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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 야스무라 쇼지츠(安村鍾實) |
본관 | 경주 이씨[1] |
출생 | 1915년 1월 9일 |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종면[2] 성산리 371번지 (현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성산리)[3] | |
사망 | 1948년 10월 17일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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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종실은 1915년 1월 9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종면(현 영암군 도포면) 성산리에서 태어났다.일찍이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4월부터 1940년 3월까지 전라남도 신북보통학교에 촉탁교원으로 근무하였다.# 그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1942년 졸업하였다.
그는 1945년 3월[4]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되어 버마원정군 오오가미(狼)사단 소속 아야노(綾野) 산포중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이 부대는 미얀마(당시 버마국) 중남부의 메이크틸라(Meiktila)에 진출해 있었는데, 같은 조선인 분대원이었던 박순동으로부터 일본군이 임팔 작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했으며 곧 연합군 전차부대가 자신이 소속된 일본군 부대의 전면을 차단하고, 후면에는 낙하산부대가 투하되어 3일만에 주둔지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끊을지도 모른다는 전황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박순동과 함께 쿠메(Kume)에 있는 영국군에 투항할 것을 결심하고 같은 달 수통 2개와 쌀 두 줌 등 약간의 식량과 38식 소총 1정, 실탄 30발을 휴대하여 부대를 탈출하였다.[5]
3월 23일 그는 부대 근처 마을에 피난해 있던 마운테인틴이라는 인도인을 만나 그의 집에 피신했으며, 사흘 후인 26일 마운테인틴의 장인으로부터 그들 일행을 영국군에 소개하는 소개장을 전해받았고 당일 마을청년 2명의 도움으로 영국군 진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현지 영국군 사단사령부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같은 달 28일 인도 뉴델리 중국·버마·인도전구 사령부에 전송되었다.
이곳에서 당초 일본군 포로들과 섞여 있으면서 '#M-1353'[6]의 포로번호를 부여받았는데, 그는 당시 뉴델리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첩보기관 OSS 인도-버마지대의 심문 과정에서 대일항전을 자청했고, 이에 따라 OSS 워싱턴 본부에 포섭되었다. 5월 22일 OSS 인도-버마지대로부터 신병이 인수된 그는 같은 달 24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후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산타카탈리나 섬(Santa Catalina Island)으로 옮겨져 본격적으로 OSS의 대일 비밀 첩보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강도높은 훈련을 받았다.
냅코 프로젝트는 '한국 내에 당장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주와 무저항운동으로 이어갈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군의 국내 침투작전으로서 이를 통해 2,300만 한국 국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무기조작법, 비무장 전투법, 지도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비밀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 등에 관한 특수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이 끝나면 각각 5~10명의 공작조로 나뉘어 경기도 경성부와 평안남도 평양부를 비롯한 평안남도 관내 농촌지역 등 국내 각지에 침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첩보요원훈련을 받기 위해 미국 서부 산타카타리나 섬으로 이동하였으며, 같은 해 6월부터 OSS의 냅코작전에 의한 첩보활동·태업선동·무선연락 등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나, 1945년 9월 2일 태평양전쟁 및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훈련을 채 모두 수료하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전쟁포로 신분으로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곳에서 「자유한인보」를 발행하여 2,700여명의 한국인 포로의 민주시민 의식을 제고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여생을 보내다가 1948년 10월 17일 별세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37세손 종(鍾) 항렬.[2] 1931년 4월 1일 북일종면에서 도포면으로 개칭되었다.[3]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4] 미 전략첩보국에서 생산한 포로심문 문서에 따르면 이종실은 1943년 12월에 "자원(사실상 강제징집-군에 자원하지 않으면 공장 등에 노동자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음)" 형태로 입대하였다고 한다.[5] 정병준, 「朴順東의 항일투쟁과 美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침투작전」,『지방사와 지방문화 6 (2)』, 역사문화학회, 2013.11.#[6] 미 전략첩보국 문서에는 포로번호가 M-1354로 나온다. 자료 간 교차검증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