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07:45:18

인버고든 항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

1. 개요

Invergordon Mutiny

영국 해군의 대서양 함대에서 1931년 9월 15~16일에 발생한 대규모 항명 사태.

2. 배경

영국 정부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공부분의 지출을 삭감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해군을 포함한 모든 공공기관의 임금을 10%씩 삭감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1925년 이전에 입대한 수병들의 봉급지급 기준액을 이후의 입대자와 동일하게 변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실질적인 임금은 25% 가까이 감소했다. 이 삭감을 결정한 것은 노동당이었고 노동당을 지지했던 수병들은 이를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3. 전개

임금이 삭감된다는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하여 9월 11일에 인버고든 항에 주둔했던 수병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는 수병들을 동요시켰고 11일에 10척의 전함이 훈련을 위해 인버고든 항에 입항하면서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12일 밤에 순찰 중이던 HMS 워스파이트당직사관은 수병들이 폐점 시간을 넘기도록 PX를 열어 놓고 모여서 임금 삭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하고 폐점 및 해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병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당직사관이 지원을 요청하고 워스파이트의 함장이 지휘하는 지원병력이 도착하자 수병들은 해산하였다. 이후 이 일은 함대 사령관 윌프레드 톰킨슨[1] 해군 소장에게 보고되었으나 톰킨슨 제독은 이 사건을 해군성에 보고하였을 뿐 별다른 징계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틀 뒤인 14일에 HMS 넬슨 등 군함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이 시점에서 HMS 리펄스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워스파이트와 HMS 넬슨, HMS 로드니, HMS 밸리언트는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승조원들이 출항을 거부하고 입항 중 일과를 임의로 진행했으며 장교들이 출항을 감행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였다.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장교들이 해병대를 투입하려던 계획도 되려 똑같은 임금 삭감 대상으로 수병들과 함께 분노한 해병들이 되려 파업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톰킨슨 제독은 15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기동훈련을 연기시키고 이미 출항한 군함들을 복귀시켰다. 15일 오후에 톰킨슨 제독은 해군성에 다시 한 번 상황을 알리면서 수병들은 25%의 임금 삭감은 지나치다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항명 이외에 장교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 하던 해군성은 이에 임금 삭감은 10%에 불과하고 수병들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훈련을 재개할 것을 지시했는데 기존에 가담하지 않았던 순양함구축함 등 보조함들의 수병들과 더불어 부사관들까지 항명에 가담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수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기준액의 변경 없이 기존 임금의 10%만 삭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수병들은 즉각 임무에 복귀하였고 16일 아침에 모든 군함이 인버고든 항을 떠났다.

4. 이후

파업을 주도한 다수의 인원이 투옥되었고 200여명의 수병은 퇴역했으며 이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수병 200여명은 다른 곳으로 전출가게 되었다. 주도자 중 한 명인 렌 윈콧(Len Wincott)은 1934년에 소련으로 탈출하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전하였으나 영국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굴라크에 10년간 수감되었고 1983년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또 다른 주도자인 프레드 코프만(Fred Copeman)은 스페인 내전에서 영국 대대를 지휘하였다.

톰킨슨 제독은 수병들의 항명에 너무 관대하게 대처하였다고 비난받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유혈사태를 막은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만약 유혈사태가 터졌다면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결말되풀이했을 수도 있었으니...

영국 해군에서 이런 집단 항명은 의외로 뿌리가 깊은 편이다. 엄밀히 따지면 군법에서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는 항명 혹은 반란이지만 일종의 '파업' 형태로 용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임금의 인상이나 복지 개선와 같이 요구 조건이 합리적이고 장교들을 살상하지 않는 등 자체 규율을 준수하면 상부에서도 이는 수병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으로 인정하고 협상을 통해 타협을 시도했으며 주동자에게도 대부분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편이었다. 물론 그걸 넘어서는 요구를 하면 군법으로 처벌됐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스핏헤드-노어 반란이 있다. 1797년 4월 발생한 스핏헤드 반란은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는 떨어지는데 봉급이 장기간 동결된 것에 항의해 발생했다. 이 때 이들의 행동 수준은 상관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뿐이였다. 초계임무 등의 수병으로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프랑스군이 오면 바로 복귀한다를 약속했고 요구조건도 봉급 인상 및 악질 사관 처벌 등 순수한 처우 개선 뿐이었다. 정부측에서도 이걸 순수한 파업으로 인정해서 수병들의 신뢰를 얻고 있던 하우 제독을 보내서 요구조건을 적절히 들어주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했고 주동자들도 사면해서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한달만에 종료되었다. 노어 반란은 스핏헤드 반란의 영향으로 발생했는데 이들의 요구조건은 처우개선을 넘어서 의회 해산, 프랑스와의 빠른 강화 등 정부 정책에 대한 요구까지 있어서 완전히 반란으로 찍혀버렸다. 여기에 스핏헤드의 성과에 만족한 다수의 반란 참여자들이 복귀했고, 궁지에 몰린 주도자들은 프랑스로 도망치려다가 잡혀서 전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인버고든 항명은 스핏헤드에 가까웠다. 19세기 중후반에 접어들며 수병들의 처우가 이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등으로 이런 파업의 전통(?)이 해군에서 잠깐 끊겼다가 오랜만에 재현된 것이다.
[1] Wilfred Tomkinson(1877.11.15 – 1971.10.07). 1935년에 해군 중장으로 퇴역했다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였으며 1942년에 다시 퇴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