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라이트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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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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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 1992-93 · 1996-97 |
1991-92 EFL 득점왕 | ||||
앨런 스미스 (아스날 FC) | → | 이안 라이트 (아스날 FC) | → | 테디 셰링엄 (토트넘 홋스퍼 FC)[1] |
이안 라이트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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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방송공사 | |||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 |||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 이안 라이트 OBE Ian Wright OBE | ||
본명 | 이언 에드워드 라이트 Ian Edward Wright | ||
출생 | 1963년 11월 3일 ([age(1963-11-03)]세) / 잉글랜드 런던 울리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자메이카| ]][[틀:국기| ]][[틀:국기| ]] | [[그레나다|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75cm, 73kg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축구경영인 칼럼니스트 방송인 | ||
소속 | 선수 | 크리스탈 팰리스 FC (1985~1991) 아스날 FC (1991~1998)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98~1999)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9 / 임대) 셀틱 FC (1999~2000) 번리 FC (2000) | |
단장 | 애쉬포드 유나이티드 FC (2007~ ) | ||
감독 | 밀턴킨스 던스 FC (2012~2013) | ||
방송인 | 영국방송공사 (패널) | ||
등번호 | 아스날 FC - 8번 | ||
국가대표 | 33경기 9골 (잉글랜드 / 1991~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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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前 축구 선수이자 現 축구 칼럼니스트.숀 라이트필립스와 브래들리 라이트필립스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2000년에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았고, 2023년 6월서훈명단(2023 Birthday Honours)에 4등급 훈장(OBE) 수훈대상자로 올랐다.[2]
2. 유년기
라이트의 가족은 사실 영국이 아닌 자메이카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혈통의 절반이 시리아계다. 라이트가 태어난 지 18개월이 됐을 때 그의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얼마 후 재혼했다. 새아버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라이트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예를 들어, 그는 축구 경기가 있는 날 TV를 보지 못하고 벽을 바라보고 오로지 듣기만 할 것을 강요받았다. 축구를 사랑했던 라이트는 TV를 보고 싶었지만 새아버지는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폭력을 행사했고 라이트는 어쩔 수 없이 울면서 귀로 들어야 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라이트 본인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폭력적이고 세상 일과 동떨어진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라이트가 축구에 열중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축구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당장 그만둘 것을 강요했다.피그덴과 라이트. (둘의 일화를 설명해주는 동영상) |
다행히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울리치의 체육교사였던 시드니 피그덴(Sydney Pigden) 씨가 바로 그 분이었다.[3] 라이트는 피그덴 씨의 자상함과 헌신을 받으며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상처를 씻어내고 축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피그덴 씨는 그가 축구를 전문적으로 익히게 해줬고 축구를 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 즉 용기, 매너, 그리고 인내심도 몸에 배히게 해줬다. 이러한 피그덴 씨의 가르침은 라이트 인생에 큰 모델이 되어줬다.
라이트는 사우스핸드 대학에서 트라이얼을 받고 브라이튼의 유스팀에서 10대 시절을 보냈지만 프로 선수가 되기에는 집안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지라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논 리그 팀에 소속되어 아마추어 선수로 뛰는 동시에 시간이 날 때마다 알바 생활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이런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한때는 축구를 때려칠려고 했다.
그러던 중 라이트는 가난에 찌든 데다 그의 아내가 아이까지 가져서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는 결국 세금을 미납했고 법정에 소환되어 2주간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다. 라이트는 감옥 안에서 신에게 자신이 축구 선수로서 성공하여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런 그에게 신이 은총을 내린 것일까? 마침내 한 프로팀이 그에게 프로 선수가 될 기회를 준다. 그 팀은 바로 크리스탈 팰리스였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3.1.1. 크리스탈 팰리스 FC
크리스탈 팰리스의 스카우터 피터 프랜티스는 1985년 초순에 라이트가 아마추어 팀에서 활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위대한 선수로 대성할 잠재력이 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트라이얼을 받을 기회를 줬다. 라이트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이 기회를 잡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1985년 8월 22세의 나이에 크리스탈 팰리스에 입단하면서 뒤늦게나마 본격적인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그는 곧바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1985-86 시즌에서 리그에서만 32경기에 출장하여 9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은 팀내에서 2번째로 많은 골 기록이었다. 이후 그는 마크 브라이트와 투톱이 되어 서로 성공적인 팀워크를 발휘하여 팀을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크리스탈 팰리스는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1부리그 승격은 좌절되었다.
이후 라이트는 1987-88 시즌엔 리그 41경기 20골, FA컵 4경기 3골 등 총 45경기 23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또한 1988-89 시즌엔 리그 42경기 24골, FA컵 3경기 1골을 기록하며 총 45경기 출장하여 25골을 넣었고 크리스탈 팰리스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마침내 1부리그에 승격했다. 이러한 활약은 그가 잉글랜드 국가대표 B팀에 뽑히게 해줬지만 다음 시즌에 정강이뼈를 두번이나 다치는 바람에 국가대표 데뷔는 좌절되었다.
하지만 라이트는 좌절하지 않았고 부상에서 회복한 뒤 복귀전인 1990년 FA컵 결승전에서 슈퍼 서브로서의 역할을 했다. 당시 크리스탈 팰리스는 맨유와의 FA컵 결승전에서 정규시간이 다 지날 무렵 3:2로 지고 있었다. 이때 라이트는 막판에 투입되었고 곧바로 왕성한 활동량과 주력을 선보이며 상대 수비진을 유린했고 마침내 경기 종료 1분전에 극적인 골을 넣어 팀의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팰리스는 정작 재경기에서 맨유에게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 다음 시즌인 1990-91시즌, 그는 지난 시즌보다 훨씬 나아진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리그 38경기 15골, FA컵 8경기에 4골을 기록하며 종합 46경기 19골을 기록했다. 라이트는 이 시즌에 크리스탈 팰리스에서의 통산 100골을 달성했다. 이후 1991-92 시즌 개막 후 8경기에서 5골을 넣으며 역시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이던 중, 그를 눈여겨 보던 조지 그레이엄 아스날 감독이 1991년 9월에 라이트를 2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급하고 영입했다.
라이트는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253경기에 선발출전하고 24경기를 교체 출장하며 117골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크리스탈 팰리스 역사상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골 기록이었고 팀의 전체 역사로 따져봐도 3번째로 많은 기록이었다. 크리스탈 팰리스 팬들은 그의 활약상을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고 2005년에 라이트를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3.1.2. 아스날 FC
라이트는 아스날에 온 뒤 레스터 시티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이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무승부를 이끌었다. 또한 리그에서의 데뷔전에서는 해트트릭을 작렬하며 아스날이 사우스햄튼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991-92 시즌에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8경기 5골, 아스날에서 30경기 24골을 기록하며 리그 38경기 출전 29골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그 시즌에서 가장 많은 골 기록이었으므로 최고의 스트라이커에게 주어지는 상인 골든 부츠를 수상했다.프리미어 리그가 시작한 1992-93 시즌, 라이트는 리그 31경기 15골, fa컵 15경기 15골을 기록하며 46경기에 출전하여 30골을 기록했다. 특히 FA컵에서는 골폭풍을 쏟아냈고, 아스날은 그의 활약 덕분에 1993년에 FA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한 라이트는 리그 컵 우승도 차지하여 1992-93 시즌에 더블을 이룩했다.
아스날의 8번. |
하지만 라이트는 자신에게 거의 모든 책임이 쏠린 상황에서도 자신의 책무를 유감없이 소화해냈다. 그는 매시즌 리그에서만 최소 15골 이상을 넣었고 FA컵에서도 10골 이상을 넣으며 아스날이 FA컵에서 선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라이트는 1994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파르마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이끌었고 아스날이 대륙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런데 1995년 2월,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해줬던 조지 그레이엄이 뇌물 수수 혐의로 감독 자격 1년 정지 처분을 받고 얼마 안가 경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팀은 혼란에 휩싸였고 결국 아스날은 12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많은 팀들이 그에게 오퍼를 했지만 그는 아스날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얼마 후 데니스 베르캄프가 아스날에 합류하자, 그는 베르캄프와 환상의 듀오를 결성하여 아스날의 성적을 끌어올렸고 최종 순위 5위를 기록하며 UEFA컵[4]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9월,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에 부임했다. 그 당시 라이트의 나이는 33세에 가까웠다. 그러나 라이트는 선수로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1996-97 시즌에 리그 35경기 23골, fa컵 6경기 7골을 기록하며 종합 41경기 30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1997년 9월 13일에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아스날의 전설적인 공격수 클리프 배스틴의 골기록을 경신했다. (훗날 티에리 앙리가 2005년 10월에 라이트의 골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그는 1997년 10월에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고 이후 리그 컵 결승전에서 교체로 투입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출전을 하지 못했다. 1997-98시즌이 끝난 뒤 그는 더이상 주전으로 활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스날을 떠났다. 그는 아스날에서 279경기 선발 출장, 그리고 9경기 교체 출전하여 통산 185골을 기록했다.
3.1.3. 말년
1998년 6월, 라이트는 웨스트햄에 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입단했다. 그는 15개월 동안 웨스트햄 선수로서 활약하며 리그 22경기에서 9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리즈와의 경기 도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경기가 끝난 뒤 심판실에 쳐들어가 항의하는 바람에 물의를 샀고 징계를 받기도 했다.라이트는 1999년 1월에 노팅엄 포레스트에 임대되어 10경기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고 1999년 여름엔 셀틱으로 이적하여 8경기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셀틱에서 활동했을 때, 그는 셀틱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당시 셀틱 팬들은 팀의 한심한 경기력에 짜증이 났고 셀틱의 감독 존 반스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다보니 반스가 영입한 선수인 라이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갔고 라이트는 경기를 뛰는 내내 야유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몇몇 셀틱 팬들은 그에게 인종차별적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라이트는 셀틱에서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2000년 1월에 번리로 이적했다. 그는 번리에서 15경기 4골을 기록했고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선수 시절 클럽팀에서 501경기에 출전하여 239골을 기록했다.
3.2. 국가대표 경력
라이트는 1991년 2월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팀의 2:0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유로 1992에서 잉글랜드에 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국가대표로서의 인생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단지 17경기만 선발출전했고 대부분의 경기는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그리고 1992년 유로에서, 라이트는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했다. 1991-92 시즌에서 29골을 기록하며 골든 부츠를 수여받았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라이트는 이후 1994 월드컵 예선에서 폴란드를 상대로 동점을 만드는 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에 기여했고 산 마리노와의 경기에선 4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7:1 완승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 덕분에, 라이트는 그레이엄 테일러의 부름을 받고 1994 월드컵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이 월드컵에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그레이엄 테일러가 경질되고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테리 베너블스는 라이트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더욱 줄였다. 라이트는 이젠 대부분의 경기를 서브로 뛰어야 했다. 게다가 그 대신 선발로 뛴 앨런 시어러와 게리 리네커가 대활약을 선보였고 잉글랜드는 호들의 활약에 힘입어 1996 유로 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국가대표로서 자리가 없을 줄 알았지만, 라이트는 리그에서 여전히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몰도바와의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잉글랜드의 4:0 대승에 견인한 덕분에 1998 월드컵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그는 이후 좋은 활약을 연이어 선보이며 드디어 월드컵에서 이름값 대로 대활약할 줄 알았는데... 그만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1998 월드컵이 끝난 뒤, 그는 웨스트햄 선수로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2번 소집되었다. 그는 유로 2000에서 교체로서 선발 출전했고 유로 대회가 끝난 뒤 선수 경력을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화려했던 클럽에서의 활약상에 비하면 국가대표로서는 참으로 아쉬웠다고 할 수 있겠다.
4. 은퇴 이후
라이트는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2007년 5월에 런던의 아마추어 클럽인 Ashford Town의 축구 디렉터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5년 간 활동하다가 2012년 5월 18일에 MK 돈스의 부름을 받고 파트 타임 코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코치 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라이트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축구 감독이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Top of the Pops의 게스트로 출연함으로써 방송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ITV와 계약을 체결하고 'Friday Night's All Wright'라는 이름의 쇼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유명 가수 엘튼 존과 머라이어 캐리, 그리고 유명 배우 윌 스미스 같은 유명인사들과 인터뷰했다.
이후 그는 'Friends Like These', 'I'd Do Anything', 'The National Lottery Wright Ticket', 'What Kids Really Think' 등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 프로그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2004년 가을에 데이비드 서먼과 함께 BBC 게임 쇼인 'They Think It's All Over'를 진행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2년간 활동하다가 2006년 스케줄 문제로 하차했다. 또한 라이트는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그는 'Big Brother: Celebrity Hijack'이란 이름의 드라마에서 '유명인 하이재커'라는 역할로 출연했다.
라이트는 가끔씩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는 2010년 'Absolute Radio'에 합류하여 토요일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축구 경기 이전에 각 경기를 프리뷰하는 역할을 했다. 그외에도 라이트는 광고에도 여러 번 나왔고 칼럼니스트로서 글도 기고하는 등 참 바쁜 인생을 보내고 있다(...).[5]
5. 플레이 스타일
오늘날의 축구 팬들은 티에리 앙리를 아스날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공격수로 꼽지만, 앙리가 활약하기 직전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스날의 얼굴은 이안 라이트였다. 라이트에서 앙리로 아스날의 상징적 공격수의 계보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고 보면 된다.라이트의 주무기는 빠른 주력과 마무리하는 능력이었다. 어느 위치에서나 골을 집어넣을수 있는 실로 천부적인 득점 감각을 지녔으며 조지 그레이엄식 뻥축구에서 공격 첨병을 맡을 정도로 주력이 굉장히 빨랐다. 특히 상기한 슈팅력이 굉장히 좋았는데, 간단한 박스 안 마무리에서부터 논스톱 발리슛, 헤딩, 빨랫줄같은 중거리 슛, 로빙 슛 그리고 드리블에 이은 마무리까지 커리어 내내 다양하게 득점을 가져가며 박스 안 마무리에 열중했던 포처였던 뤼트 반 니스텔로이와는 다르게 정형화된 공격 패턴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냥 슛 자체를 잘 했다. 이렇든 '슛'이라는 절대적인 기본기가 출중했던 공격수였기 때문에 팀이 잘하던 못하던, 선발로 집어넣던 후보로 투입하던 간에 위협적인 슛을 쏠 수 있어 1인분을 꾸준히 해낼 수 있었고, 슈팅이라는 기본기가 탄탄해서 골을 잘 넣는 공격수는 어느 시대의 어느 팀에서나 사랑받기 마련이기 때문에 라이트는 가는 팀마다 환영받을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팬들에게 라이트의 가장 큰 어필은 그의 인간 승리 스토리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오늘의 제이미 바디를 보듯 벽돌공 출신으로 21세라는 굉장히 늦은 나이에 프로 데뷔를 했던 순박한 청년이 영국 최고의 클럽 중 하나에서 전설이 된 이야기는 당시 많은 영국 팬들에게 라이트의 플레이를 보며 영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아스날 FC (1991~1998)
- 프리미어 리그: 1997-98
- FA컵: 1992-93, 1997-98
- EFL컵: 1992-93
- UEFA 컵 위너스 컵: 1993-94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98~1999)
- UEFA 인터토토컵: 1999
6.2. 개인 수상
-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 1993-94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 1991-92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올해의 골: 1989-90
- PFA 올해의 팀
- 프리미어 리그: 1992-93, 1996-97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88-89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6년 11월
- 아스날 FC 올해의 선수: 1991-92, 1992-93
- 크리스탈 팰리스 FC 올해의 선수: 1988-89
- 크리스탈 팰리스 20세기 베스트 11: 2005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5
-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2022
6.3. 서훈
7. 여담
- 축구 집안이다. 사촌과 오촌 조카 중에도 축구선수가 있으며 손자인 디마지오가 맨시티 유스에서 크고 있다.
- 전 부인 샤론 필립스와 결혼하며, 샤론이 미혼모 시절 낳았던 1981년생 아들을 호적에 올렸으며 그것이 첫째인 숀이다. 샤론과의 사이에서 1985년 브래들리 라이트필립스를 낳았고, 샤론과 이혼했다. 2009년생 자녀까지 4남 4녀를 두고 있다.
- 현역 시절 30세 이후 넣은 골이 93골로 PL 30세 이상 선수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2022년 3월에 제이미 바디 가 기록을 경신했다.
- FIFA 20에 아이콘으로 출시되었다.
- 훌륭한 인품과 편향적이지 않은 축구 논평으로, 현지 아스날 팬들은 물론 토트넘 팬들에게까지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1] 프리미어 리그[2] OBE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가 아니고, 훈장 등급만 MBE에서 하나 오른 것이다.[3]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며 공군 파일럿으로 복무했다. 당시 영국군 최연소 파일럿 중 한 명이었고 승전 이후 버킹엄 궁전 위를 나는 기념비행에도 선발되었다.[4] 출전팀 선정 방식이 크게 바뀌면서 유로파 리그로 명칭이 바뀐 것은 2009년이므로, 1995년 기준으로는 UEFA컵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5] 비슷한 예로는 루드 굴리트가 있다, 라이트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굴리트는 감독생활을 했으나 부진하였고, 결국 감독 활동을 접은 이후 방송계에 투신해 각종 축구 관련 행사를 뛰며 얼굴을 자주 비추고,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하며 제 2의 삶을 라이트 못지 않게 바쁘게 살고 있다, 또한 축구게임 때문에 오히려 세계적인 인지도는 라이트보다 압도적이다. 또 비슷한 예로는 이 분야에서 축구 역사상 최고로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한 게리 리네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