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1:02:09

입헌민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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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立憲󠄁民政黨, ruby=りっけんみんせいとう)] | 입헌민정당
창당일 1927년 6월 1일
해산일 1940년 8월 15일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이념 자유주의 (일본)
진보주의[1]
경제적 자유주의
반(反) 입헌정우회
중일전쟁 이전:
의회중심주의
대중 유화파
중일전쟁 이후:
친(親) 군부
일본 내셔널리즘
보수주의
주요 정치인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마치다 추지
전신 헌정회, 정우본당[2]
후신 대정익찬회 (공식)
민주당(정신적)
없음 (전후 일본)[3][4]
1. 개요2. 역사3. 성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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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立憲󠄁民政黨, ruby=りっけんみんせいとう)]
Constitutional Democratic Party[5] (Rikken Minseitō)

일본 제국 시절 존재한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

2. 역사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중점으로 한 자유민권운동가들에 의해, 전신인 헌정회와 정우본당이 합당해 1927년 창당되었다.

1927년 4월, 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무너지고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서자, 입헌정우회에 맞서기 위해 전신인 헌정회와 앞서서 제2차 호헌운동 당시 기요우라 내각을 지지했던 정우본당의 합당으로 동년 6월에 창당되었다.

당의 대표 정치가로는 두 차례 집권한 경험이 있는 와카쓰키 레이지로 등이 있다. 다만 총리로는 1926년, 1931년 두 차례 집권하였으나 집권할 때마다 재수없게도 얼마 안가 와타나베 은행 파산 등 쇼와 금융공황과 대공황이 발생해서(...) 자리를 매번 1년 전후로밖에 지키지 못했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역시 대중의 높은 지지를 받은 총리였으나 극우 청년에게 암살 미수를 당해 총리 권한대행을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6]에게 잠시 맡기고 오랫동안 치료와 투병을 해야 했으며,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총리직에 복귀해 무리하다가 피격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때 와카쓰키 전 총리가 하마구치 총리의 후임으로 재입각했다.

창당 이후 입헌정우회와 정권을 여러 차례 교대하였으나 의석이 비슷한 경우가 많아 서로 내각이 오래 가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처음 참여한 1928년 16대 총선만 해도 민정당이 216석, 정우회가 218석, 기타 31석으로 팽팽했다. 그러다 1930년 하마구치의 지도 아래 17대 총선에서 273으로 정우회의 174석을 크게 누르며 처음으로 1당으로 발돋움하였으나, 전술한 경제정책의 혼선과 대공황으로 1932년 18대 총선에서는 146:301로 큰 폭으로 패했다. 다시 4년 뒤인 1936년에는 205:175로 다시 1당을 탈환하였으나 자당 총리를 배출하지는 못했고, 결국 1년 만인 1937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 해 총선에선 민정:정우 179:175로 크게 따라잡혔다.

1940년 군부에 의해 강제해산되며 공식적으로는 대정익찬회에 흡수된다.

역대 총재는 총 3명이 있었는데 1대인 하마구치 오사치, 2대인 와카쓰키 레이지로, 3대인 마치다 추지(町田忠治)가 있었다. 하마구치와 와카쓰키는 평화주의적 외교정책을 지향했고 이로 인해 친군부 우익단체들의 반감을 샀고 하마구치는 아예 암살당한다. 반면에 마치다 추지는 친군부 성향이였고 군부독재 시기 협력하였고, 전후에 일부 지지자와 함께 국체론을 주장하는 극우 정당인 일본진보당(日本進步黨)을 창당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추방을 당했다. 물론 그 전의 총재들은 중일전쟁조차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진보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자유주의적 외교를 지지했기 때문에 마치다 추지가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긴 하다. 사실 보수정당인 입헌정우회나 심지어 좌익정당인 사회대중당도 전범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해서[7],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군부에 협력했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추방 당한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3. 성향

창당 당시 의회주의, 인종-빈부격차 해소, 국제적인 평화와 협조주의, 국민 자유의 옹호를 주장했으며, 군축 실현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보수정당에 가까웠던 입헌정우회에 비교한다면 자유주의 포지션인 격. 또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편인 정우회와 달리 자유무역긴축재정, 금본위제 (부활) 등을 주장했다.[8] 그래서 지주 등이 지지 기반이던 정우회와 달리 도시 중산층 등이 주요 지지 기반이었다.

4. 여담

  • 전후 일본 자민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된 일본자유당[9]의 전신인 입헌정우회와 달리, 입헌민정당은 여러 이유로 유의미한 후신으로써의 자유주의/리버럴 세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덕분에 전후 20세기 일본은 원론적인 자유주의 세력보다는 자민당 주도 보수 세력과 일본사회당 주도 혁신 세력이 주도하게 된다. 물론 자민당 자체가 빅텐트 정당 성격도 있다보니 1990년대 당내 내분으로 온건파들이 탈당하고 내셔널리즘 세력이 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자민당에는 당 내 좌파 포지션인 자유주의자(리버럴)들이 꽤 있긴 했다.[10] 허나 이들 중 상당수가 탈당해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했는데, 1996년에 사키가케 계열 인사들이 사회민주당 우파 계열 인사들과 손잡아 창당한 구 민주당부터 현재 일본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그 토대가 잡힌 것으로 평가받기에, 이때 민주당과 입헌민정당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엔 너무 세월이 떨어져있긴 하다.[11] 다만, 입헌민주당처럼 이 당과 유사한 명칭을 쓰기도 한다.
  • 농민이나 지주를 주요 지지층으로 삼은 보수정당인 입헌정우회와 비교해 도시의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했다. 미쓰비시 재벌을 정치적 스폰서로 삼기도 했는데, 가토 다카아키가 미쓰비시의 오너 가문인 이와사키 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당 수뇌부와 인맥이 형성되었다.[12]

[1] 자유민권운동 등 급진적인 민권운동가들이 주도한 정당이였고, 경제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2] 1924년 기요우라 게이고를 지지하며 입헌정우회에서 당내 일부가 탈당해 세운 정당.[3] 입헌정우회와 달리 이렇다 할 후신이라고 볼 만한 정당이 없다. 일본자유당, 일본사회당, 일본진보당(강경우파) 등 여러 정당으로 갈라졌다.[4]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전후에 국체론을 지지한 극우 정당인 일본진보당(日本進步黨)을 실질적인 후신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입헌민정당의 마지막 총재인 마치다 추지 개인이 대정익찬회/군국주의 체제에 협력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당의 직접적인 후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입헌민정당 정치인들 중 대정익찬회의 일당독재에 항거한 정치인들도 꽤 많이 있었고, 당에서 배출한 주요 총리들도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입헌적 자유주의자들이였다. 현 일본의 자유주의 혁신정당입헌민주당도 이 정당의 명칭에서 가져온 것이다.[5] 공교롭게도 2017년 등장한 일본의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공식 당명도 Constitutional Democratic Party of Japan이다.[6] 다만 시데하라는 귀족원 의원 시절 입헌민정당에 우호적인 원내회파 동화회(同和會)에서만 활동해서 정식으로 당적을 가진 적은 없었다.[7] 아소 히사시, 가와카미 조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 사대당 중도파 인사들을 말한다.[8] 다만 금본위제는 결과적으로 1930년 집권 이후 1년만에 철회해야 했고 경기는 악화되었다.[9] 자유당(일본 1950년)의 전신이다.[10] 미키 다케오같은 사회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인사까지 있었을 정도이다.[11] 오히려 민주당은 계보 상 사회대중당 - 일본사회당의 실질적인 후신 정당에 가깝다.[12] 출처: 아와야 겐타로 저, 일본의 서적 <쇼와의 정당> 184-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