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2 16:30:45

잉고 슈비텐베르크

1. 개요2. 죽음3. 여담4. 앨범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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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고 슈비흐텐베르크(Ingo "Mr. Smile" Schwichtenberg, 1965. 05. 18. ~ 1995. 03. 08.)는 독일의 드러머로, 파워메탈 밴드 헬로윈[1]의 시작부터 중기까지 함께한 멤버로 잘 알려져 있다.
헬로윈은 굉장히 스피디하고 엄청난 스테미너를 요하는 음악들이 많다. 당장 이들의 데뷔엘범 Walls of Jericho의 1번트랙 Ride the Sky부터 들어보면 1985년 음악인데도 정말 드러머 죽겠다 싶을 정도로 딱 한텀 정도 빼면 거의 모든 구간에서 미칠듯이 더블 베이스를 밟는다. 드럼 소리가 잘 들리는 라이브 버전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1번 트랙부터 이 지경인데 그 다음 이어지는 트랙들, 대표적으로 "How Many Tears"도 8분대의 곡에 정말 노가다 드러밍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엄청나게 계속 두드려댄다.

이들의 명반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 2"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들은 이보다 더길어서 "Halloween"이 13분 18초, "Keeper of The Seven Keys"가 13분 37초에 이르는 대곡으로 체력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곡들이다. 그리고 잉고는 이 곡들을 끊이지 않는 에너지와 파워로 받아 달렸던 드러머였다.[2] 늘 웃는 모습을 보이며 힘을 북돋는 이미지의 그에게 밴드 멤버들은 "Mr. Smile"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3] 그냥 1980년대 중후반 당시 최고의 파워메탈 드러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2. 죽음

그의 정신적 문제는 1989년쯤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월 1일에 잉고의 친구이자 밴드의 주요 멤버 카이 한센이 음악적 방향 차이 등의 문제로 밴드를 떠나 롤랜드 그라포우를 영입하여 미국 투어를 진행한 것은 둘째 치고, 그동안의 음반사 노이즈 레코드를 떠나 EMI 레코드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으며 소송이 걸렸다. 1990년에 법적 분쟁은 끝났는데, 헬로윈이 패배하여 수많은 돈을 노이즈에 물어야 했고 심지어는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땅에서 음반을 내거나 공연을 하면 안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잉고는 "밴드와 내게 모두 끔찍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힘든 경험을 한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4]

1991년에 "Pink Bubbles Go Ape"를 발매하였으나[5] 바뀐 음악성 때문에 그닥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끝내 1993년 발매된 "Chameleon"은 밴드 최악의 앨범이라 불릴 만큼 실패한다. 밴드 내에 긴장감이 감돌던 이 기간 동안 잉고의 신체 및 정신건강은 악화되었고 알코올[6]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결국 히로시마 공연 중 잉고는 쓰러졌고 바로 병원에 실려갔는데, 치료 기간 동안 유전성 조현병에 걸렸음을 진단받았다.[7]

멤버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카멜레온 투어 중간에 잉고를 탈퇴시켰다. 나머지 투어 공연들은 리치 압둘-나비가 대신하였으며, 후에 감마 레이에 있던 드러머 울리 쿠쉬가 정식 멤버로 들어온다.

1995년 3월 8일, 끝내 잉고는 누나 라우라 슈비흐텐베르크에게 미안하다는 메모를 남긴 채 지하철[8][9]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주위 사람들과 메탈헤드들뿐만 아니라 헬로윈 멤버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카이 또한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인적인 만남에서 감마 레이의 드럼 녹음에 참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고 그는 승낙했는데,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라고 언급하였다.

잉고에 대해서는 멤버들이 상당히 안타까워 하고 있으며 앤디 데리스의 경우 밴드가 얼마나 그의 치료를 위해 투자를 하고 노력했는지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의 사후 카이 한센은 감마레이 4집 "Land of the Free" 앨범에 추모곡 "Afterlife"를 담았고 마이클 키스케 역시 같은 해 발매된 그의 첫 솔로 앨범 "Instant Clarity"에 "Always"란 곡으로 추모를 했다. 또한 헬로윈 멤버들도 잉고의 유작이 된 "Chameleon"에 "Step Out of Hell"이란 곡으로 그의 알콜, 약물 중독 극복을 희망하는 곡을 담았다. (롤랜드 그라포우 작곡)

비교적 최근에 밴드의 Pumkins United Tour[10]에서 잉고의 드럼 솔로 영상을 틀어주었고,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

락 음악 역사 속 굉장의 안타까운 인물들 중 하나이며 만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해서 더 크게 음악적 역량을 펼쳐보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의 엄청난 에너지와 파워는 특히 라이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다른 곡은 제외하고라도 "Live in The U.K."의 마지막곡 "How Many Tears"는 꼭 들어보시라.

3. 여담

드럼을 배우기 전, 잉고는 14살에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클라리넷 레슨을 받으며 학교 내 포크 밴드에 가입했다. 그러나 드러머의 실력은 형편없었고 1979년 말, 결국 자신이 드럼 세트 앞에 앉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진지하게 드럼 연주를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11] 참고로 많은 락 뮤지션들이 그렇듯 베이스, 기타 등의 나머지 주요 밴드 악기뿐만 아니라 플루트도 연주할 줄 안다.

15살에 옆집에서 살던 카이 한센과 만났는데, 둘은 급속하게 친해졌고 카이가 자신의 새로운 밴드[12]의 드러머가 필요하다고 하자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밴드는 '세컨드 헬', '아이언 피스트'를 거쳐 헬로윈이 된다.

AC/DC의 전 드러머 필 러드와 주다스 프리스트의 전 드러머 레스 빙크스에게 주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밴드 리허설에서 주다스 프리스트의 곡을 많이 연주했다고.

잉고에 대해 남은 자료는 아주 적지만, 최근 가족이 그를 기리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현재까지 몇 개의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4. 앨범

Helloween 스튜디오 앨범
  • Helloween (1985)
  • Walls of Jericho (1985)
  •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I (1987)
  •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II (1988)
  • Pink Bubbles Go Ape (1991)
  • Chameleon (1993)
Helloweens의 라이브 앨범
  • Live in The U.K. (1989)

[1] 헬로윈의 밴드 네임은 본인이 지었다. 1984년에 영화 Halloween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2] 예전 핫 뮤직 특별 코너 "더블 베이스 드러밍의 최강자들"에서도 그의 연주가 꼽혔다.[3] 허나 인터뷰 내용 및 영상들을 보면 실제 성격은 내성적이고 섬세함에 가까운 듯.[4] 이 때 한 밴드 멤버가 "잉고는 본 조비 스타일의 잘생긴 사람이었는데, 1991년에 다시 만난 뒤 10년은 늙어 보여서 깜짝 놀랐다."라고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사진을 보면 잉고가 본인 피셜 183cm, 78kg의 건장한 체격에 눈이 길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5] 처음에는 일본과 영국에서만 발매, 1992년에 노이즈와 EMI가 합의를 보고 나서야 독일을 포함한 나머지 유럽 대륙에 발매.[6] 본래 술을 좋아하긴 했다.[7] 이 때의 잉고는 의사들과 약물 치료 등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치유"를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정신증은 약물 치료가 필수이며 방치될 경우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안타깝게도 다수 조현병 환자들처럼 잉고 또한 병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8] 그는 점심 시간에 역 근처에 머물렀는데, 항상 울고 있었다고 한다.[9] 흔히 지하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광역전철 격인 함부르크 S반 S1, S11선 프리드리히스베르크(Friedrichsberg) 역이었다.[10] 최전성기를 함께한 전 멤버들(미하엘 키스케, 카이 한센)과 현 멤버들(미하엘 바이카스, 마커스 그로스코프, 사샤 거슈트너, 다니 뢰블레, 앤디 데리스)이 모두 모였다![11] 참고로 독학으로 익혔다.[12] 정확히는 헬로윈의 전신인 젠트리(Gentry). 당시 멤버 중 카이와 잉고뿐만 아니라 베이시스트 마커스 그로스코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