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 ||||||
GBE | |||||||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 리들리 스콧(2024) | |||||
KBE | |||||||
프레더릭 벤팅 (1934) | 에드먼드 힐러리 (1953) | 게오르그 솔티 (1971) |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 찰리 채플린 (1975) | 앨프리드 히치콕 (1980) | 밥 호프 (1998) | |
앤드루 와일스 (2000) | 로저 무어 (2003) | 팀 버너스리 (2004) | 조너선 아이브 (2012) | ||||
Knight Bachelor | |||||||
아이작 뉴턴 (1705) | 찰스 라이엘 (1848) | 찰스 휘트스톤 (1868) | 조지프 리스터 (1883) | 아서 코난 도일 (1902) | W. S. 길버트 (1907) | 프랜시스 골턴 (1909) | |
핼퍼드 매킨더 (1920) |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 오언 리처드슨 (1939) | 알렉산더 플레밍 (1944) | 랠프 리처드슨 (1947) | 로런스 올리비에 (1947) | |
존 길구드 (1953) | 칼 포퍼 (1965) | 알프 램지 (1967) | 쉬리다스 람팔 (1970) | 제임스 블랙 (1981) | 마이클 아티야 (1983) |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 |
렉스 해리슨 (1989) | V. S. 나이폴 (1990) | 더크 보가드 (1992) | 로저 펜로즈 (1994) | 팀 라이스 (1994) | 캐머런 매킨토시 (1996) | 마이클 스타우트 (1998) | |
폴 너스 (1999) | 리처드 브랜슨 (2000) | 숀 코너리 (2000) | 톰 커트니 (2001) | 믹 재거 (2002) | 벤 킹슬리 (2002) | 리들리 스콧 (2003) | |
조너선 색스 (2005) | 헨리 세실 (2011) | 케네스 브래너 (2012) | 안드레 가임 (2012) |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 패트릭 헤드 (2015) | 마크 라일랜스 (2017) | |
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 톰 무어 (2020) | 마이클 호턴 (2021) | 마틴 에이미스 (2023) | ||||
CBE + Knight Bachelor | |||||||
데이비드 린 (1953)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 알렉 기네스 (1959) | 스탠리 매튜스 (1965) | 맷 버스비 (1968) | 알렉 이시고니스 (1969) |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 |
리처드 애튼버러 (1976) | 존 밀스 (1976) | 월터 윈터보텀 (1978) |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 윌리엄 골딩 (1988) | 피터 유스티노프 (1990) | 이안 맥켈런 (1991) | |
안소니 홉킨스 (1993) | 데릭 제이코비 (1994) | 바비 찰튼 (1994) | 사이먼 래틀 (1994) | 조지 마틴 (1996) | 마이클 갬본 (1998) | 아서 C. 클라크 (1998) | |
엘튼 존 (1998) | 이안 홈 (1998) |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 톰 피니 (1998) | 나이젤 호손 (1999) | 알렉스 퍼거슨 (1999) | 프랭크 윌리엄스 (1999) | |
마이클 케인 (2000) | 폴 스미스 (2000) | 바비 롭슨 (2002) | 앨런 파커 (2002) | 앨런 베이츠 (2003) | 그레고리 윈터 (2004) | 트레버 브루킹 (2004) | |
제임스 다이슨 (2007) | 크리스토퍼 리 (2009) | 브래들리 위긴스 (2013) | 존 허트 (2015) | 칼 젠킨스 (2015) | 로드 스튜어트 (2016) | 레이 데이비스 (2017) | |
빌리 코놀리 (2017) | 배리 깁 (2018) | 마이클 페일린 (2019) | 데이비드 수셰이 (2020) | 샘 멘데스 (2020) | 스티브 맥퀸 (2020) | 로저 디킨스 (2021) | |
조너선 프라이스 (2021) | 존 부어만 (2022) | 브라이언 메이 (2023) | |||||
OBE + Knight Bachelor | |||||||
어니스트 섀클턴 (1909) | 윌리엄 브래그 (1941) | 리처드 돌 (1971) | 잭 브라밤 (1978) | 지미 새빌 (1990) | 클리프 리처드 (1995) | 트레버 맥도날드 (1999) | |
스털링 모스 (2000) | 재키 스튜어트 (2001) | 톰 존스 (2006) | 테리 프래쳇 (2009) | 패트릭 스튜어트 (2010) | 밴 모리슨 (2015) | 앤디 머리 (2017) | |
가즈오 이시구로 (2018) | 마이클 모퍼고 (2018) | ||||||
MBE + Knight Bachelor | |||||||
폴 매카트니 (1997) | 제프 허스트 (1998) | 나이젤 쇼트 (1999) | 니콜라스 윈턴 (2003) | 닉 팔도 (2009) | 링고 스타 (2018) | 케니 달글리시 (2018) | |
루이스 해밀턴 (2021) |
<colbgcolor=#000><colcolor=#fff> KStJ[1] DL[2] 아서 코난 도일 경 Sir[3] Arthur Conan Doyle | |||
본명 | 아서 이그네이셔스 코난 도일 Arthur Ignatius Conan Doyle[4] | ||
출생 | 1859년 5월 22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든버러 | |||
사망 | 1930년 7월 7일 (향년 71세) | ||
영국 잉글랜드 서식스 주 크라우버러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안과의사, 칼럼니스트, 작가, 탐정[5], 정치인 | ||
분야 | 소설[6], 시[7], 희곡[8] | ||
장르 | 추리, 판타지, SF, 역사, 논픽션, 괴기, 호러, 밀리터리, 멜로, 오컬트, 모험 | ||
활동 | 1870년 ~ 1930년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신체 | 185cm | |
작위 | 기사 (1902년 서임) | ||
묘소 | 영국 에든버러 성모 마리아 대성당 | ||
학력 | 호더 플레이스 (졸업) 스토니허스트 칼리지 (졸업) 스텔라 마투티나 (졸업)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 / 학사) 에든버러 대학교 대학원 (의학 / 석사 · 박사) | ||
부모 | 아버지 찰스 알타몬트 도일 (1832~1893) 어머니 메리 조세핀 폴리 (1832~1920) | ||
형제자매 | 2남 7녀 중 셋째이자 장남 | ||
누나 아네트 (1856~1890) 누나 캐서린 (1858~1858) 여동생 메리 (1861~1863) 여동생 캐롤라인 (1866~1941) 여동생 콘스턴스[9] (1868~1924) 남동생 이네스 (1873~1919) 여동생 제인 (1875~1937) 여동생 브라이언 메리 (1877~1927) | |||
배우자 | 루이자 호킨스[10] (1885년 ~ 1906년, 사별) 진 레키[11] (1907년 결혼) | ||
자녀 | 장녀 메리 (1889~1976) 장남 킹슬리 (1892~1918) 차남 데니스 (1909~1955) 삼남 아드리안 (1910~1970) 차녀 레나 진 (1912~1997)[12] |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불가지론) | ||
소속 정당 | 자유통일당 | }}}}}}}}} |
[clearfix]
1. 개요
Steel True, Blade Straight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13]
영국의 기사작위를 받은 소설가이며 본업은 안과 의사. 잘 안 알려졌지만 시도 많이 썼고 수많은 칼럼을 쓴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13]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소설물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저자이며, 그밖에도 잃어버린 세계로 대표되는 챌린저 교수 시리즈[14]와 마라코트 심해 등의 근대 SF 와, <백의단(The White Company)>과 <제라르 준장(Brigadier Gerard)> 2부작 등의 역사 모험물을 비롯한 다양한 초창기 장르문학 작품들로 20세기의 대중문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짙은 색 머리를 가졌던 것이 확인되며 직접 만나본 당대인의 기록에 의하면 눈은 밝은 파란색이었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셜록 홈즈로 엄청난 원고료를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연극도 흥행했다. 코난 도일의 소설들은 1900년 이후 현재까지 영화로는 1200개 이상, 연극으로는 1893년 이후 1000개 이상의 작품으로 각색되었다. 아울러 1930년 이후로 라디오에서 현재까지 1000번 이상 각색되었으며 1888년부터 1965년까지 200개 이상의 모방 작품들이 출간됐을 만큼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출처.
2. 생애
2.1. 작가가 되기까지
젊은 시절의 코난 도일이다.
1859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으로 부친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의 후손인 잉글랜드인이었고 모친은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교도, 즉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15]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할아버지인 존 도일은 19세기 중반 유명한 시사 만화가에 아버지 찰스 엘터먼트 도일(1832~1893) 역시 그림을 그렸으나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 있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864년 코난 도일은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서 Newington Academy에 다니는 동안 친구의 이모인 메리 버튼과 함께 했다. 1867년에 가족들이 다시 모인다. 1868년 잉글랜드 랭커셔 스토니허스트에 있는 예수회 예비학교 호더 플레이스(Hodder Place)에 다녔다.
코난 도일은 어렸을 적부터 책벌레였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스토니 허스트 칼리지를 거쳐 1875년 오스트리아 펠트키르히의 예수회 학교 스텔라 마투티나(Stella Matutina)에 다녔다. 17세 때이던 1876년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이때 에든버러의 왕립 식물원에서 식물학을 공부했고 단편소설 The Haunted Grange of Goresthorpe를 블랙우드 매거진에 투고했으나 거절당하고 원고를 돌려받지 못했다.[16] 또한 이 시기에 서양 고전 문학과 영국 시인인 윌키 콜린스, 프랑스의 소설가인 에밀 가브리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17] 1877년 에든버러 병원의 외과 전문의이자 에든버러 의대의 병리학 교수인 조지프 벨(1837.12.2.~1911.10.4, 조셉 벨)의 제자 및 에든버러 병원의 서기로 활동했다. 벨은 몸이 마른 편이고, 회색눈으로 사람들을 쏘는 듯이 보고, 매부리코를 가졌다. 벨은 차트를 보기도 전에 환자들의 외양과 행동으로부터 그들의 내력 등을 해독해 병명을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벨은 수사 과학 자문을 맡았는데, 수사 과학은 관찰을 통해 알아내는 학문으로 심리학과 범죄학과 연관이 깊다. 또한 그는 법의학 연구에도 참여했다. 코난 도일은 그를 모델로 삼아 셜록 홈즈 시리즈의 셜록 홈즈[18]를 창조하였다. 벨은 자신이 셜록 홈즈 시리즈의 셜록 홈즈의 모티브인 것을 안다. 1892년 8월에 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일이 "선생님, 저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생님께 셜록 홈즈를 빚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되풀이하여 가르쳐 깨우쳐주신 추리와 추론과 관찰을 중심으로 주인공을 창조하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동년 12월 월간지 The Bookman에 벨이 쓴 '셜록 홈즈의 모험'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코난 도일에게 진단 관련을 가르쳐줬다고 썼다. 1924년 코난 도일은 자서전에서 "그런 인물(벨)을 연구한 후 내가 나중에 과학적인 이론을 세우려고 노력할 때 그의 방법을 사용하고 증폭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범인의 어리석음이 아닌, 자신의 장점으로 사건을 해결한 탐정."이라고 썼다.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조지프 벨과 셜록 홈즈 사이의 유사성을 알아차린 적이 있다.
1885년에는 진료하던 환자의 누나였으며 자신보다 2살 연상이었던 루이자 호킨스(1857~1906)와 결혼했다. 1889년에 첫째 딸인 메리가 태어났으며, 1892년에는 첫째 아들인 킹즐리가 태어난다. 도일과 루이자의 결혼 생활은 루이자가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가 끝내 사망한 1906년까지 지속된다. 이후 도일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15살 연하의 여성 진 레키(1874~1940)와 1907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1909년에 둘째 아들 데니스가, 1910년에는 셋째 아들 에이드리언, 1912년에는 둘째 딸이자 막내인 레나 진이 각각 태어나면서 모두 5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도일과 레키의 결혼 생활은 지속되다가 도일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1930년에 끝나게 된다. 도일과 레키의 셋째 아들인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은 존 딕슨 카와 함께 아버지 아서 코난 도일이 생전에 미처 다 투고하지 못한 미공개 단편들을 모아 본인이 아버지가 쓰다 만 미완성 원고를 마저 완성하여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The Exploits of Sherlock Holmes)" 라는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이 책은 셜로키언들과 그 외의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가가 좋았으며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880년 그린란드 포경선의 의사로 8개월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대학 졸업 뒤인 1881년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화물선의 의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아울러 1882년 플리머스라는 지역에서 동창과 함께 진료소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다툼이 잦아지면서 문을 닫았다.
의학 박사 취득 후 1882년에 포츠머스의 사우스시라는 지역에서 안과 병원을 개업해 일반의로 진료를 시작했지만 손님이 없었다. 얼마나 없었나면 이 당시 세무서로부터 수익 내역 관련 서류를 받자 "손님이 없어 한푼도 못 버는데 낼 돈이 어디 있나?"고 답장을 보냈는데 세무조사원이 직접 와서 조사한 끝에 인정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이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글을 남겨 사실로 인정받는다. 이때 의료 동료 중 제임스 왓슨이 있는데 셜록 홈즈 시리즈의 존 왓슨의 성씨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남아돌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셜록 홈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장편 주홍색 연구를 1887년, 두 번째 장편 네 개의 서명을 1890년에 출간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19] 그러던 중 당시에 출간을 준비하고 있던 영국의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의 편집장[20]의 눈에 띄어 셜록 홈즈 시리즈의 단편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때 상당한 원고료를 약속받자[21] 이후 도일은 본업이었던 안과 의사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1891년 안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친구 버넌 모리스가 추천한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빈에서는 독일어를 쓰기 때문에 의학용어가 달라서 6개월로 예정된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4개월 째일 때에 그만두고 남은 2개월 동안은 아내 루이자와 함께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거나 술을 마시는 등 다른 활동을 했다.
2.2. 셜록 홈즈의 등장과 퇴장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첫 번째 장편이었던 주홍색 연구는 1887년 11월에 비튼의 크리스마스 연감이라는 잡지에 실렸는데 원고료로 도일이 받은 돈은 25파운드밖에 되지 않았다.[22] 그리고 도일은 1890년 2월에 미국의 잡지인 리핀코트 월간지의 청탁을 받고 두 번째 장편인 네 개의 서명을 게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었지만 추리 소설 역사상 셜록 홈즈 시리즈가 지금과 같은 인기와 위상을 얻게 된 것은 1891년에 창간하여 1950년까지 발행되었던 영국의 월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의 편집장 헐버트 그린호프 스미스(1855~1935)의 권유로 같은 해 7월부터 해당 잡지에서 연재하기 시작했던 단편 12개를 정리하여 다음 해인 1892년에 출간한 첫 번째 단편 모음집인 셜록 홈즈의 모험 때문이었다. 사실 1891년 런던으로 이사하여 안과를 운영하던 도일은 이전까지 진료하는 환자가 별로 없는 의사였지만 단숨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유명 작가로 자리잡았으며 본업이었던 안과의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된다.코난 도일은 1894년 두 번째 단편 모음집인 셜록 홈즈의 회상록을 출간하면서 마지막 사건이라는 이야기를 통하여 셜록 홈즈의 숙적으로 설정된 제임스 모리어티 교수를 등장시킨 뒤 모리어티의 습격을 받은 홈즈가 스위스의 라이헨바흐 폭포 아래로 모리어티와 함께 추락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결말을 제시하며 마무리한다. 도일이 셜록 홈즈를 죽인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도일은 애초에 셜록 홈즈 시리즈보다는 역사 소설 등 진지한 소설로 인정을 받고 싶었는데 대중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셜록 홈즈 시리즈뿐이었다.[23] 물론 도일이 쓴 역사 소설 중에서도 그럭저럭 팔린 책은 있었으나 셜록 홈즈의 인기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추리 소설가를 꿈꾸지 않았던 도일이 계속해서 새 플롯을 짜내는 것 역시 힘든 일이었다. 결코 좋아서 쓴 것이 아닐뿐더러 단단히 질려버린 코난 도일은 아예 셜록 홈즈를 죽이기로 결정한다.[24] 결국 1894년 <마지막 사건>[25]을 통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종결시켜 많은 독자들로부터 비난과 아쉬움을 샀지만2.3. 돌아온 셜록 홈즈
1901년, 보어 전쟁(제2차)에 자원하여 군의관으로 일시적으로 복무한 뒤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수십 편 써내며 애국심을 진작시키고 외국 언론의 비난에 맞선다[27]. 1902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코난 도일 본인은 보어 전쟁에 대한 정당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수필인 <남아프리카의 전쟁: 원인과 행위(The War in South Africa: Its Cause and Conduct)>를 써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관보에는 서임된 이유(citation)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해당 연도에 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썼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 저자로서의 공헌도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처음에 코난 도일은 기사 작위를 받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설득에 의하여 기사 작위를 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인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홈즈는 기사 작위를 거부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비슷한 시기 셜록 홈즈의 부활을 원하는 독자들의 꾸준한(무려 7년 동안이나!) 항의와 요청에 못 이긴 코난 도일은 드디어 <바스커빌 가의 개>로 셜록 홈즈를 복귀시키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1903년에는 단편 여섯 개를 게재하는 대가로 5000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는 16년 전 출간한 주홍색 연구의 원고료보다 정확하게 200배나 많은 거액이었다. 도일은 나중에 단편 7개를 추가로 연재하여 1905년에 세 번째 단편 모음집인 셜록 홈즈의 귀환을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의 단편 모음집은 코난 도일의 잦은 휴재와 소재 고갈 등으로 실종 이전의 작품보다 전반적으로 구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다수이다.[28] 단, 후기 장편 <바스커빌 가의 개>와 <공포의 계곡>은 과거의 장편 <주홍색 연구>와 <네 개의 서명>을 능가한다는 평.[29]
푼돈벌이 겸 씹덕들 보라고 라노베나 써볼까. 표현이나 심리묘사는 농담에 가깝지만, 스레드에 언급된 일들은 진짜 코난 도일이 겪은 실화다. 물론 당시엔 라이트 노벨 같이 썼겠지만 지금은 문학적으로도 엄청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30]이니 농담으로 읽자. 더불어 상술했듯이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은 본업인 의사로서 진료하는 환자가 없어서일 뿐, 링크된 포스팅처럼 역사 소설이 안 팔려서가 아니다. 다만 작가로 전업한 후 셜록 홈즈 시리즈의 유명세에 가려 다른 작품이 묻힌 것은 사실이다.[31]
2.4. 말년의 코난
1906년에 2살 연상이었던 첫 부인 루이자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자, 코난 도일은 이미 부인의 투병기간 중에 가까워졌던 15살 연하의 여성 진 레키[32]와 1년 후 재혼한다. 단, 이를 두고 일방적으로 천하의 나쁜 놈처럼 매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국에도 출판된 코난 도일에 관련된 책 『코난 도일을 읽는 밤(On Conan Doyle: Or, The Whole Art of Storytelling)』의 저자 마이클 더다도 이 점에서는 도일을 옹호한다(106~107쪽). 아직 도일이 30대일 때 루이자가 당시로선 불치병인 폐결핵을 앓게 되자 도일은 10년동안 아내를 돌봐주었으며, 간병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 레키와 모텔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즐기거나 한 적은 없었고 그녀와 만날 때는 반드시 보호자를 대동했으며, 심지어 코난 도일의 어머니도 그런 보호자 중 하나였다. 즉, 그녀와의 교제는 가족들은 물론 도일의 어머니로부터도 사실상 인정을 받았던 것. 루이자 본인도 이들의 관계를 알았거나 최소한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딸 메리의 증언에 의하면, 루이자는 진 레키가 장차 메리의 새어머니가 될 것을 상정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사망을 두 달쯤 앞두고는 메리를 불러서 '자신이 죽고 나서도 배우자가 자신만을 두고두고 기리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생각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으며,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거든 놀라거나 충격받지 말고 어머니가 그것을 이해하고 축복한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당부도 했다고 한다. #재혼 이후 새 부인의 친정집 부근에서 이구아노돈의 화석이 발견되자 코난 도일은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관심이 후에 잃어버린 세계를 탄생시켰다. 이 무렵 한 사진전에도 참석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기아나 고지에 있는 테이블 산인 로라이마 산을 유럽 최초로 등정한 임 투른의 강연회였다. 코난 도일은 로라이마 산의 독특한 풍광에 감격해서 잃어버린 세계의 주된 배경으로 삼았다.[33]
부친 사망 후 보였던 심령론에 대한 관심은 첫 부인의 사망 후 점점 커져서 여러 심령술사를 후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당시 유명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 "당신의 탈출 기술이 몸을 에테르화하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34] 코난 도일의 요정 및 심령론과 관련된 활동은 첫째 아들 킹슬리를 비롯한 여러 주변 인물들이 사망하면서[35] 더욱 활발해져서 결국 1922년 코팅리 요정 사건[36]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정신 상태로 집필한 소설이 잃어버린 세계의 주연인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안개의 땅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화가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맘에 들었는지[37] 코난 도일이 심령술을 쓰는 영화가 기획되기도 했지만 몇 해째 제작 소식이 없다.
1927년 셜록 홈즈의 사건집을 끝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를 마무리한 뒤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관심도가 떨어지는 심령론이나 요정 관련 글들을 기고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코난 도일은 1930년 7월 7일 심령론에 대하여 연설하다가 발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은 두 번째 부인 진 레키에게 한 "당신 너무 멋져."(you are wonderful.)라고 한다. 사망 이틀 전에 "나는 수없이 모험을 했다. 이제 가장 크고 멋진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코난 도일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저택은 코난 도일이 세상을 떠난 뒤 더욱 유명해졌는데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1960년에 그 집에 새 주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에든버러 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코난 도일의 후학들이며 그 중 한 사람의 부친은 대학 시절 코난 도일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저택에서 코난 도일의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했으며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큰 노인이 집 안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코난 도일의 모습이었다. 그 유령은 빨간 표지에 검은 색 고무줄로 묶은 일기장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해인 1961년 여름에 유령을 쫓는 의식을 벌이고 나서야 더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있은 직후 도일 집안의 한 친척의 입을 통해서 코난 도일에게 정말로 빨간 가죽을 씌운 비밀 일기가 있었으며 그 일기장이 사라져버린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난 도일은 죽어서도 강령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소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1927년 코난 도일의 인터뷰 영상으로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노년에 접어든 코난 도일의 음색은 굵고 낮으며 어조도 상당히 느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작가로서
3.1. 추리 소설가
코난 도일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 의과대학을 재학하던 시기와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후 상선의 선의로 승선했을 때의 경험, 신문 기사[38] 등에서 나중에 셜록 홈즈 시리즈를 비롯한 많은 장르의 소설에 반영되는 인물과 사건에 관련한 영감을 얻었다. 홈즈는 그의 스승 중 하나이자 의사이면서 수사 과학의 선구자인 조지프 벨 교수와 그 외 몇몇 지인들의 성격을 합성하였고, 잃어버린 세계 등의 생물학 박사 챌린저 교수도 자신의 의과대학 시절 교수였던 러더포드 교수 등의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다.예외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존 왓슨은 사실상 코난 도일의 경험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39] 심지어 그의 가족사까지도 왓슨의 가족사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코난 도일의 부친이 알코올 의존증으로 사망한 것처럼 작중의 왓슨도 알코올 의존증으로 사망한 형이 있고, 똑같이 결혼도 두 번인 것으로 되어 있다.[40] 왓슨이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코난 도일의 경험이 반영된 것인데, 병원 경영이 좋지 않았던 코난 도일과 다르게 왓슨은 잘나가는 개업의인 걸로 묘사된다. 이는 코난 도일이 현실에서의 소망을 자신이 창작한 인물을 통하여 이루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역시 홈즈 옆에는 왓슨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메리 모스턴이 죽은 이후 왓슨이 좋은 값에 병원을 팔아버리고 홈즈의 옆에 와서 예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왓슨의 병원을 인수한 사람은 왓슨이 짐짓 높여 부른 값에서 한 푼도 깎지 않고 고스란히 다 내고 인수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홈즈의 친척이고, 돈을 댄 건 홈즈 본인이었다고.
셜록 홈즈 시리즈로 이전까지 소설로서의 위상이 불안정했던 탐정이 등장하는 형태의 추리 소설을 반석에 올려 놓았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포함해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셜록 홈즈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은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탐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범죄자와 맞서는 주인공을 영웅의 위치로 만든 것도 셜록 홈즈이다. 어찌 보면 현대 히어로물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셈. 더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3.2. 장르 소설
<잃어버린 세계>와 <마라코트 심해>등의 SF 작품들은 이후 다른 SF물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화 <킹콩>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도 <잃어버린 세계>와 연관이 있으며, 1933년에 개봉한 최초의 킹콩 영화는 아예 <잃어버린 세계(영화)> 에 사용된 소품을 그대로 재활용하여 만든 영화였다. 그 외에도 챌린저 교수 시리즈나 몇 개의 호러 단편, 추리 소설[41]은 팬덤과 문학계에서도 꽤 알아주는 반면[42] 노년기에 나름대로 강조하던 요정이나 심령론 관련 소설들은 그저 대작가의 한 때 실수로 묵살되는 상황이다. 21세기 들어서야 미국 및 유럽의 팬덤과 문학계에서 조심스럽게 재평가되는 분위기다.3.3. 시와 희곡
또한 소설가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 시리즈 등 생전에 258편의 소설을 집필한 것 이외에도 106편의 시를 정식으로 발표한 시인이기도 했다. 도일이 시를 처음으로 쓴 시기는 12세이던 1870년으로 해당 시의 제목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학생의 꿈이다. 도일은 이후 다양한 매체에 자신이 쓴 시를 게재했으며 그러한 활동은 1922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울러 정확한 발표 시점을 알 수 없는 3편의 시가 있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해당 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생전에 22편의 희곡을 정식으로 발표한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 경과 함께 공동 집필을 진행한 작품을 발표한 뒤 상연했다. 단독으로 얼룩 띠의 비밀 등의 셜록 홈즈 시리즈 작품들을 희곡으로 여러 차례 각색하여 발표했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이미 발표했던 소설 못지 않은 인기를 얻으면서 작가로서 더 많은 부와 명성을 만끽할 수 있었다.
4. 언론기고
코난 도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정리한 백과사전 사이트에 따르면 출처. 코난 도일이 집필 활동을 한 1870년부터 1930년까지 6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언론에 기고한 글의 수가 1091편에 이르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 언론들의 부적절한 논조를 공박.
- 이혼법 개정 협회 의장으로서 이혼 옹호 주장.
- 군인에게 방탄복을 입힐 것을 권고.
- 이 시기 흥미로운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예언했다는 것. 코난 도일과 U-보트 아이디어
- 벨기에가 콩고 자유국에서 행한 잔학행위에 대해, 맹렬히 비난.[43]
- 영국 사법부가 혼혈인 변호사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근거해 유죄 판결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여 사건을 직접 꼼꼼히 조사했다. 조사 끝에 재판부의 결정이 틀렸음을 확신하자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는 대중의 강한 관심을 끌어 결국 무고했던 피고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44]
- 심지어는 영불 해협의 해저 터널이 가져올 이익을 예측하기도 했다.
- 이 무렵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지역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쉽게도 낙선했다. 하지만 그가 쓴 칼럼만큼은 큰 반향을 얻어냈는데, 아일랜드에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결국 코난 도일의 생전인 1922년에 아일랜드는 자치권을 얻었으며, 사후 7년 뒤인 1937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뤄냈다.
- 첫째 아들 킹슬리의 죽음 이후 말년에 심취한 심령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기존 종교들과의 비교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코난 도일이 제기한 수많은 주장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한 게 이 정도이다. 가정, 정치, 사회, 군사, 경제, 사법, 언론, 국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5. 비화
- 코난 도일 본인은 말년에 심령론을 믿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인 셜록 홈즈는 미신을 절대 믿지 않고 냉철하게 행동하며 오히려 그런 미신에 매몰된 사람들을 비웃는 듯한 태도까지 보인다.[45] 창작물의 주인공은 그 작품을 만들어 낸 창작자의 사상이나 생각이 투영되기 마련인데,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의 핵심인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코난 도일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코난 도일의 개인적인 행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창작자라면 분명히 본받아 마땅한 프로의식이다.
- 글씨체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속필 작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수준이다. 또한 초인종이 울리는 순간 글쓰기를 멈추었다가, 방해의 요인이 사라지면 글을 끊었던 지점에서 즉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최종 원고에 수정 이력이 거의 없었다. 즉, 글을 예쁘고 빠르게 써내려가면서도 별도의 퇴고 과정 없이 거의 초고를 완성본으로 내놓은 엄청난 인간이었다.
- 동갑이던 영국 작가 제롬 K. 제롬(1859~1927)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도일은) 자기 집 거실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홀로 서재에 박혀 글을 쓰는 것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더 좋아했다. 어떤 때는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슨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서 우리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펜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 코난 도일은 환자가 거의 없는 시간을 활용하여 소설을 집필했는데, 포츠머스 사우스시 시절 구입해놓은 타자기는 제쳐두고 직접 손으로 원고를 썼다. 자신의 계산에 의하면 하루 작업량은 대략 3,000단어 정도였다[46]. 어쩌면 좀 과장된 분량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의뢰받은 원고 양을 감안하면 대체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코난 도일이 펜과 잉크만으로 오늘날의 작가들이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하는 속도를 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수치에는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손목 경련이나 반복성 피로감을 느끼지 않은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 위의 어마어마한 일화를 보충하자면, 코난 도일은 대체로 깨끗하게 필기하여 정서하는 작가로 자필 원고들 대부분에 다른 아이디어를 적어넣은 흔적이나 수정한 부분이 거의 없다. 즉,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써내고 별다른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출판한 것. 경악스럽게도 1891년 4월 1일 혹은 2일 런던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안과 사무실로 출근한 그날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에 착수하면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연작 세트 작업을 시작했는데, 코난 도일이 남긴 휴대용 수첩의 기록에 따르자면 "4월 3일 첫 번째 원고 발송, 4월 10일 신랑의 정체 완성, 4월 20일 「빨간 머리 연맹」 원고 송부, 4월 27일 보스콤 계곡 사건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1편이 통상 8,000단어였으므로, 불과 1개월도 안 되어 4편의 단편을 완성하는 무시무시한 집필 속도를 보여준 것. 심지어 그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역사 소설 3부작『망명자들-두 대륙 이야기』라는 책을 집필할 때 일주일에 50쪽을 완성하는 속도로 진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24시간 동안 1만 단어를 쓴 것이 된다. 여기에 더해 일주일 동안 4만 단어짜리 팸플릿을 2개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도일 자신의 기록에 따르자면, 분노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분노야말로 글쓰기에서 최고의 추동력이라고까지 했다.(이상의 언급은 마이클 더다의『코난 도일을 읽는 밤』125~126쪽에서 발췌했다.)[47]
- 코난 도일은 소설가이기 전에 굉장히 많은 책을 읽는 다독가로도 유명했는데 스스로 높게 평가하는 단편 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브렛 히트의 "로링 캠프의 행운"과 "테네시의 파트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모래 언덕 위의 별장", 러디어드 키플링의 "연대의 북 치는 소년들", "왕이 되려 한 사나이", 에드워드 블워-리턴의 "귀신들린 집과 유령들"이다. 또한 19세기 영국 소설 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세 편의 걸작을 골랐는데 윌리엄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찰스 리드의 "수도원과 화롯가" 그리고 조지 메러디스의 "리처드 페베럴의 시련"을 거론했다. 그 외에 조지 보로의 "리벵그로"를 칭찬했으며, 미국의 소설가인 워싱턴 어빙을 매우 칭찬하면서 "그라나다의 정복연대기"를 추천했다.(이상의 언급은 마이클 더다의 『코난 도일을 읽는 밤』115~117쪽에서 발췌.) 약간 거짓말을 보태면 당시에 출간된 웬만한 장, 단편소설들을 최소 한 번 이상은 읽어본 것이다. 그중엔 드라큘라도 있었고, 브램 스토커에게 책 감명 깊게 잘 읽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 1689.8.19- 1761.7.4)의 소설 "클라리사 할로(Clarissa Harlowe)"를 읽고 마치 현대의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매 장마다 폭죽을 터트리는 성급한 스타일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처음에는 지루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점차 그 분위기에 익숙해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고민거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중략) 왜 시간을 그토록 아까워하는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가? 당신의 마음에 영원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책 세 권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걸작을 읽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앞의 내용도 마이클 더다의『코난 도일을 읽는 밤』115~117쪽에서 발췌.) 다만, 이건 독자 입장도 이해해야 하는게 클라리사 할로는 영어원문으로 8권, 200자 원고지 16,492장 분량. 그것도 오직 1인칭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서간체 소설이다. 영문학과 교수와 학생들조차 논문쓸거 아니면 축약본을 찾는다.
- 잡지 굿 워즈(Good Words)에 멜로에 해당하는 장편 소설을 완성하여 보내달라는 청탁이 들어오자 코난 도일은 '도시 저편에'라는 제목의 멜로 소설을 하나 썼다. 해당 소설은 4만 2천개의 단어가 나오는 분량으로 원고료로 150달러를 받기로 했으며 청탁 후 3개월 후까지 소설을 보내주기로 했으나 코난 도일은 6주만에 작품을 완성시켰다. 다행히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다.[48]
- 코난 도일은 피터 팬의 작가 J. M. 배리와 아주 친했는데 그 둘은 공동으로 오페레타 가사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배리가 초안을 잡고 완성시킨 1막을 본 코난 도일은 "너무 진부하고 어설퍼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 후 1막 가사를 새로 쓰고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며, 악보 작곡가인 어니스트 포드와 함께 2막을 썼다. 여학교에 침입했다가 교장에게 쫓겨나는 두 젊은이의 위업을 다룬 그 오페레타의 제목은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으로 새롭고 독창적인 영국식 희가극이지만, 줄거리는 천박했고 가사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악은 무난했지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1893년 5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7주 동안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된 그 오페레타는 코난 도일과 배리의 최대 실수 중에 하나로 기록되었다.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고 비평가들은 무자비하게 작품을 비판했다. 아일랜드가 낳은 최강의 명언 제조기 조지 버나드 쇼는 잡지 월드에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라며 비판했는데[49], 그럴만하다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평이었다.
6. 탐정으로서
본인도 추리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듯 하다.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홈즈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라고 말한 적도 있다. 자기 오너캐는 왓슨이었지만 애초에 본인의 추리 능력이 없다면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을 자랑하는 기나긴 셜록 홈즈 시리즈 40년의 여정을 매끄럽게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피터 코스텔로의 <Conan Doyle Detective>라는 책에 따르면 코난 도일은 생전에 범죄 수사에 여러 번 협조하여 사건이 빠르게 해결되는 것에 기여했다고 한다. 소설에 서술하고 묘사한 수사법이 굉장히 획기적이었기 때문에 영국 경찰의 사건 수사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예를 들어 위 사진의 주인공인 조지 에달지(George Edalji, 1876~1953)라는 인도계 영국인[50] 남성이 야밤을 틈타 남의 가축들을 죽인 혐의로 기소를 당했는데,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범인으로 몰렸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해당 사건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뒤, 해당 인물은 시력이 나빠서 야간에 사건을 저지르는 게 불가능했다고 증명함으로써 그가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실종된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행방을 추리해낸 것 역시 코난 도일이다. 그녀의 차가 남겨진 곳이 기차역 근처라는 것을 보고, 그녀가 기차를 탔을거라고 추리해서 그녀가 내린 역을 유추해낸다. 3일 후 경찰은 애거서 크리스티를 그 역 근처의 마을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또 주변에 해자가 있는 저택에서 살해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용의자가 풀려날 상황이 되자 한 기자가 코난 도일에게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코난 도일은 "해자를 수색해야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해자가 너무 얕아서 수색 대상에서 제외하고 저택 주변을 조사했다. 후에 기자가 이를 형사에게 언급하고나서야 경찰은 해자를 수색해서 썩어가는 여인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코난 도일 경은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에도 개입한 바 있다. 오스카 슬레이터는 스코틀랜드의 오심 사건의 피해자다. 당시 만연했던 외국인 혐오증의 결과였고 코난 도일 경은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The Case of Oscar Slater)’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오스카 슬레이터의 본명은 오스카 레슈치너다. 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런던으로 이주해 출판업자로 일했다. 그 외에도 체육 교사, 치과 의사, 보석상인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판에서 경찰은 그를 갱스터, 조직 폭력배로 분류했다.
1908년에 오스카 슬레이터는 83세의 마리온 길크리스트를 죽인 혐의로 기소됐다. 밤에 잠든 이웃 마리온의 집에 침입해 그를 폭행하고 브로치를 훔치는 등 강도 행각을 했다는 것이다. 슬레이터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는 잘못된 증거 때문이었지만, 경찰은 계속해서 슬레이터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다.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코난 도일 경은 앞서 언급했듯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이라는 책을 1912년에 발간한다. 그 외에도 다수의 저명인이 오스카 슬레이터의 사면을 지지했다. 결국 스코틀랜드 법무장관은 오스카 슬레이터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면도날 잭 사건 때 경찰이 코난 도일에게도 의뢰했지만 그 역시 잡지는 못했다. 다만 잭 더 리퍼에 대해 추리를 했는데, 펜을 익숙하게 쓰는 걸로 보아 고등교육을 받았고 'fix it up' 등 당시 영국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어투를 쓰는 걸로 볼 때 미국 출신, 또는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일 거라고 추리했다. 그리고 잭 더 리퍼를 잡기 위해 신문에 편지를 공개해서 필체를 아는 사람들의 제보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건 꽤 말이 되는 의견이기는 하나 이미 편지는 공개된 상태였다. 후대에 미국 FBI의 프로파일러들 중 한 명이 필적을 공개하는 방법으로 연쇄살인범을 잡은 적 있다. 이 때문에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면도날 잭 사건을 소재로 활용하지 않았다. 작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해당 사건을 홈즈가 해결하게 했다가 혹시라도 그것이 틀렸다는게 밝혀지면 그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51] 공교롭게도 셜록 홈즈의 모티브가 된 조지프 벨도 경찰에 잭 더 리퍼의 분석을 제공한 적이 있다.
셜록 홈즈가 작품 내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추리력이 스스로 생각해도 과장이 심하다고 보았는지 홈즈와 같은 방식을 쓰지만 모조리 틀리는 허당 탐정 얘기를 쓰기도 했다.
셜록(BBC)의 주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실제 32촌 관계다.[52]
7. 역사 속 코난
- 코난 도일은 1900년 4월 2일(당시 42세) 보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블룸폰테인에 도착해 7월 6일까지 체류했는데, 블룸폰테인의 유명인사로 J. R. R. 톨킨이 있다. 부친인 아서 톨킨이 블룸폰테인 은행장으로 임명 받은 후 그곳에서 톨킨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아서 톨킨은 1897년 사망했고, 그 당시 J.R.R. 톨킨은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잠시 귀국해있었다가 부친을 잃은 뒤 어머니의 고향인 우스터셔로 갔기 때문에, 톨킨 가족과 코난 도일이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
- 1902년 10월 24일 버킹엄 궁전에서 에드워드 7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게 된 코난 도일은 강한 불만감을 드러냈다. 서임식 때 입어야 할 예복이 비쌀 뿐 아니라 "금실 견장과 뿔 달린 모자까지 있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한 것이다. 게다가 서임식 자체의 위엄도 전혀 없다며 불평했다.[53]
- 1899년 10월 23일 뉴욕주 북부 버펄로의 스타 극장에서 처음 상영한 연극 <셜록 홈즈>는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는 1902년 1월 30일, 63년 동안 재위하다가 사망한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를 마치고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앞에서 어전 공연으로 초연되었는데, 에드워드 7세는 홈지언이라 불릴 정도의 오타쿠였다.[54] 에드워드 7세는 연극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셜록 홈즈 역의 윌리엄 길레트를 귀빈석으로 초대해 그와 너무 오래도록 사담을 나누는 덕에 관객들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공연이 끝나자 길레트와 코난 도일이 관객 앞으로 나와서 쏟아지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 연극의 초연이 연극사에 기록된 이유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03년에 갓 열네 살이 된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 급사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찰리 채플린의 첫 번째 무대 연기였다.
(가운데가 피에트리 도란도, 왼쪽에 도란도를 부축하고 있는 인물이 코난 도일로 오해되어 많은 비난을 받았다.)
*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코난 도일은 마라톤 심판위원을 맡았다. 이 경기는 종래 40km 코스로 진행되던 마라톤이 출발점이 윈저 궁으로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2.195km 늘어나 42.195km로 진행한 최초의 대회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선두로 달리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1885~1942)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완전히 탈진해 쓰러져버렸다.(쓰러지기 직전 400m를 무려 10분에 걸쳐서 뛸 정도였다.) 그러나 코난 도일을 비롯한 심판진들이 몰려나와 도란도를 부축해 결승선에 도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인도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실은 2위로 추격하던 선수가 미국의 존 헤이즈[55]였기 때문에 양키가 우승하는게 거슬려서 그랬다는게 중론. 당연한 얘기지만 도란도는 실격당했다. 도란도는 울먹이며 왜 나를 실격하게 했냐고 분노했다. 사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실제 도란도를 부축한 사람은 코난 도일이 아니라 코난 도일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심판이었고 코난 도일은 도란도를 부축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신문기사에 나온 사진을 보고 코난 도일을 크게 비난했다고 한다. 코난 도일은 비록 자신이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심판진의 한 사람으로서 도란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비난을 받아드리고 도란도를 위한 모금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으며, 본국인 영국에서도 미안해서인지 영국 왕인 에드워드 7세는 특별 황금컵을 수여했으며 미국 작곡가 어빙 벌린(1888~1989)은 도란도야말로 승리자라며 도란도라는 음악을 작곡하여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1909년에 미국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나간 도란도는 헤이즈를 24초 차이로 제치고 우승하며 설욕했다.
*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코난 도일은 마라톤 심판위원을 맡았다. 이 경기는 종래 40km 코스로 진행되던 마라톤이 출발점이 윈저 궁으로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2.195km 늘어나 42.195km로 진행한 최초의 대회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선두로 달리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1885~1942)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완전히 탈진해 쓰러져버렸다.(쓰러지기 직전 400m를 무려 10분에 걸쳐서 뛸 정도였다.) 그러나 코난 도일을 비롯한 심판진들이 몰려나와 도란도를 부축해 결승선에 도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인도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실은 2위로 추격하던 선수가 미국의 존 헤이즈[55]였기 때문에 양키가 우승하는게 거슬려서 그랬다는게 중론. 당연한 얘기지만 도란도는 실격당했다. 도란도는 울먹이며 왜 나를 실격하게 했냐고 분노했다. 사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실제 도란도를 부축한 사람은 코난 도일이 아니라 코난 도일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심판이었고 코난 도일은 도란도를 부축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신문기사에 나온 사진을 보고 코난 도일을 크게 비난했다고 한다. 코난 도일은 비록 자신이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심판진의 한 사람으로서 도란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비난을 받아드리고 도란도를 위한 모금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으며, 본국인 영국에서도 미안해서인지 영국 왕인 에드워드 7세는 특별 황금컵을 수여했으며 미국 작곡가 어빙 벌린(1888~1989)은 도란도야말로 승리자라며 도란도라는 음악을 작곡하여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1909년에 미국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나간 도란도는 헤이즈를 24초 차이로 제치고 우승하며 설욕했다.
- 1911년에 코난 도일은 독일, 영국 등을 횡단하는 자동차 경주에 참가했으며 첫 비행에도 성공했다. 이후에도 도일은 스트랜드 매거진을 비롯한 다양한 잡지에 셜록 홈즈 시리즈 연재를 지속하면서 1915년에 마지막 장편인 공포의 계곡을 발표하고 1917년에 네 번째 단편 모음집인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를 발표하면서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첫째 아들 킹슬리가 사망하면서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아들의 사망은 도일이 심령론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심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일은 심령론의 신뢰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진행하고, 다양한 영국 언론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인터뷰를 자청했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어 1927년에 출간된 시리즈의 마지막 단편 모음집인 셜록 홈즈의 사건집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컬트적인 소재도 상당히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56] 그러나 작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은근슬쩍 작품에 투영하는 것과 달리, 셜록 홈즈 본인은 이성과 추리를 신봉하기 때문에 작중에 별의별 상황이 일어나도 오컬트를 무자비하게 까내리는 캐릭터란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8. 사생활
- 코난 도일이 직접 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언급돼 있다. 그가 아마추어 당구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 참가자들 중 누군가로부터 흔히 볼 수 있는 녹색 당구 초크가 든 상자를 선물받은 일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몇 달 동안 그 선물받은 초크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당구를 쳤다. 그런데 어느 날 초크로 큐 끝을 문지르다가 갑자기 초크가 안으로 함몰되었고, 이상해서 확인을 해 보니 초크 안은 비어 있었고 아르센 뤼팽이 셜록 홈즈에게라고 적힌 쪽지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 1930년 10월 7일, 영국 심령협회에서는 영매 아이린 가렛을 초청해 석달 전에 죽은 코난 도일의 영혼을 불러내기로 했는데, 나오라는 코난 도일은 나오지 않고 당시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행선 R101호 추락 사건의 비행선 선장 카마이켈 어윈의 영혼을 소환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비행선 R101호 추락 사건은 이 행사가 진행되기 사흘 전에 일어난 것으로 54명의 승객 가운데 6명만이 중화상을 입고 겨우 살았던 참사였다. 이 사건은 1987년 소년경향에서 별책 부록으로 준 세계의 괴담에서 실화라고 나오기도 했는데, 이 책자에 의하면 여자인 아이린 가렛의 입에서 나오던 목소리는 어윈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로 자신은 코난 도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윈의 동료들과 유족들은 그건 어윈의 목소리였다고 기겁했으며 녹음까지 해서 도일의 친척들에게 들려주었으나 그런 건 안 믿는다면서 무시당했다고 한다. 어쨌든 어윈의 목소리로 자신은 도일이라고 하던 그것(?)은 추락 사건의 원인과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 위조된 고인류의 두개골로 유명한 필트다운 인 사건의 실제 주모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공식적인 주모자는 도슨이지만, 발표 당시부터 영국의 위대성을 진화론적으로 증명했다고 여겨진 발굴이 실은 발굴자의 아마추어적인 위조품을 이용한 사기극이었다는 진상이 드러났기 때문에[57] 웬만한 고생물학자들이 많은 인사들을 대상으로 진범이라고 지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령 스티븐 제이 굴드는 테야르 드 샤르댕이 진범이라고 주장하기도. 물론 현대에 와서 코난 도일이 범인이라는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도일은 고고학이나 생물의 뼈를 이어 붙이는 접합 작업에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 제국주의를 찬성했는가 반대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찬성했다: 보어 전쟁을 옹호하고 직접 참전까지 했으며 이후인 1902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한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도일이 세포이 항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색인종에 대하여 홈즈가 평가한 내용의 일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 반대했다: 보어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보어전쟁, 특히 제2차 보어전쟁은 제국주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쟁이라기보단 가해자들끼리의 전쟁에 가까웠다.[58] 또한 코난 도일이 유난히 제국주의적 성향을 지녔다기 보다는, 지금은 비난을 받는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는 당연한 것처럼(백인의 의무 항목 참조.)인식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성이 있다. 실제로 도일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영국인 대부분이 제국주의에 호의적이었다. 공개적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59][60] 모리스 르블랑도 그렇고,[61]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허버트 조지 웰즈 같은 경우는 백인 우월주의까지 더 곁들어 노골적이었다.[62] 하지만 위에 나온 것처럼 아일랜드 독립에 찬성 하거나 누명을 쓴 인도계 영국인을 위해 투쟁한 것 등과 같이 오히려 제국주의와 반대되는 행동도 많이 했다.
- 코난 도일은 1902년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잉글랜드 남동쪽에 위치한 서리주의 부지사(Deputy Lieutenant)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지역의회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지만 낙선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래는 서리주 부지사 복장을 착용한 코난 도일의 모습이다.
<해당 단편이 수록된 책 표지>.
사진 출처: SWNS
- 2015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의하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셜록 홈즈 단편이 발견됐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월터 엘리엇이라는 남성이 자신의 집 다락방을 청소하다가 약 50년 전에 친구에게 얻은 책에서「셜록 홈즈: 추리에 의하여 보더 보그와 브리그 바자를 발견하다」(Sherlock Homes: Discovering the Border Burghs and, by deduction, the Brig Bazaar)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자세한 내용은 추리에 의하여 보더 보그와 브리그 바자를 발견하다 문서로.
- 예를 들어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을 소재로 하는 J. 하바쿡 제임스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콘힐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익명으로 투고하여 1884년 1월호에 실렸으나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
- IMDb에 따르면 코난 도일의 키는 185cm라고 한다. 코난 도일이 1859년에 태어난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체격인 것이다.
- 두 번의 결혼에서 다섯 명의 자녀[63]를 얻었지만, 다섯 명 모두 자녀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서 이그네이셔스 코난 도일의 직계 후손은 존재하지 않는다.
9. 매체
- 명탐정 코난: 에도가와 코난의 이름은 코난 도일에게서 온 것이다[64]. 코난의 정체인 쿠도 신이치의 한국 로컬라이징명인 "남도일" 역시 코난 도일에 대한 오마주. 23기 극장판 감청의 권에서는 괴도키드에 의해 싱가포르에 강제 밀입국 하게 되자, 현지인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가명을 쓰는데 하필 또 아서. 작가의 이름을 전부 활용하게 되었다.
- 스타트렉 시리즈에서는 스팍 중령의 외가 쪽 조상이 이 사람으로 나온다. 다만 코난 도일의 다섯 자녀들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코난 도일의 직계 후손은 남아있지 않으므로, 스팍 중령도 코난 도일의 직계 자손일 수는 없다. 아마 남동생이나 누이들을 통한 방계 후손일 것이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자녀와 관련해서, 코난의 두번째 부인이 코난의 유산을 자기 친자들에게만 물려주고자 전처의 자녀들이였던 메리와 킹슬리를 모함해서 코난과 의절하게 만들었고 메리와 킹슬리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단 한푼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서 여기저기 방황하며 어렵게 살다가 삶을 마감한 것으로 소개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메리와 킹슬리는 새엄마와 이복동생들과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복하게 살았고, 킹슬리가 군에 입대해서 전사한건 맞지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주장한 것처럼 아버지가 지원을 안해줘서 생활고 때문에 군에 자원한게 아니라 반대로 아버지의 지원으로 대학 병원에서 의학 연구 일을 하다가[65] 애국심 때문에 자원한 것이다. 코난 도일과 관련된 정보들을 종합한 아서 코난 도일 백과사전(The Arthur Conan Doyle Encyclopedia)의 메리와 킹슬리 관련 항목들을 보면 알겠지만 어려서 의절당했다는 서프라이즈의 주장과는 달리 성년이 되어서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사진을 찍은 메리, 군복을 입은 채로 이복동생들과 사진을 찍은 킹슬리 같이 전처 자녀들과 후처 자녀들간의 가족관계가 매우 화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들이 차고넘친다. 다만 전술하였듯 킹슬리가 전사하자 코난이 충격을 받고 강령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히려 코난 도일이 전처의 자녀들을 박해했다는 내용은 전세계에서 오직 한국쪽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서프라이즈 방영 이후부터 등장한 것들 뿐이다. 2010년대 중반 당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이런식으로 실제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가공의 소설을 만들어놓고는 역사적 진실인 척 방영했고, 심지어 2014년에는 이 내용이 아닌 다른 화에서 방통위에게 경고까지 먹기도 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믿으면 안 된다.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 DLC 끔찍한 범죄에 아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코난 도일은 1859년생, 작중 시점인 1868년에는 만 9세의 아동이었으며, 아티(Artie)라는 이름도 본명 아서(Arthur)의 애칭이다. 아티는 소설을 낼 때 '아티 코난 도일'이란 이름으로 내겠다고 했는데, 이비는 아서가 더 진지한 느낌이라 더 낫겠다고 조언해 준다. 후일 아티는 결국 이비의 조언대로 '아서 코난 도일'이란 이름으로 추리 소설을 출간하게 된다. 다만 선술했듯이 실제 코난 도일은 추리 소설가보다 대하 역사 소설 작가로 알려지길 원했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만 메가 히트를 쳐서 추리 소설가로 알려지게 되자 매우 불만스러워했었다. 그가 홈즈 시리즈에 가졌던 애정은 어떻게 해야 이 시리즈를 그만 쓸 수 있을지를 수시로 고민하며 일필휘지로 써내린 글을 퇴고 한 번 안 하고 그대로 출판사에 넘겨버리는 수준이었다. 또한 인게임에서 묘사되는 용모도 실제와는 차이가 있어서, 아티는 연한 금발에 검은 눈으로 그려지지만 선술했듯이 실제 아서 코난 도일은 흑백 사진으로도 짙은 색 머리카락에 밝은 파란색 눈을 가졌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생디칼리즘 국가가 된 영국에서 추방되어 캐나다 할리팩스에서 거주하다가 1930년에 사망했다.
- 흑집사: 아서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2014년 10월에 이 에피소드가 OVA로 나오는데 캐스팅된 성우는 아사누마 신타로. 이외에 마크 프로스트라는 작가의 '세븐(영제: The List Of Seven)'에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악의 제왕을 탄생시키려고 하는 어둠의 조직과 대결하며, 해당 조직을 막으려고 같이 행동한 잭 스파크를 모델로 해서 훗날 셜록 홈즈를 탄생시켰다는 설정이다.
- 성룡, 오웬 윌슨이 주연한 영화 상하이 나이츠에서 톰 피셔가 아서 코난 도일을 연기했다.
10. 작품 목록
- 셜록 홈즈 시리즈
- 셜록 홈즈: 추리에 의하여 보더 보그와 브리그 바자를 발견하다
- 마라코트 심해
- 잃어버린 세계(챌린저 교수 시리즈 1)
- J.하바쿡 제임스의 증언
- 제라르 준장의 위대한 업적 (단편집)
- 제라르 준장의 모험 (단편집) [66]
- 남아프리카의 전쟁: 원인과 행위(중수필)
- 클룸버의 미스터리
- 존 스미스 이야기
- 워털루 이야기
- 마이카 클라크
- 백의단
- 기억과 모험(자서전)
- 고리스도프의 귀신이 나오는 농가
- 사사싸 계곡의 미스터리
- 망명자들-두 대륙 이야기[67]
- 도시 저편에
- 고도 2만 미터의 괴물
- 오로라 호의 선장
- 안개의 땅(챌린저 교수 시리즈 2)
- 한 벵갈 호랑이의 이야기
- 주드킨의 비극
- 미국인 설화
- 결정타
- 존 베링턴 콜스
- 외과의사 가스터 펠
- 거들스톤의 회사
- 생리학자 아내
- 신사적인 조
- 에반젤린의 운명
- 작은 정사각형 상자
- 허무주의자의 하룻밤
- 육체미가 넘치는 남자
- 그 베테랑
- 우리의 더비 경마
- 내친구는 살인자
- 북극성의 선장
- 은도끼
- 신나는 크리스마스 이브
- 비극주의자들
- 마부의 이야기
- 유독 지대
- 물질 분해 장치
- 지구가 절규했을 때
- 가죽 깔때기
- 경매품 249호
- 유대의 흉패
- 검둥이 의사
- 사라진 특별열차
- 시계를 많이 가진 남자
- 딱정벌레 채집가
- 검은 상자의 비밀
- 위험!
11. 관련 문서
12. 외부 링크
- 아서 코난 도일 백과사전.
- 아서 코난 도일 문학 유산.
- 아서 코난 도일 영문 위키백과.
- 아서 코난 도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아서 코난 도일 IMDb.
- 네이버 캐스트 셜록 홈즈 시리즈.[68]
[1] 세인트존 훈장(Order of Saint John) 2등급 수훈자에 붙는 약자. 세인트존 훈장은 대영제국 훈장과 달리 2등급 이상을 받더라도 기사 칭호는 붙지 않는다. 코난 도일에게 'Sir'가 붙는 것은 어디까지나 1902년 Knight Bachelor에 서임되었기 때문이지 세인트존 훈장과는 관련이 없다. 관보를 보면 1903년 5월 7일자 세인트존 훈장 2등급 수훈자로 기재된 5명 중 코난 도일만 이름 앞에 'Sir'가 붙어 있다. 이는 세인트존 훈장 2등급을 받기 전에 기사에 서임된 상태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인트존 훈장은 몰타 기사단의 분파에서 시작되어 1888년 만들어진 영국의 훈장이다. 기사단 훈장(Order of chivalry)의 형태를 띄고 있으나 이는 말 그대로 형태상 기사단 전통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는 '분류'일 뿐이고, 현대 영국의 기사 칭호(기사작위)는 기사단 훈장 형태의 훈장 중에서도 2등급 이상의 상위 훈장 수훈자에게 붙는 것이다. 위키백과를 보면 세인트존 훈장은 영국 군주의 재량에 따라 -정원 제한을 두지만- 부여하는 훈장이며(The Sovereign Head confirms all appointments to the order as she, in her absolute discretion, shall think fit, though the constitution does impose certain limitations:), 2등급 이상이더라도 Sir / Dame 칭호는 쓰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Knights and Dames receive the accolade from the grand prior when they are touched on the shoulder with a sword and are given their robes and insignia. However, post-nominal letters of the order are not used outside the organisation itself, and a Knight and Dame may not use the prefix Sir or Dame). 대영제국 훈장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작위는 군주의 재량이 아니라 '국민의 집단청원 → 의회의 공훈심사 → 군주의 승인'이라는 절차를 따라 서훈을 진행한다.[2] Deputy Lieutenant(부지사)의 약자. 서리 주(Surrey)의 Deputy Lieutenant를 지낸 이력이 있다.[3] 1902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를 받아 Sir가 붙는다. Knight Bachelor만 받은 인물은 이름 앞에 Sir만 붙을 뿐, 이름 뒤에 붙는 건 없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4] 한국과 일본에서는 퍼스트 네임인 아서를 생략하고 "코난 도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외의 나라에서는 대체로 풀네임에서 Ignatius(이그네이셔스)를 생략한 "아서 코난 도일"이 훨씬 유명하다. 줄여서 ACD, 그리고 웬만하면 sir을 붙여준다.[5] 경찰의 의뢰를 받고 당시 영국에서 일어났던 각종 범죄 수사에 참여하여 날카로운 조언을 함으로써 사건이 빠르게 해결되는데 기여한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세 번째 주제 중간에 서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 셜록 홈즈와 같은 활동을 한 것이다.[6] 코난 도일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생전에 258편이나 되는 소설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한 소설가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모두 60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의 분량은 그가 집필한 모든 소설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이다.[7] 소설가로서 유명하지만 생전에 106편이나 되는 시를 발표한 시인이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사이트 참고.[8] 생전에 22편의 희곡을 집필했다.[9] 이 콘스턴스 에이미 모니카 도일의 남편이 바로 아르센 뤼팽보다 먼저 괴도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던 A.J. 래플스의 작가, 어니스트 윌리엄 호넝(Ernest William Hornung)이다.[10] 1857~1906.[11] 1874~1940.[12] 생년을 보면 알겠지만 메리와 킹슬리는 첫 아내 루이자 호킨스의 소생이며, 나머지 셋은 루이자와 사별 후 재혼한 진 레키 소생이다.[13] 코난 도일의 묘비명.[14] 장편 <안개의 땅>과 <독가스대>와 두 단편을 포함한다[15] 도일 자신은 훗날 가톨릭 신앙을 버린다.[16] The Haunted Grange of Goresthorpe의 원고는 1940년대에 스코틀랜드 국립 도서관에 넘어갔다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그 소설에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셜록 홈즈의 프로토타입으로 보이는 등장인물이 나온다.[17] 에드거 앨런 포와 가브리오의 소설은 셜록 홈즈 시리즈 내에서도 언급된다. 셜록 홈즈의 오만한 캐릭터성을 위해 까이긴 하지만(...)[18] 성씨는 올리버 웬들 홈즈에서 따왔다.[19] 좀 더 정확하게는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한 단편을 바탕으로 1892년에 출간한 셜록 홈즈의 모험으로 유명 작가로서 자리잡았으며, 소설의 삽화에 있어서도 본래는 도일의 아버지가 직접 그렸지만 대중적인 반응이 좋지 않자 시드니 파젯으로 교체했다.[20] 헐버트 그린호프 스미스(1855.1.3.~1935.1.14.). 스트랜드 매거진이 창간된 1891년부터 1930년까지 39년에 걸쳐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은퇴했다.[21] 처음에는 의사 일도 하면서 글도 쓰느라 바쁘게 지냈다. 작가로서 유명해지자 손님도 좀 늘었다고. 그래서 좀 쉴 겸하여 출판사에 원고료를 두고 꽤 무리한 요구(1000파운드라는 거액을 일시불에 내놓고 단편 몇 편으로 제한하였다. 원화로 따지면 2억쯤 되는 금액.)를 했는데, 별 말 없이 출판사는 그 요구를 받아주었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으니까.[22] 저작권도 통째로 넘긴 계약이었다.[23] 그런데 사실 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 초서를 비롯하여 본인은 '별 거 아닌 작품', '심심풀이로 써본 것' 이라고 생각한 작품인 캔터베리 이야기 덕분에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유명해진 사례가 꽤 된다.[24]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이 셜록 홈즈에 대해 말하자 듣기도 싫다며 성을 냈을 정도.[25] 코난 도일은 스위스 여행을 가서 라이헨바흐 폭포를 보고 셜록 홈즈의 무덤을 이곳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다.[26] 결국 루이자는 6년 뒤에 사망한다.[27] 이때 보어 전쟁에는 아서 코난 도일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던 하나뿐인 남동생 이네스 도일도 장교로서 참전했다. 즉, 단순히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라 남동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영국의 승리를 기원했을 가능성도 높다.[28] 이미 제시했던 트릭을 재활용한다든지.[29] 여기에 대해서 코난 도일이 남긴 언급이 있는데 "셜록 홈즈가 주인공인 단편을 집필할 때 어려운 점은, 장편 소설만큼 명쾌하고 참신한 줄거리를 매번 담아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 정도로 평균을 유지하며 줄거리를 만들어 갈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근거가 박약해지건 금세 들통 난다." 그래서 "나 자신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줄거리나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셜록 홈즈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른 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려면 나부터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코난 도일의 집필 전제였다.(『코난 도일을 읽는 밤』122~123쪽에서 발췌.)[30] 비슷하다고 봐야할 게 바로 펄프픽션 전문 작가라고 당시 평가받던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나 로버트 하워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같은 작가들이다. 당시 평가는 현재 양판소 수준 소설이었으나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재평가되었다. 애초에 그 이전 찰스 디킨스나 알렉상드르 뒤마 등, 그 당시에 기존 문학계에게 악평을 받은 작가들은 대중문학계에 무수히 많다.[31] 다만 모험 소설인 '잃어버린 세계'는 셜록 홈즈 시리즈만큼은 아니지만 성공을 거뒀고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잃어버린 세계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 남은 고대의 생태계와의 조우" 라는 마르지 않는 클리셰를 후세에 제공했으며 여러차례 영화화되고 '킹콩'에게 영향을 주었다.[32] 부인 사망 이전에 이미 약혼했다.[33] 실제 로라이마 산에는 작은 개구리 정도를 제외하면 동물이 거의 살지 않는다.[34] 이 부분은 2015년 8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35] 킹슬리는 솜 전투에서 입은 폐렴의 악화로, 동생인 이네스 도일 준장은 1919년 2월 폐렴으로 사망한다. 매제이자 래플스 시리즈의 작가인 어니스트 호넝 역시 1921년에 사망한다. 여러모로 아서 코난 도일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36] 1917년 코팅리 지방에 사는 두 소녀가 소위 "요정 사진"을 기고한 사기 사건. 후에 그 요정들은 단순히 잡지에서 오린 그림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37] 코난 도일만큼 유명한 추리 소설가, 그것도 의사 출신인 사람이 이렇게 심령론에 심취하는 게 결코 흔한 일이 아니긴 하다.[38] 예를 들어 1785년에 창간된 영국의 일간지이자 현재도 발행되는 더 타임스와 역시 영국의 일간지이면서 1855년에 창간되어 여전히 운영되는 데일리 텔레그래프.[39] 의사이며 글을 쓰고 전형적인 영국인이다.[40] 단, 존 왓슨의 결혼은 그의 결혼 관련 언급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세 번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41] 홈즈가 나오지 않은 단편도 몇 편 썼다.[42] 이중에서 챌린저 교수 시리즈 5편과 마라코트 심해는 한국에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하지만 장르문학 시장 자체가 척박하다보니 해당 소설들의 인지도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코난 도일 = 셜록 홈즈 시리즈라는 공식이 완전히 안착된 상태다.[43] 다만 이 일은 당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독단이였고, 벨기에 의회는 이후 레오폴드에게서 콩고 자유국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벨기에 의회도 콩고에서의 잔학행위를 멈추지 않았기에 콩고 원주민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 벨기에가 콩고에서 한 일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한 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지만 인지도는 훨씬 낮다.[44] 셜록 홈즈의 회상록 수록작인 노란 얼굴이라는 단편이 이 사건과 연관지어 자주 거론된다. 해당 작품 또한 코난 도일이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아내가 흑인과의 초혼에서 혼혈아를 낳았음을 알게 된 백인 남성이 아내의 아이를 기꺼이 양녀로 맞아들이는 결말.[45] 이는 초기작뿐만 아니라 코난 도일이 신비주의에 빠져든 후에 쓴 <서섹스 흡혈귀>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홈즈는 일관적으로 미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뢰인이 보낸 편지에 적힌 흡혈귀에 대한 글을 읽고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작품은 1924년에 발표된 것으로, 코난 도일이 상술된 코팅리 요정 사건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고도 몇 년이나 뒤에 쓴 작품이다.[46] 현대 한국 분량으로 치면 대략 7500자에서 10000자 가량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문피아 최소 기준(편당 5천자) 1.5~2회 분량이다.[47] 이때 분노에 대한 이유는 정황상 셜록 홈즈는 잘 되는 데 망명자들을 비롯한 역사 소설은 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으로 망명자들은 코난 도일의 4번째 역사소설인데, 마이카 클라크를 비롯한 전작들은 잘 되지 못한 편이고, 망명자들 역시 본래 3부작으로 기획한 글인데도 1편밖에 안나왔다. 더 웃긴건 원고는 3부작 전부 다 썼었다는 것. 그저 3권 분철 방식으로 출판했으나 1권에서 대차게 망해서 2-3권이 나오지도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48] 성공했다면 부담되는 셜록홈즈는 안쓰고 멜로를 주로 썼을 것 이다.[49] 버나드 쇼는 셜록 홈즈에 대해서도 호감 가는 점이 하나도 없는 마약 중독자라 평한 적이 있다(...)[50] 아버지가 페르시아인이었다.[51] 이 점은 악성 셜로키언들을 버로우시킬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셜록 홈즈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면 왜 잭 더 리퍼 사건은 해결 못했는데?'란 반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로키언들도 나름의 카운터를 준비했으니, '잭 더 리퍼를 홈즈가 잡았지만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인물이라 조용히 묻었다'는 것이다.[52] 32촌이라면 유전학적으로 아무 사이가 아니라서 남남이나 다름없다.[53] 낮은 등급의 훈장이야 그런 점도 있지만, 기사 작위는 지금까지도 남발되거나 하는 수준의 것은 아니다. 문학뿐 아니라 스포츠, 대중음악, 학계, 공직자,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전분야' 대상으로 1년에 2번씩 있는 서훈명단 발표에서, '영국 연방' 소속 국민 중 20명 내외만이 기사 작위 이상에 오른다. 영국 연방 소속국은 굵직하게만 대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54] 셜록 홈즈 시리즈가 국왕이 끝까지 읽은 유일한 소설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55] 1886~1965. 그는 대장간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대장간 일을 도와서 더위에 익숙했기에 아무렇지 않게 결승선을 통과했다.[56] 다만 정말로 사건의 진상이 무슨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고, 단지 분위기 조성용 장치 혹은 추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뻔했던 함정 정도로만 나온다. '흡혈귀라는 오해를 받았으나 사실 독화살을 맞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입으로 피를 빨아냈을 뿐인 부인', '피와 불에 탄 뼈 등이 발견되어 살인의 흔적으로 여겨졌으나 사실은 요리사가 개인적으로 부두교를 신봉하여 혼자서 의식을 치렀던 흔적' 등.[57] 발굴된 시기가 영국이 전성기에 있었던 제1차 세계 대전 전인 1910년대 초반이고 진상이 폭로된 것은 영국이 몰락했음이 확실해진 1950년대. 이쯤 되면 누구라도 딴지를 걸고 넘어가게 될 지도.[58] 간단히 말하면 보어인은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아니라, 영국보다 먼저 식민지를 펴고 정착했던 네덜란드계 백인이었고, 이들이 세운 트란스발 공화국이나 오라녜 자유국 또한 백인 국가였다. 또, 이들은 영국보다 훨씬 더 인종차별과 식민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59] 대표적인 인물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선술했듯이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유명한 그는 조국 영국이 그가 마지막 삶을 보낸 사모아에서 벌인 학살 및 이간질을 목격하고 그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썼으나 당시 영국 어느 신문사도, 어느 출판사도 그 글을 책으로 내주지 않았다. 스티븐슨의 지인들도 그가 사모아에 살기 망정이지 영국에서 그랬다면 편하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60] 미국의 마크 트웨인도 미국의 필리핀 침공을 비난하는 등 반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였으나 그 당시에는 드문 경우였다.[61] 아르센 뤼팽의 말로 '프랑스를 위해서라면 아프리카 야만인들을 내가 지배하게 도울 수 있다'는 대사를 넣었다.[62] 물론 우주전쟁에서 보듯 제국주의를 풍자하는 듯한 소설도 썼다.[63] 장녀 메리 루이즈(1889-1976), 장남 킹슬리(1892-1918), 차남 데니스(1909-1955), 3남 에이드리언(1910-1970), 차녀 레나 진(1912-1997). 세 명의 아들은 셋째를 제외하고 만 60세를 못 넘겼고 두 명의 딸들은 만 80세를 넘겨 장수했다.[64] 성씨는 에도가와 란포에서 따왔다. 아버지인 쿠도 유사쿠의 서재에 에도가와 란포 전집과 코난 도일 전집이 보여서 얼떨결에 둘을 전부 따 온 것.[65] 애초에 코난의 본업은 의사였고 킹슬리도 아버지에 대한 동경으로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자 코난이 지원해줘서 대학 병원에 입학한 것으로, 메리 또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고 음악가 겸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66] 위 두 편은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제라르의 모험으로 영화화되었다.[67]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에서 유행한 3권 분철방식으로 발행(한 권 분량의 원고를 3권으로 쪼개서, 1권을 발매 후 인기가 좋으면 다음 권을 내놓는 출판방식)했으나, 1권만 출판되고 2-3권은 발행되지 않았다. 즉, 처절하게 망했다.[68] 코난 도일 문서 내용의 상당한 부분은 해당 링크에 서술된 글을 참고했다. 특히 네 번째 주제의 내용은 약간의 수정 및 보완을 거친 것을 제외하면 그중에서 코난 도일의 생애에 대하여 해설한 글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