은 예로 꼽히며, 보디빌더들 중 이소룡의 몸에 감명 받아 보디빌딩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놀드 슈워제네거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 널리 퍼졌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오이겐 산도프(Eugen Sandow: 1867~1925)가 중량을 이용한 훈련을 정립하여 보급한 것이 1880~90년대였다. 보디빌더 문서와 오이겐의 문서 참조. 당시 《유진 샌도우의 아령 교범》 같은 팸플릿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당시 많은 청년들이 이 교재를 보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독일(당시 프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초빙되어 간 그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선망과 흠모의 대상이 된 때가 1890년대이다. 여성들에게는 현대의 팝스타나 영화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인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회사를 차리고 체육관도 만들었다. 그리고 보디빌딩 잡지까지 만든 것이 1898년이다. 1901년, 런던에서 그는 보디빌딩 대회를 주최했으며, 그 대회의 심사위원으로는 코난 도일까지 초청되었다. 1911년에는 영국 국왕의 체육 특별코치로 위촉될 정도의 명성을 누렸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보디빌딩 대회라는 ‘미스터 올림피아’ 수상트로피가 그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정도이다. 참고 그리고 그의 저술 일부는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다.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발굴했고,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를 출범시켰으며, 《머슬 앤드 피트니스 앤드 플렉스》 등 보디빌딩 관련 출판물도 다수 창간했던 조 와이더(혹은 웨이더 Joe Weider 1920~2013)가 국제보디빌딩연맹을 창설한 것이 1946년이다.
이소룡은 기교와 형식에 빠져 기본적인 신체단련을 게을리 하는 전통무술가들에게 몸을 가꾸라며 질타한 적도 있으나, 그렇다고 전통무술에서는 근력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근육과 단단한 골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체를 단련한 사람들의 필수요소였고, 엉터리들을 제외한, 정통의 무술문파 대부분에는 석쇄공(石鎖功), 천근력(千斤力), 석련공(石練功/石鍊功), 석단공(石担功) 등등 이름은 문파마다 다르지만, 3~40kg 정도 되는 역기를 한 팔로 들고 이리저리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기본 단계에서 통과해야만 하거나, 각종 웨이트 트레이닝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훈련법을 정말 지독하게 반복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현대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피스톨이라고도 하는 훈련법은 단각굴신(單脚屈伸) 등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동양무술의 필수 수련법이었다. 또한 현대의 코어 트레이닝 어쩌고 하는 훈련법들도 표현의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대부분의 전통무술에서도 중요하게 여겼던 원리들과 상통한다.
실제 제대로 된 정통 문파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13] 다만 동양무술 열풍에 편승한 사이비들과, 편하게 강해지려고 하는 수련생들이 결합되어 이런 단련법이 누락되어 전해지는 등 크게 왜곡된 탓이다.
사실 현대에도 근육이 있으면 몸이 둔해져서 싸움을 못한다는 개드립을 치는 무술가가 적지 않은 판이다. 근육이 많으면 많을수록 몸은 둔해지기는커녕 더 빨라진다.[14]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근력이다. 근육이 붙으면 몸이 둔해진다는 말은 아무래도 격투가들이 증량하면 속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보디빌더처럼 둔해 보이는 근육덩어리들을 보고 나온 얘기인 듯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이미 적당한 근육이 있는 파이터들이 적정수준 이상의 근육을 키워서 그런 것이지, 비실한 일반인 입장에선 적당하고 탄탄한 근육을 갖게 되면 속도가 증가한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등 뒤의 검집에서 칼도 못 뽑을 정도로 근육량이 많으면 좀 곤란하겠지만[15] 그런 경우에서조차도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약간의 유연성, 지구력, 스테미너다. 헤비급 중에서도 평체가 110kg대인 선수와 120kg를 딱 맞춰서 계체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평체가 110kg대인 선수들이 무리하게 증량해서 평체를 130kg대에 맞춰서 경기에 나오면, 가장 눈에 띄는 게 체력저하와 몸이 뻣뻣해지는 거다. 이렇게 체급을 맞추려고 단기간에 약물등으로 근육을 키우는 경우나 문제가 되지, 일반적으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다.
실제 《코만도》 영화를 찍을 때, 겉보기와 달리 매우 빠른 아놀드의 움직임을 보고 스탭들이 다들 놀랐다 한다. 그리고 무술가라고 하기에는, 근육은커녕 지방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아 보이는데도 유연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준, '날아다니는 돈까스'의 원조 홍금보나,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듯한 보디빌더형 근육으로, '중국의 헤라클레스'라는 영화 제목 겸 별명까지 얻은 볼로 영 같은 무술가들이 좋은 예이다.
이소룡은 근력을 키우기 위해 당시로서는 꽤나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벌크업을 포기한 이후로는 자신의 몸무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근육의 강함을 키우는 방법을 연구했고, 자신이 최적의 수행능력을 낼 수 있는 몸무게라고 판단한 61kg 정도의 몸무게를 항상 유지했다. 특히 왜소한 체격의 한계를 메꾸기 위해 등 근육과 팔근육 등의 강화에 집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단백질 가루나 비타민제 같은 게 거의 없어서, 일일이 여러 가지 재료를 먹어보며 그 효과를 실험했는데, 그의 중국인 친구들은 그가 집에서 생고기와 계란 등을 갈아서 먹는 걸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과일이나 한의학에서 쓰는 약초 등을 섞기도 했다고 하는데, 린다 부인은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서 입에 대지도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근육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법도 시도했는데, 이를 후에 북미에서 손상된 근육을 회복시키는 치료법으로 쓰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소룡 이전에도 비슷한 방법이 있었고, 이소룡 역시 의료계에서 논의되고 사용되던 방법 등을 보고, 이를 응용하여 자신의 몸에 실험해본 것이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서 주장하면 곤란하다. 여하간 자신의 육체능력 향상을 위해, 당시 보통 사람은 잘 안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꽤 겪었다고도 한다.
이소룡의 근원섬유 밀도가 일반인보다는 많이, 취미로 운동하거나 무술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높았을 가능성은 있다. 사실 파워리프터나 그리퍼, 스트롱맨, 역도선수 등이 행하는 근력 위주의 훈련은 근형질보다 근원섬유와 근신경을 발달시키므로, 근비대 위주의 보디빌더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더 작은 크기의 근육으로도 더 강한 근력을 낸다. 최상급 선수들이 지방을 찌우는 것은, 그들이 다루는 중량의 시합에서는 추가된 지방의 무게로 인한 페널티보다, 지방의 부피로 인해 생기는 역학적(力學的) 이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발달한 근육 위에 지방을 찌워 근육이 커보일 수 있지만 결국 지방을 찌운 것이다. 스트렝스 스포츠 선수들은 근비대훈련을 전혀 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렇다. 상술(上述)했듯, 이소룡 이전에도 보디빌더는 존재했고, 전통무술가들도 형태가 다를 뿐 근력운동을 했다. 이소룡이 최초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입했다거나 크게 발전시켰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동양무술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질적으로 보던 북미지역의 대중에게, 그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닌, 상호조화적인 관계라는 것이, 이소룡의 유명세로 인해 비교적 잘 알려졌다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소룡 본인도 격투가로서 체급의 한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주 언급되는 가상의 매치업인 '알리 vs 이소룡'을 직접 질문받자 이소룡 본인이 알리랑 자기가 싸우면 체급 차가 너무 커서 알리한테 죽을 수도 있다고 서슴없이 인정한 바 있다. 이소룡이 근육량과 체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불리지 않은 이유는 (타고난 거구의 무술가들에 비하여) 작은 자신의 체구에는 비교적 경량의 체급의 몸이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가벼운 몸을 최대의 효율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서 그 한계를 메꾸려 했다. 벌크업을 하던 시절 75kg이나 나갔었던 자신의 체중을 62kg으로 대폭 줄인 것도 이러한 이유다.
이소룡이 무언가에서 최강이거나 최초이거나 아닐수도 있지만, 거기에 매달리기 보단 '자신에게 가장 맞는 몸을 만들고,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몸을 가장 실용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으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소룡이라는 한 무술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일이 될것이다. 결론은 이소룡이 웨이트 트레이닝의 선구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동양무술가 중에는 거의 최초로 펑셔널 트레이닝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는 것이다.
6. 무술의 대중화에 끼친 영향
"이소룡은 현대 종합 격투기의 기초를 만든 사람으로, 이 세계에서 (종합격투기에서) 이소룡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 UFC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브라이언 헤이즈
- UFC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브라이언 헤이즈
위에 많은 부분에서 찬반의 여지가 있으나 이소룡의 가장 큰 진가는 무술 특히 중국형 무술같이 화려한 액션을 영화에 적극 차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소룡의 대히트작 《용쟁호투》 이후부터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고 무술의 대중화를 촉진시킨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이는 영화 등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왕우(王羽)의 《용호투(龍虎鬪)》(1970)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우가 영화 속에서 사용한 단련도구들과 비슷한 것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무술도장에 입문문의가 쇄도했었다. 성룡의 《취권(醉拳)》(1978)이 그야말로 기록적인 대박을 기록했을 때는 한국,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 취권을 배우겠다며 중국무술도장이 북새통이 되었었고, 한국에서는 성룡에게 취권을 가르친 고수라고 알려진 대만의 무술가, 장극치(張克治)를 초빙, 시범공연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용비운(龍飛雲, 1955~2007)[16]이라는 무술가가 취권을 내세워 돈을 벌고,[17] 무술 서적도 출판했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를 그의 무술 실력 하나로 세운 업적이라고 하기엔 무리다. 사실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기 전부터 TV 영화, 드라마 제작사 등과 접촉하며 무술을 내세워 자기 홍보에 적극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배우로서 홍보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도 말하길, 미국에 있을 때는 연줄을 만들고 여러 곳에서 무술 실력을 내세워 홍보하며, 할리우드 영화, TV 등에 출연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력 끝에 만든 연줄을 통해, 《그린 호넷》뿐 아니라 TV 토크 쇼나 드라마의 게스트 출연 등의 기회를 잡고 무술 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은, 이소룡은 무술을 통해 단순히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소룡의 업적을 따질 때 그의 육체전 강함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와 선구적 면모에 무게가 실리는 게 이러한 이유이다.
더구나 위의 영상처럼 중국 무술을 포함한 전통 무술[18][19]들은 과거 집단 병장기 싸움에 촛점을 두어서 길거리 등에서 벌어지는 맨손 격투 상황에서 현대 무술에 비해 불리한 경우가 많았으며, 수련이 복잡하고 실제 격투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전통 무술의 대련이라는 것은 초식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지 격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소룡은 처음에 절권도를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으로 부르려 했을 정도로 그런 전통 무술들과 거리가 먼 실전 격투의 노선을 택했다. 또한 복싱 등의 서구 무술은 불한당들이 깡패 짓하면서 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는데, 그가 30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던 무술은 공교롭게도 복싱이었다.
이소룡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무술 체계를 제기하여 무술이 대중에게 쉽게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사실, 이소룡은 전통적 무술이 난장판이 되기 쉬운 길거리 싸움에는 불리하다는 의견이었기에, 그런 혼잡한 상황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무술 체계를 원했고, 그 결과가 절권도라고 전해진다. 시각에 따라선 이소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가 최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술이 전파되어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최강이 되는 것보다 모두가 최강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함으로써 불멸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에서도 그를 진정한 무술가로 칭송하는 이들도 많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눈을 뜬 중국인들이, 돈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가져다 써먹다가 이소룡까지 써먹기에 이르렀다는 게 더 정확하다. 중국에서 이소룡은 마약에 중독된 불량배 정도로 백안시(白眼視)된 적도 있었고, 문화대혁명으로 무술과 무술가들을 완전히 개발살냈으면서도 지금은 무협소설과 무협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술문파인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蛾眉派) 등등을 만들어 무술 흉내를 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수련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무슨무슨 코스 해서 제자로 받거나 하며 돈을 버는 게 현실이다. 일부 기업이나 무술인들이 하는 짓이 아니라, 중국 정부, 혹은 정부가 내세운 기업들이 뒤에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돈벌이의 원조는, 밥 짓던 스님과 늙어서 어디 갈 데도 없는 스님들까지 포함해 단 4명만 남았고, 건물은 다 무너졌던 소림사(少林寺)를 중국 정부가 눈독을 들여 모조리 개축한 후, 은퇴한 우슈 선수, 이연걸을 주연으로 《소림사》(1982)를 만들어 짭짤한 재미[20]를 본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실제로 소림사의 방장(方丈)으로서 'CEO 주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석영신(釋永信, Shì yǒngxìn)은 초기에 자신과 중국 정부의 연줄을 이용해 소림사 주변에서 그 이전까지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돈을 벌던 무술관, 기념품, 서적 판매상 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이 허가해준 것 외에는 자리 잡지 못하게 했었다. 그리고 다양한 수련 과정, 체험 코스 등에 많은 외국인들과 수련생들을 끌어들여 많은 돈을 벌었다.[21]
[1] 이소룡 이전 미야모토 무사시와 최영의도 이미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2] 당연하다. 이소룡 본인의 저술도 아닌, 이소룡 사후, 이소룡 생전의 발언들을 수집하고, 그의 유품 등에서 나온 정리노트 등을 짜깁기한 것이고, 검색해보면, 필진(筆陣)들 중 동양철학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3] 자주 언급되는 롱 비치(Long Beach) 국제 가라테 대회에서의 이소룡 관련자료 역시, 이소룡 사후, 할리우드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4] 신기혁, 신인섭, 2012, 《미국 광고사(A History of Advertising in America)》, 한국학술정보(주), pp.163~164[5] History Special: 《How Bruce Lee changed the World》[6] 기사가 《기타를 잘 연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7] 실재로 슈워제네거는 정치에 입문하기 충분할 정도로 의외로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다.[8] 이소룡이 유달리 몸 만들기를 강조하고, 그것을 스스로 실험한 것도 무슨 무술을 배우기 이전에 강한 몸이 먼저라는 무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반증이다.[9] 선수로 참가하여 우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소룡은 시범자로서 참가하여 대련시범과 원 인치 펀치, 여러 기술 등을 공연한 것이지, 실제 시합을 한 것이 아니다.[10] 중국에서는 서로 합(合)을 맞춰 영화의 격투처럼 짜 맞춘 것도 대련이라고 하는 것에 주의. 물론 용어 개정(ex》 품세(品勢)→(순우리말)품새) 이전의 태권도에도 약속대련이란 말이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약속대련과 (승부를 내는) 대련은 구별하였다. 반면 중국은 승부를 가르는 겨루기는 예전에는 비무(比武), 비새(比賽)도 썼지만, 무술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로는 산타(散打)로 굳어지는 추세이다 중국의 우슈 대회에서는 마치 영화처럼, 얼마나 멋있고 그럴 듯하게 연출했냐를 평가하여, 10점 만점에 몇 점 하는 식으로 채점하는 경기를 대련(对练/對練, sparring set, sparring form)이라고 한다.[11] 1960년대 유명 헤비급 챔피언은 무하마드 알리.[12] 여러복싱대회 세차례 우승자로 알려져 있다.[13] 1970~80년대 국내의 쿵푸도장에서 수련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리가 앞뒤, 좌우로 완전히 벌어지고, 팔굽혀펴기 100개, 턱걸이 2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 정도를 해내지 못하면, 기술을 전혀 가르쳐주려고도 않는 도장이 흔했다고 한다. 승급자, 승단 심사에서도 체력심사는 필수였다고.[14] 근육의 구성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을 수도 있다. 근비대 위주 훈련으로 근형질이 커지고 근원섬유의 발달이 적다면 상대적으로 둔해진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했을 때보다는 빨라진다. 단적인 예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 중 하나인 우사인 볼트 등의 단거리 스프린터들만 봐도 하체 근육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해있다. NBA 선수들이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는 이유도 이들 선수들의 근육 때문이다.[15] 아놀드 슈워제네거 본인이 이 얘기는 사실이 아님을 해명했다. 다른 경우는 징맨으로 유명한 황철순은 켠김에 왕까지 방송에서 자기 등을 긁지 못한다는 걸 증명했었다.[16] 본명 후지타 토쿠아키(藤田徳明). 용비운은 일종의 링네임 같은 개념. 정룡회중국권법도장(精龍會中國拳法道場)의 지도자로서, 실전무술을 모토로 일본 내의 중국권법 보급에 힘썼다. 51세의 나이로 신장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기공(氣功), 사권(蛇拳), 비종권(秘宗拳), 취팔선권(酔八仙拳), 양식태극권(楊式太極拳), 병장기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투룡비새(闘龍比賽)라는 이른바 풀 컨택트 쿵푸대회를 장기간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었다. 일본 내의 중국권법 저변 확대에 대한 공헌은 상당했지만, 정작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 예로, 《링의 혼(リングの魂)》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마련한 용비운의 문하생 3명과 극진공수도 선수 3명의 대결은 0:3으로 용비운 측의 참패였다. 다만, 대결이 극진 룰로 개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영상 보기[17] 취팔선권(醉八仙拳)을 표방하고 있는데, 성룡의 취권을 도입한 동작이 많이 보인다. 이는 본인이 정식으로 수련한 권법도 있지만 책만 보고 연구한 권법도 많고, 부족한 부분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완한 것 때문에 생기는 일로, 사권의 경우에는 자료가 적어서 크리스티의 움직임까지 도입했다고 한다.[18] 다만, 위의 영상에서는 당시에는 안면 타격 연습을 별로 하지 않았던 극진 측의 주요 선수들이 동시대 복싱/무에타이의 펀치 테크닉에 한참 못 미치는 태기권 권사들의 수기에 얼굴을 몇 번 얻어맞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극진공수도의 풀 컨택트 룰에서는 손으로 하는 안면 타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19] 첫 번째로 등장하는 극진 측 인물이 천재 가라테카로 이름을 떨쳐 훗날 극진회관 2대 관장 자리까지 오른 마쓰이 쇼케이(문장규)다.[20] 추정제작비 120만 위안, 중국 내 흥행 1억 3,600만 위안, 홍콩에서는 1,615만 홍콩달러를 벌어, 성룡의 《사제출마》가 갖고 있던 흥행최고기록, 1,102만 홍콩달러를 갱신했다.[21] 이런 과정 같은 게 궁금한 분들은 SBS에서 방영한 《주먹쥐고 소림사》를 참조하자. 남소림사 역시 이런 과정에서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