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0:11:30

임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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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농구 감독
파일:/image/001/2011/03/20/PYH2011032005020006500_P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임달식
林達植
출생 1964년 11월 16일 ([age(1964-11-16)]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4cm
직업 농구 선수 (가드 / 은퇴)
농구 감독
학력 휘문고 - 고려대
실업 입단 1986년 현대중공업 농구단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현대중공업-현대전자 농구단 (1986~1993)
감독 조선대학교 농구부 (2001~2007)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 (2007~2014)

1. 개요2. 선수 경력3. 방황4. 감독 경력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출신 감독.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가진 감독이다. 한때 삶의 밑바닥까지 갔으나 극적으로 재기해서 여자 농구계에서 무적 전설을 쓰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인물.

2. 선수 경력

파일:임달식 고려대 시절.jpg

휘문고 재학 시절 청소년 대표에도 선발되었던 나름대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고려대학교에 스카우트되면서 대학 무대에서도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였고 대학 무대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으며 현대전자에 스카우트가 되었고 실업 무대에 데뷔하였다. 실업 무대에서도 그럭저럭 자기 몫을 충실하게 소화하며 1986년에는 국가대표로도 선발될 정도로 괜찮은 재능을 보였다.

비록 특급의 스타는 아니었고 준수한 슈팅력에 수비력이 빼어나서 상대의 에이스를 막는데는 제격인 선수였다. 근성도 있고, 악착같은 면모가 있기 때문에 팀에서는 소금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선수. 추가로 외모 덕분에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이대로 선수 생활이 계속 흘러갔다면, 임달식의 인생은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평생의 꼬리표가 붙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1991년 3월 3일 부산에서 열린 1990-1991 농구대잔치 결승 2차전에서 기아자동차허재를 막다가 시비가 붙으면서 자기 팀의 김성욱과 함께[1] 주먹 다짐으로 연결되어 집단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경기는 난장판이 되었고, 각종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사실 허재가 실업 무대에 등장했을 때부터 임달식의 주된 임무는 허재의 전담 마크맨이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쌓인 감정이 이 때 이르러 폭발한 것이다. 먼저 주먹을 날렸다는 이유[2]로 임달식은 1년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이 때부터 임달식에게는 "허재를 때린 그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나중에 징계는 6개월 정지로 감면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임달식은 농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결국 1992년 팀을 이탈한 후 이듬해인 1993년 조용히 유니폼을 벗었다.[3]

3. 방황

사회에서 알아주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임달식은 세상 물정 모르는 운동 선수였고, 은퇴 준비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강남에 식당을 열면서 살려고 했지만, 식당 일이 썩 잘 풀리지 않았다. 마침 식당의 단골이던 프로골퍼들의 권유를 받아 1997년에 세미 프로 자격증을 얻어 프로 2부 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골프가 그리 만만한 운동은 아니기 때문에 상금 수입은 0에 가까웠고, 식당도 잘 안 되기 시작되었다. 급기야 IMF 직후에는 집도 날라가면서 월세방에서 가족들과 살아야 하는 처지로까지 떨어졌다.

결국 한국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임달식이 선택한 길은 캐나다 이민이었다. 이민 수속까지 다 밟고,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그는 부모의 만류에 결국 이민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로 돌아가게 된 것이 바로 농구였다.

4. 감독 경력

2001년 고려대 시절 은사인 박한 감독의 추천을 받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던 조선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조선대 농구부는 환경도 열악했고, 또 원래 2부 리그는 동아리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의 실력을 가졌고, 선수들도 크게 의욕을 가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달식은 조선대학교 농구부 선수들을 조련하면서 선수들의 의욕을 불어넣었고, 강훈련으로 그들의 실력을 다시 키웠다. 점차 2부 리그에서 적수가 없게 변하자 1부 리그 진입을 노렸고, 마침내 2004년부터 조선대학교는 1부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모든 팀들의 동네북이었다. 선수가 부족해서 공개 테스트를 희망하는 기사를 낼 정도로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노력 끝에 마침내 승리도 차지하고, 전국체전 준우승도 할 정도로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국프로농구에 정식으로 지명되는 선수들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팀을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선대학교에서 6년 간 감독으로 재임한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마침 공석이 된 여자 농구 팀 신한은행의 감독 자리. 무려 17명이나 응모해서 17:1의 경쟁률을 기록한 이 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바로 임달식이었다. 그렇게 임달식은 화려하게 농구로 재기할 수 있었다.

신한은행 재임 초기에는 비아냥도 많이 들었다. 왜냐면 이 팀은 전임 이영주 감독이 이미 만들어 놓은 팀이었기 때문. 바로 직전 시즌 우승 팀이자, FA로 하은주, 정선민을 데려온 초강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앉더라도 우승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임달식의 능력은 자연스럽게 강한 팀 전력 때문에 저평가받았다. 실제로 정규시즌 5연패 + 챔피언 결정전 5연패라는 불멸의 업적을 쌓았음에도 이는 순전히 선수들의 공이지, 감독이 한 것이 없다는 말도 나왔다. 마이클 조던스카티 피펜을 거느린 필 잭슨 감독이 시카고 불스에서 6번 우승한 것이 선수 빨이냐고 폄하할 것이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말이다.[4]

그러나 그 전력을 놀리지 않고 계속 우승하면서 임달식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2011-12 시즌 정선민의 이적과 팀의 정신적인 지주 전주원의 은퇴 이후에도 오히려 더 강한 전력을 만들면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하며 6연패를 달성하자, 이제 임달식을 더 이상 선수빨 타는 감독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서 대한민국 여자 농구의 새로운 주축 선수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최윤아, 김단비, 강영숙, 하은주, 이연화같은 식스 맨으로 출발한 선수들을 주전으로 키워 내면서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던 사람이 아님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이러면서 이제 여자 농구판에서 붙은 별명은 농달. 농구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그런 중에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았다.[5]

2012 - 2013 시즌 후에는 같은 팀에서 코치로 함께했던 위성우가 감독으로, 전주원이 코치로 선임된 우리은행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2013 - 2014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리은행에 패한 뒤 신한은행은 전격 경질을 발표했다.[6]

팬들은 임달식이 없는 신한은행은 상상할 수 없다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중.[7] 사퇴 전까지 개인 통산 199승으로 200승까지 단 1승이 모자란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8]

사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WNBA 시애틀 스톰 팀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2016년 3월 중국여자프로농구 산시팀과 3년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3개월 만에 사퇴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가 국대 감독을 맡을 때까지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2위였고 중국과 비벼볼만 하였다. 국대 감독직이 위성우에게 넘어가고 나서 무 전술에 체력만을 앞세운 우리은행 방식으로는 그후 단 한 번도 일본을 이겨보지 못했다.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 선임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1순위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농구 대표팀을 맡아 8강에 들었고,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판정속에 개최국 중국에 이은 2위를 기록 항상 어느 순간에도 성적은 나왔다.

5. 관련 문서



[1] 이 김성욱이 일명 싸움대장으로 불렸을 정도로 성격이 난폭했다.[2] 임달식이 허재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는 수준의 반칙을 저질렀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허재를 주먹으로 치려는 제스쳐를 취했고, 허재가 머리를 들이받자 주먹을 날렸다.[3] 물론 나중에 인생역전의 스토리로써 임달식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것은 높게 평가받아야 하지만 이 당시 인생을 밑바닥으로 보낸 단초를 제공한 허재와의 일은 임달식 본인이 잘못한 게 맞다. 팔꿈치로 가격하는 반칙에 오히려 주먹을 먼저 날렸으니 상대가 허재가 아니었어도 이슈가 컸을 문제로 대다수 농구 올드팬에게 기억됐고 실제로 90년대에 신문 1면을 장식했는데 90년대 신문 1면이면 나라안에서 가장 유명한 일이라고 봐도 된다.[4] 사실 잭슨도 샤크-코비 콤비를 거느리던 시절까진 명장이라는 평과 별개로 안티들로부터 실제로 폄훼를 많이 받았고, 이후 레이커스를 리빌딩부터 2연패팀까지 다시 끌어올리자 이런 목소리가 사라졌다. 선수들이 뛰어난 팀 감독은 어느 정도 폄훼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잭슨이나 임달식처럼 압도적인 실적으로 안티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감독들도 있다.[5] 선수 장악력과 리더십으로 2020년 현재도 대표팀 감독 후보로 꾸준히 나오고 있다.[6] 후임은 정인교 감독[7] 2023년 현재도 신한은행이 결승문턱도 못가본 걸 생각하면, 팬들은 아직까지 임달식을 그리워한다.[8] 이 기록은 2019-2020 시즌 라이벌이었던 위성우에 의해 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