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 사상의 하나
'인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상.[1]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인간에 관한 것을 가장 중시하는 정신자세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너무 넓은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2] 엄청나게 많은 해석이나 의견들이 등장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인간주의(人間主義), 인문주의(人文主義)라고 하기도 하며, 인도주의(humanitarianism)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인간애'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인도주의의 경우에는 인류애에 더 가까운 용어다.
한편 인본원리와는 전혀 다른 용어다. 인본주의라고 할 경우 인간이 중심이 된다는 단어 구조상 신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며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대척점으로 인식된다.[3][4] 다만 인문주의 혹은 인본주의가 그러한 의미의 사상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경우 인문학을 철학, 역사학, 수사학, 미학, 정치학 등, 폴리스(국가)의 공민으로서 갖춰야할 '인간성(인간다움)'을[5] 다루는 학문으로 봤고, 이러한 의미에서 고전 시대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해석했다.
인문주의라는 용어의 최초 사용자는 독일의 교육철학자 니탐머(Friedrich Immanuel Niethammer, 1766~1848)이 1808년에 그 저서 중에서 이용한 독일어 휴마니스무스(Humanismus)가 효시라고 한다.[6]
1.1. 역사
중세 후기에 이르러 중세 유럽의 신본주의에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이 주도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주의가 일어났다. 이러한 것은 당시 중세 유럽의 교회가 고전 철학자들에게 보여주던 존경과 호감의 연장선이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중세 교회가 고대의 문화를 상당히 뭉개 버려서 그 반작용으로 인문주의가 생겼다'라는 것은 옳지 않다. 중세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서와 함께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었다.[7] 중세 교회는 고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였고, 고대인의 지혜에 경의를 표했다. 다만 중세인들이 연구했던 그리스 고전 텍스트는 로마 제국 시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것들이었으며 주된 연구 목적은 기독교 윤리 및 신학과 고대 철학의 융합이었다. 르네상스는 여기서 초점을 돌려서 그리스 고전 그 자체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다는 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중세 교회가 고대 문화를 파괴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고대 그리스도 중세 유럽과는 형태가 다를지언정 신본주의적인 사회였다. 당장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읽어보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논파하기 위하여 자신이 신실한 신자라는 것을 호소해야 했다. 물론 대화편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부분도 플라톤의 조작이라는 의심들이 있으나[8] 그렇게 되어봤자 신실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옮겨지는 것일 뿐 고대 그리스가 신본주의를 부정하는 사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위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문주의 해석에서 보듯, 그리스에서든 르네상스에서든 인문주의란 신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이라기보다는 교육받는 '인간성'에 대한 강조에 가까웠다.[9]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에는 유물론적 사상의 대두와 함께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퍼지게 되면서 마르크시즘과 결합하면서 인문주의는 신본주의에 대적하는 뉘앙스를 가지게 되어, 좌파, 진보성도 지니게 된다. 물론, 모든 인본주의가 좌파적이지는 않으며, 모든 좌익 사상이 인본주의적이진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인본주의가 신본주의와 대립된다고 하는 통설은 이 맥락이다.
하지만 인간애와 인간다움이라는 의미로서의 인본주의는 신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신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견지일 수도 있다. 인간은 신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환경철학(생태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로서의 인본주의는 오히려 신본주의와 연결되는 바가 있다. 대체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대립된다고 보는 시각은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의 대립, 곧 인간 이성(데카르트적인 신의 이성에서 유래된 인간 이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소는 무신론적인)과 신의 대립을 일컫는 것에 더욱 가깝다.
1.2. 관련 문서
2. 심리치료의 하나: 인본주의적 접근
임상심리학자 칼 로저스(C.Rogers)가 제안한 인간 중심 치료가 대표적이며,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임상 장면에 적용하는 흐름이다.이론적 체계화는 다소 미흡한 편이다. 칼 로저스는 이미 대가가 되어버린 자신의 말이 이론이 되고 그것이 도그마가 되어 다른 자유로운 생각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의 치료법을 공부하는 후학 임상가들은 "이게 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곤 한다. 논리적 추론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임상가의 현장의 직감으로 이해하고, 임상가 자신이 스스로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할 부분이 많다.
대중적으로 매우 널리 알려지고 매우 큰 인기를 끌었으며, 유명한 영화 굿 윌 헌팅의 명대사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인본주의적 치료법의 핵심 요체를 담고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현대에 들어 "심리상담은 무조건 우호적이고 따스한 분위기에서 지지와 격려와 위로만이 가득한 분위기일 것" 이라는 흔한 편견 및 고정관념을 만들어 낸 접근법이기도 하다.[10]
하지만 칼 로저스의 인간 중심 치료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위로, 격려, 지지만을 한다는 건 오해에 가깝다. 내담자의 체험이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여, 무시하거나 멋대로 판단하거나 분석하거나 헐띁는 것을 경계하고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상가 자신의 체험이나 감정 또한 중시하며, 이를 따듯한 시선을 담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는 임상가 자신이 자기자신을 잘 파악하고, 자기자신에게 솔직한 '자기 일치 상태'에 가까울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일 조용한 목소리로 미리 외워 온 듯한 내용을 말하는 내담자가 있다고 치자. 임상가가 이 면접이 매우 졸리고 지속하기 힘들다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말 열심히 말하고 있어요", "정말 즐거운 면접이에요" 처럼 말하면 이는 임상가가 자기 일치 상태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오히려 내담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만약 자기 일치 상태에 가까운 임상가라면 "지금 열심히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군요. 다만 지금 이야기가 이어지지 있고 굉장히 졸리네요.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같이 생각해 볼까요?" 처럼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이 방법은 임상가가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굉장히 기능적인 인간이어야 한다. 때문에 체계화가 비교적 힘들고,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현대의 심리치료는 무조건 인본주의적 접근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심리학사(史)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며, 비록 방법론은 다를지언정 후대의 긍정심리학과 같은 다른 흐름들에서도 인본주의적 접근의 큰 틀은 계승되고 있다.
이 분야의 유명한 학자 중 하나인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Maslow)가 제안한 욕구계층이론은 심리학 외에도 경영학, 행정학 등의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1] 돈의 논리 혹은 배금주의와도 대척점에 서 있다.[2] 당장 인간이 인간을 제외한 존재로부터 사상을 찾기가 힘들다.[3] 따라서 종교에서는 인본주의라는 말을 껄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인권에 대한 옹호나 인간 찬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본주의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의외일지 몰라도, 앞에 언급한 것들은 현대 신본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그 근거가 인간 그 자체에 있느냐, 천부적인 은총에 있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4] 한국의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종교개혁 시기의 humanism을 인문주의란 단어로 번역하여 근대 이후의 인본주의와 뉘앙스적으로 구별하고 있다.[5] 타고난 인간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교육 받는 인간성으로서 '폴리스의 일(=정치)'을 논할 수 있는 '인간다움'을 말한다.[6] 네이버 지식백과 인문주의 인용.[7] 교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들을 읽는 로마식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교부들은 속사도들의 제자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아니면 로마인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멸망 당시 문명의 붕괴로 유실될 뻔한 책들을 유일하다시피 보관한 곳도 교회였으며 철학책들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죽하면 스콜라 철학이 발달할 당시 철학책들은 대부분 유대 카발라 철학자들과 이슬람 신학자들이 번역해놓은 것을 재번역한 것이었다. 종교를 초월해서 고전을 살리려는 운동이 있었다.[8] 여담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다른 대화편보다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더 크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자체는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며 재판 당시 수백 명의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조작하다가 거짓말쟁이로 몰릴 수 있으므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큰 틀은 실제 변론과 큰 틀에서는 비슷할 것이다.[9] 르네상스인들은 최초의 근대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최후의 중세인들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반교회적인 인물들이라도 무신론이나 반종교적 사상을 가진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를테면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반교회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훌륭한 신앙이라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1513년 12월 10일에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본인 스스로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10] 사실은 상담자의 특성, 내담자의 특성, 상담자와 내담자의 상호작용, 상담자의 문제, 내담자의 문제 등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어떤 접근법으로 치료할지 상담자가 직접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