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동명이인 이수일에 대한 내용은 이수일(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수기(李壽鹿+基) 이숭향(李嵩鄕)·이숭경(李崇卿) |
자 / 호 | 숭경(嵩卿) / 영헌(逞軒) |
본관 |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
출생 | 1885년 1월 29일 |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관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관터마을)[2] | |
사망 | 1966년 4월 8일 (향년 81세) |
경상북도 칠곡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30호 |
상훈 | 건국포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수일은 1885년 1월 29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관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관터마을)에서 아버지 이진환(李晋煥)과 어머니 순천 박씨 박해덕(朴海德)[3]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김창숙은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1925년 이회영 등과 함께 내몽골 지역에 황무지를 개간해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고, 그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같은 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때 이수일은 김창숙을 도와 김헌식(金憲植)·이영로(李泳魯)·홍묵·이동흠(李棟欽)·이종흠(李棕欽) 등과 함께 경상도 일대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5]그러던 중 1927년 7월 26일 생명이 위독한 아내를 만나러 집에 들렀다가 왜관면의 일본 경찰에 폭행을 당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6년 4월 8일 칠곡군에서 사망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족보명은 이수기(李壽麒).[2]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수택·이항진은 인근의 귀바위마을 출신이다.[3]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4] 아버지 이진환의 첫째 부인인 인동 장씨 장응표(張膺杓)의 딸 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참고로 첫째 부인 인동 장씨는 독립유공자 장석영의 누이이기도 하다.[5]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1926년 6월 4일 대구지검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 판결이 내려진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