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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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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ut
[1]
1. 개요2. 상세
2.1. 배경 및 개발2.2. 스카우트 80, 800 시리즈 (1961~1971)2.3. 스카우트 II, 트래블러, 테라 (1971~1980)
3. 참고문헌


International Harvester Scout

1. 개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2]가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생산한 SUV 및 픽업트럭 라인업.

2. 상세

2.1. 배경 및 개발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는 사업 초창기부터 본업으로 삼았던 농기계 외에도 1907년부터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고, 1912년부터 픽업트럭을 포함한 상용차 사업에 집중하며 상용차 시장에 정착하였다. 특히 픽업트럭 부문은 1953년형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R-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든 트래블올(Travelall)을 출시하며 쉐보레 서버번과 경쟁하는 SUV 시장에도 진출했다.

한편,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는 지프 CJ랜드로버로 대표되는 1950년대 4륜구동 승용차 시장의 성장세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 시기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엔지니어링 총지배인을 비롯한 고위간부들이 미국 남서부에서 말을 4륜구동차로 대체하는 수요를 목격하게 되고, 엔지니어링 부서가 사내 디자이너 시어도어 오나스(Theodore “Ted” Ornas, 1917~2009)에게 말을 대체할 운송수단을 디자인하라는 전달사항을 전하며 1958년 3월부터 기획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참고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카이저-프레이저(Kaiser-Frazer)의 보급형 소형 승용차였던 헨리 J의 금형을 구매하자는 제안이 나오는가하면, 바닥부터 새로 개발하기 위한 참고모델로 기성 4륜차가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용성에만 몰두한 기성 4륜구동차는 이사진들의 반대에 번번히 부딪혔고, 무산 직전까지 간 끝에 시어도어 오나스가 둥근 측면부를 4륜구동차에 접목시킨 러프 스케치를 이사진 중 한 명에게 제안하며 프로젝트가 재개되었다.

시어도어 오나스가 동료 디자이너 찰스 맥그루(Charles McGrew)와 함께 디자인을 처음 구상할 당시에는 파이버글래스 금형을 차체에 적용하는 방안으로 제안되었기 때문에 굿이어와의 협력으로 실물 크기의 진공성형 목업(모형)을 제작, 1959년 6월에는 시장조사를 거쳐 지프 CJ의 패키징, 랜드로버의 경제성과 대조되는 긍정적인 전망을 얻어내고 경영진들의 최종 승인까지 다다르며 굿이어가 1959년 7월에 금형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차체를 사용하면서 실제 운용에 필요한 수준의 내구성을 갖추려면 들어가는 비용이 비싸질 것으로 나타나며 강철로 소재를 바꾸자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트럭 부문 대표의 제안을 수용, 7월 말에 클레이 모형을 완성하며 11월에 회사로부터 최종 승인을 얻고 디자인을 확정했다.

파워트레인으로는 기존 픽업트럭의 304ci(약 5.0L) V8 엔진을 4기통으로 줄인 최고출력 93hp, 배기량 152ci(약 2.6L)의 "코만치(Comanche)" 엔진을 개발했다. 기존 엔진의 설계를 유용하여 원활한 유지보수를 보장하고자 했으며 변속기는 보그워너(Borg-Warner)의 후륜구동 사양의 T-90A 3단 수동변속기, 4륜구동 사양은 T-14 3단 수동변속기를 결합했다. 여기에 4륜구동 사양은 다나 18(Dana 18) 트랜스퍼 케이스와 스파이서 27(Spicer 27) 전후륜 차축이 들어가고 스티어링 박스 및 링키지는 로스(Ross) 제품을 탑재하는 등, 엔진 이외의 나머지 구동계는 외부 업체의 기성품을 도입하여 4륜 리프 스프링 + 레더 프레임 섀시에 조합해 완성했다.

1959년 12월에 첫 프로토타입을 완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1960년 초에는 후륜구동 3대, 4륜구동 2대 조합의 프로토타입 5대를 수제작으로 완성, E-922부터 E-926에 이르는 코드명을 부여했다. 이들 중 E-924를 포함한 최소 2대가 최고출력 51hp을 내는 1.5L A-55 BMC 엔진을 탑재, 현실성 있는 파워트레인 조합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애리조나의 자체 테스트센터에서 오프로드, 폭염 기후상황에서의 가동을 포함한 각종 극한주행 테스트를 거쳤다. 0.5마일(약 800m)의 돌 포장도로 "벨지안 로드"를 포함한 2마일(약 3.2km)의 극한주행 테스트를 1천번 이상 진행하여 총 20만 마일(약 32만 km)의 주행 테스트를 거친 결과, 보다 적합한 파워를 발휘한다고 판단된 코만치 엔진을 최종 선택했다.

신차의 모델명은 "스카우트"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스카우트라는 상표명은 노드웰 인더스트리즈(Nodwell Industries)의 석유탐사용 무한궤도 차량 스카우트 카(Scout Car)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측이 대표 브루스 노드웰(Bruce Nodwell)과 면담하여 스카우트 카의 "스카우트"라는 상표명만 쓴다는 합의사항 하에 상표권을 2만 5천 달러의 가격으로 1960년 3월 1일에 인수했다.

생산지로는 다양한 후보지를 고려한 끝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포트 웨인 공장 인근에 위치한 U.S 러버[3]의 60에어커(약 73,450평, 혹은 약 242,811제곱미터) 규모의 스티어링 휠 공장이 후보로 낙점되어 1960년 4월 26일에 스티어링 휠 공장을 매입, 1960년 12월에 첫 생산을 개시했다.[4]

이렇게 완성된 스카우트는 총 24개월의 짧은 개발기간을 거쳤다. 시어도어 오나스는 자체엔진 및 생산시설조차 없는 상황, 그리고 개발시작 시점을 고려하면 독창적인 제품 컨셉트로 상당한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2.2. 스카우트 80, 800 시리즈 (1961~1971)

1960년 11월 21일에 첫 공식발표가 이루어졌으며, 1961년 1월 18일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스카우트 80으로 정식 공개되었다. 런칭 당시에는 단순 4륜구동차를 넘어완전 개방형 무개차, 픽업트럭, 스테이션 왜건 등의 형태로 가족용, 영업용, 취미용 차의 용도를 촌락, 시내에서 모두 충족하는 높은 범용성의 다용도차로 홍보했으며,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이고 보편성을 갖춘 디자인을 무기로 지프 CJ, 랜드로버 등의 통상 4륜구동차와 차별화했다.

스카우트는 전장 3,962mm, 휠베이스 2,540mm에 1열 3인승 시트, 전장 1,524mm의 적재공간과 1천 파운드(약 453.6kg) 이상의 적재능력을 구비했으며, 승차공간만 덮는 기본 하드탑 캡탑(Cab-Top) 외에도 A필러부터 화물칸까지 한번에 덮는 하드탑인 트래블탑(Travel-Top), 4륜구동, 각종 전후륜 차축[5], 리미티드 슬립 디퍼런셜 파워락(Powr-Lok)을 옵션으로 제공했다. 여기에 다용도 보급형 차라는 컨셉트에 입각하여 스카우트 80은 경첩이 노출된 중량 40파운드(약 18.1kg)의 1열 도어, 탈부착형 옆창문[6], 프레임 상단에 진공식 와이퍼가 탑재된 접이식 앞창문을 적용했다. 처음에는 승차공간, 적재공간 사이에 고정식 금속 격벽이 들어갔으나 이후 격벽을 탈부착식으로 교체했다. 바디 컬러는 흰색, 빨간색, 녹색, 청색, 노란색, 황갈색의 6가지를 제공했다.

이렇게 나온 스카우트 80의 가격은 2륜구동 1,771달러, 4륜구동 2,128달러 8센트로 책정되어 2륜구동 사양은 쉐보레 콜베어, 포드 팰컨, 플리머스 밸리언트 등의 자국 컴팩트카보다 저렴한 시작가를 자랑했다. 해외 판매도 진행하여 1961년 3월에 요르단 왕국의 국왕 후세인이 해외 고객 최초로 스카우트를 구입했고 호주, 캐나다 등지에서는 현지생산까지 단행했다.

스카우트 80은 런칭 당시에 호흥을 얻으면서 판매량이 예상수치의 3배에 달했고,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에서는 첫 한달간 스카우트 80의 하루 생산대수를 50대에서 100대로 2배까지 늘렸다. 이때 첫 연간 목표생산대수도 1만 대에서 2만 5천대로 급상승, 공장 근무에 2교대를 신설하고 하루 160대를 생산하는 차원까지 생산대수를 높인 결과로 1961년 연말까지 3만 5천대의 스카우트 80을 생산했다. 이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내 다른 차량들의 판매대수를 뛰어넘은 실적으로, 2륜구동이 주로 팔리던 당대 픽업트럭과 달리 스카우트 80은 1961년 5월 기준 판매량의 80%가 4륜구동 버전, 같은 해 11월에는 80%가 4륜+트래블탑 조합이었다. 나아가 스카우트의 현대적인 디자인은 사업가와 여성까지 고객층으로 유치하는 데 일조했다.

2.3. 스카우트 II, 트래블러, 테라 (1971~1980)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스카우트 80과 800 시리즈로 꾸준한 흥행을 거두는 동안 포드 브롱코, 지프 왜고니어와 지프스터 코만도, 닛산 패트롤같은 경쟁차들이 시장에 진입하며 4륜구동 승용차도 통상 승용차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는 스카우트의 후속차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에서는 선대 스카우트보다 사이즈를 키우는 동시에 매력도를 높이고 파워트레인 옵션을 다변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스카우트 80과 800에 이어서 시어도어 오나스가 개발에 참여했고, 디트로이트의 연구개발시설을 임대하여 그곳에서 대부분의 개발과정을 큰 이견 없이 순조롭게 거쳐 시어도어가 디자인 팀원을 직접 뽑고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개발을 주도했다. 개발 후반부에는 본사가 있는 인디아나의 포트 웨인, 연구소가 있는 디트로이트를 오가며 주당 2~5일을 투자하는 데 피로도를 토로하는 시어도어 오나스, 자체 연구개발시설을 준비하고 있었던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포트 웨인의 자체 시설로 디자인 작업을 옮겨 마무리했다.

이 개발과정에서 나온 최종 결과물은 사내에서 너무 곱상하다는 평가가 나왔는데, 완성된 시험차를 당시 시장의 경쟁차들과 포장도로 및 비포장도로 주행시험을 거쳐 비교하는 동안 당시 피드백을 제공했던 잠재고객층 대부분의 압도적인 호흥을 얻어내며 승인을 얻었다.

1971년 4월 19일에 첫 차가 출고되었으며,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스카우트 II로 명명되었다. 같은 휠베이스에 리어 오버행이 연장되었고, 2열 시트와 적재공간을 덮는 캐노피도 C필러 하단을 넓은 삼각꼴로 만들어 멋을 부렸다.

1971년에는 스카우트 II 기반의 장축 사양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통상 픽업트럭 라인을 대신하는 테라(Terra), 그리고 트래블올을 대신하는 트래블러(Traveler)라는 이름으로 등장, 1976년형으로 출시되었다. 이 시기에는 제 1차 석유파동의 여파에 대응하여 닛산 디젤엔진 옵션을 제공하며 미제 SUV 최초로 디젤엔진을 제공했다.

경영난[7]으로 인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SUV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1980년 10월 21일에 단종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출고된 차량은 닛산제 직렬 6기통 터보디젤 엔진이 탑재된 타이티안 레드 메탈릭(Tahitian Red Metallic, 진적색)의 표준형 모델이었다.

3. 참고문헌



[1] 사진은 1980년형 인터내셔널 스카우트 II 랠리(Rallye). 전용 데칼과 휠이 적용된 오프로드 특화 사양으로, 단종 직전까지 생산된 최후기형에 해당한다.[2]폭스바겐 그룹 산하의 나비스타.[3] U.S. Rubber, 미국의 합성고무 회사.[4] 당시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사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투데이"에 따르면 처음 출고된 스카우트 1호차는 메탈릭 청색 조합이었다. 스카우트 모터스의 공식 웹사이트에도 1호차의 보존개체가 실려 있으며, 후륜구동에 표준 하드탑이 적용되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직원이 구입하여 운행하다가 스카우트 전문가이자 부품 공급책 필 쿤로드(Phil Coonrod)가 2019년부터 복원을 진행해 2023년에 복원된 개체를 공개했다. 발견 당시 부식이 심각하고 많은 부속이 사라져서 복원을 거치는 동안 차대를 포함한 15퍼센트의 부속만 원형을 유지, 나머지 85퍼센트를 새로 보태 복원했다.[5] 앞차축은 스파이서 27과 27A, 뒷차축은 스파이서 22와 44(44는 1962년부터 제공)를 제공했다.[6] 1960년, 1961년 생산분과 극초기형 1962년 생산분 일부에만 적용.[7] 특히 1979년에서 1980년 사이 진행된 전미자동차노조의 파업이 큰 영향을 끼쳤다. 1950년에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전미자동차노조와 계약했을 당시에는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초과근무가 없었고 담당업무 내 가장 나이가 많은 노동조합원이 사내에서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는 당시 관행도 명문화했는데, 이를 바꾸려던 중 1978년에 신임 회장이자 CEO로 임명된 아치 맥카델(Archie McCardell)이 노사관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마당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미자동차노조 소속 노조위원장들과 가깝다고 판단한 인사들을 정리하는 등의 여파로 회사가 협상력을 상실, 노사 간 협상에 실패하며 반년에 이르는 대파업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