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5:46:27

자연주의에 대한 진화론적 반론

1. 개요2. EAAN의 내용3. 비판
3.1. 인류의 지식이 생존의 필요에만 얽매여 있지는 않다는 점3.2. 과학적 지식의 신뢰 가능성3.3.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다르다3.4. 과학에서 거짓인 것이 철학에서 참이 될 수는 없다는 점3.5. 이성적인 위키에 등재된 반박3.6. EAAN는 표상주의 진리관을 가정하고 있다는 반박
4. 관련 문서5. 외부 링크

1. 개요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미국의 분석철학자이자 기독교 철학자인 알빈 플란팅가가 주장한 논증으로, C.S 루이스의 이성 논증(argument from Reason)을 확장한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진화론자연주의가 결합된 무목적 진화는 우리의 인식이 믿을 만 하다는 '믿음'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자연주의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로, 그는 자연주의를 "유신론적 종교에서 말하는 그러한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신 비슷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정의한다. 즉 '자연주의'와 '무신론'을 사실상 동일한 용어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무신론과 진화론을 동시에 믿는것은 비합리적이다'라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2. EAAN의 내용

N을 자연주의라 하고, E를 현재의 진화론이라 하고, R을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우리의 인지 능력은 믿을만 하다라는 명제라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증이 나온다.

(1) P(R|N&E)[1]는 낮거나 불가해하다.
(2) N&E[2]를 받아들이며 또 (1)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R[3]에 대한 결정적 반박에 봉착한다
(3) 이러한 결정적 반박은 반박될 수 없다
(4) R에 대한 결정적 반박에 봉착한 사람은 또한 자신의 인지 능력을 통해 얻어진 모든 믿음들에 대한 결정적 반박에도 역시 봉착하게 된다. N&E라는 믿음도 포함해서 말이다. 따라서 다음이 도출된다.
(5) N&E는 자기 반박적이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위 논증을 해설한 가톨릭 철학자 에드워드 페저(Edward Fes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AAN은 자연선택을 통해서는 생존에 이점이 있는 행동이 선택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행동은 참된 믿음과 결부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다. 적응을 통해 산출된 행동이 거짓된 믿음과 결부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하다면, 자연선택이 참된 믿음을 신빙성 있게 산출한다는 (혹은 참된 믿음을 일반적으로 산출한다는 조건이 있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진화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의 기원에 대해서 일부만을 해명한다면, 이것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만약 신이 존재하고 신이 자연선택을 통해 발생한 신경적 과정이 일반적으로 참된 믿음과 결부되도록 보장한다면, 우리의 인지적 능력은 신뢰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연주의가 주장하는 대로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인지적 능력은 신뢰할 만 하지 않다. 그것은 신뢰할 만 한 것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그것이 그러하다고 믿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인지적 능력을 통해 산출된 믿음 또한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주의자에게 있어서 자연주의가 그러한 믿음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주의 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 진화는 비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더 잘 해석될 수 있다." [4]

보다 자세한 논리 전개는 번역된 플란팅가의 논문을 보면 알 수 있다. 플란팅가의 서강대 강연 정리 논문.

3. 비판

문제는 플란팅가 본인이 과학자가 아닌 탓인지, 과학적 지식이나 방법론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부족하다.[5] 목적성이 없는 진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진화라는 것을 '생존력이 뛰어난 쪽이 무조건 선택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인지능력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물론 진화생물학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생존력이 뛰어나지 않은 쪽도 얼마든지 선택될 수 있고, 반대로 생존력이 뛰어난 쪽이 무조건 선택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과학자들의 자연주의를 자연스레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로 해석해서 지적하고 있는데 과학자들 중 이러한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므로 어느 정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논증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모든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역 비판이 아니라, 자연주의를 베이스로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이다. 실제로 그런 과학자들은 꽤나 존재하기에, 허수아비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 글은 논증의 핵심 요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 플란팅가는 '생존력이 뛰어난 쪽이 무조건 선택되는 것'이라고 진화를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인지능력 또한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으로 형성되었다면, 그 방향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지능력 자체의 신뢰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 논증을 해설한 가톨릭 철학자 에드워드 페저(Edward Feser)부터가 "자연선택을 통해서는 생존에 이점이 있는 행동이 선택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분명히 하고 있는데, '생존력이 뛰어난 쪽이 무조건 선택되는 것'이 진화를 정의하지 않았다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비판을 피하기 위한 면피성 발언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인간의 인지능력이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으로 형성되었다면 그 방향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지능력 자체의 신뢰도를 보장하지 못 한다"는 말도 이상한데, 방향성을 알 수 없는 건 미래의 일이지, 이미 일어난 현재나 지나온 과거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방향성을 알 수 없어서 인지능력이 보장하지 못 하는게 아니라, 그런 방향성을 이끄는 목적성이 없기 때문에 신뢰도를 보장하지 못 한다는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3.1. 인류의 지식이 생존의 필요에만 얽매여 있지는 않다는 점

EAAN에서는 "무목적적 진화에서는 생존에 유용한 지식이 발달한다. 그런데 생존에 유용한 지식이 반드시 옳다고 신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무목적적 진화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인류의 지식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목적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발달해 온 지성이라고 해서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생존의 필요에 얽매여 있다고 보는 것은 발생학적 오류에 해당한다.

인류의 지성이 동물로부터 진화해왔다고 해서 현재도 동물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농업 혁명 등을 통해 인류는 단지 생존에만 급급한 수준을 벗어나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탈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동물로부터 진화해왔다는 말을 인류가 현재도 동물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받아들여 반박하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무척 고전적인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인류는 인류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예컨대 우주나 입자물리학에 대한 지식에 골몰하여, 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며, 힉스 입자를 발견해내는 등 눈부신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굳이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을 가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은 동물로부터 진화해 온 생물인 인간이,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다양한 지식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3.2. 과학적 지식의 신뢰 가능성

또한 EAAN은 인류의 지식이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에 의해서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목적적 진화라는 개념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EAAN처럼 인류의 지식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문제 제기는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철학적 주제다. 인류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지적은 늘 옳은 주장이긴 하다. 그러나 EAAN의 주장자들은 "진화를 비롯한 과학적 지식을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려면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비록 인류의 과학적 지식이 불완전하며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 완전히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EAAN의 주장자들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인류는 오랜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어 온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과학적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지 하는 규칙을 발견해낸 것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한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 인류는 지식의 신뢰 가능성을 자연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상대적으로 확보하고 또 그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가며 신뢰성을 쌓아왔고, 뉴튼의 3대 법칙이나 만유인력의 법칙 등, 적어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확신할 수 있는 지식들을 발견해냈다. EAAN의 주장자들 스스로도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지식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지식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을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주의적 과학사에서도 충분히 이러한 발견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인류는 적어도 어떤 지식이 다른 지식보다 더 확실한지 더 불확실한지의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 아무리 진화론에 대해 지적 상대주의를 들이대서 불확실한 지식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항상 "그래도 지적설계보다는 훨씬 더 확실한 지식이다"라고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EAAN의 주장자들은 자연주의 역시 하나의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하며 지적설계와 똑같은 차원으로 끌어내리려 애쓰곤 하지만, 자연주의적 과학 체계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근거를 갖춘 체계적인 믿음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지적설계 따위와 같은 의미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굳이 과학적 지식을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의 지식은 늘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며, 그 불완전함과 불확실함 때문에 인류의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리고 지식의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을 가장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자연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인 것이다. 과학적 지식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주의를 버려야 할 이유가 전혀 될 수 없다.

사실 EAAN의 과학을 참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존재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과학과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자연주의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을 알 수 있다.[6]

3.3.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다르다

보통 과학계에서 말하는 자연주의란 거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사실 과학자들의 대다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니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니 하는 것들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단지 훈련받은, 혹은 체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할 뿐이고, 이러한 방식이 철학적으로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로 구분될 뿐이다.[7]

그리고 EAAN논증 자체가 과학 자체나 방법론적 자연주의+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닌,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진화론나 무신론+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8]인데, Alvin Plantinga: Science & Religion 라는 강연 제목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 플란팅가가 이것이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도 되는 양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처럼 부풀려서 선전하고있는 것이 문제다.

3.4. 과학에서 거짓인 것이 철학에서 참이 될 수는 없다는 점

우선, EAAN이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론적 진화'라는 개념이 단지 좁은 의미의 과학 학계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학문 세계 전반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적설계가 바로 '목적론적 진화론'의 한 예이다.

지금의 현대 철학은 과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해체주의로 치달아, 현실에서의 입증 가능성 없이 추상적인 말놀이에만 골몰하여 대중 및 과학계에 있어 '쓸모없는 것',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게 된 것에 대해 반성이 이루어지면서, 철학이 과학계에서의 성과와 서로 조응할 수 있고 서로 설명될 수 있도록 하는 사유 체계와 기반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9]

더군다나 플란팅가의 이 주장은 철학계 내에서조차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소수 주장일 뿐이다. 마치 플란팅가의 주장이 철학계 전체를 대표하여 과학계와 대립하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은 플란팅가에 대한 부당한 과대평가라 할 수 있다.

3.5. 이성적인 위키에 등재된 반박

해외 무신론 위키인 '이성적인 위키'의 알빈 플란팅가 문서에서도 플란팅가의 해당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이 실려 있다.

첫째, "참인 믿음"과 "생존에 유용한 믿음" 사이에 공통 영역이 없거나 적다고 믿을 근거가 없다. 즉, 생존에 유용한 지식들 중 상당수가 진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딸기 덤불을 보고 "저 덤불은 딸기로 가득차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진실인 동시에 생존에 유용하다.

둘째, 플란팅가는 다윈이 1881년에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문맥을 왜곡하여 인용하고 있다.
"나에게, 하등 동물의 정신에서 발달된 인간의 정신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혹은 정말로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의심이 항상 생겨났다."
'이성적인 위키'는 이 문장이, 다윈이 모든 종류의 지식에 의심을 제기했다는 뜻은 아님을 지적한다. 다윈은 이 문장을 통해서 단지 형이상학 등의 범주에 관해서 의심을 제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10]

셋째, 과학계와 철학계가 이미 인지적 편향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해 오고 있음을 플란팅가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학계는 어떤 개든지 맞닥뜨릴 수 있는 편향을 항상 검토해 왔다. 그래서 각종 편견을 낳는 인지적 편향들[11]을 고치고 수학,통계를 비롯한 도구를 발전시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양자 역학과 같은 비직관적 분야에서조차 과학적 성과가 있었던 것은 이들 노력이 뒷받침되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플란팅가가 제기한 것과 같은 편향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과학적 모델들은, 플란팅가가 해당 문제를 제기하기도 전부터 이미 제시되고 있었다.

넷째,[12] 우리의 지식이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에 의존한다면, 그 지식을 믿을 수 있다는 근거는 또 무엇인가? 막말로, 인류의 지적 발전에 개입한 그 초자연적 존재가 이 아닌 사탄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플란팅가가 자연주의를 공격한 논리를 그대로 초자연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백번 양보해서 그 초자연적 존재가 믿을만한 존재라고 치자. 그러면, 그 존재가 진화론의 모든 증거를 창조하고, 또 인류에게 그 증거들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성을 갖게끔 창조했단 말인가? 그 존재가 인류를 그런 식으로 속였다면, 다른 방식으로 속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는가?

3.6. EAAN는 표상주의 진리관을 가정하고 있다는 반박

표상주의 진리관에 따르면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하며 지식이란 바로 그러한 세계에 대한 앎이다. 즉 지식은 객관적으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플란팅가의 EAAN 논증은 객관적으로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정을 갖고 있는데, 만약 인식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하더라도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정이 정당화 되지 않는다면 EAAN 논증은 허수아비 공격에 불과하다.

흔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과학도들이 EAAN 논증에 반감을 갖는 이유는 EAAN이 마치 진화론을 까기 위한 논증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이들 중 대부분은 EAAN 논증에 허수아비 공격을 하고 있다. 이 논증은 과학과 무관한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논증이며,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전제를 취하고 있다. 문제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과학도들의 경우, 이 전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과학은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를 가정하고 이에 대한 탐구를 하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하기 위해 반드시 이런 세계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정당성이 생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특히 실용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플란팅가의 논증은 전혀 위협이 될 수 없다. 가령 실용주의의 창시자 중 한명인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어떠한 믿음이든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하고 그 믿음이 실증적으로 반박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믿음을 진리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런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지식은 인식론적으로 참이라고 정당화되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그 설명이 합리적이고 정합적이라면 그것은 진리로 간주될 수 있다.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참인 믿음은 실증적으로 반박되지 않은 유용한 믿음이다)

현대철학에서 반표상주의적 입장이 전반적으로 지배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EAAN 논증은 진화적 무신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절대 되지 못한다.[13]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진화론자+자연주의(무신론)자들에게 던지는 핵폭탄: 진화론과 무신론은 합리적으로 양립 불가능.
플란팅가의 서강대 강연 정리 논문.
플란팅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 플란팅가는 진화론이 무신론을 완성한다고 주장하는 도킨스에게 도리어 이렇게 응답한다. 진화론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유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일 것이다라고.




[1] 자연주의와 진화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지 능력이 믿을만하다고 할 확률[2] 자연주의와 진화론[3] 우리의 인지 능력이 믿을만함[4] 미국 가톨릭 철학자 에드워드 페저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http://edwardfeser.blogspot.kr/2013/01/schliesser-on-evolutionary-argument.html[5] 그의 옹호자들은 플란팅가는 지적설계를 옹호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그가 지적설계와 궤를 같이하거나 심지어 그보다 더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통조상 논제의 거부 및 초자연주의적 현상도 허용하는 어거스틴 과학의 요청[6] 지적설계에 대한 비판 중에 인간과 생물의 불완전하거나 불합리한 신체구조 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7] 물론 21세기에 들어선 현재는 과거에 비해 방법론적 자연주의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나 물리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과학자들이 많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과학자라고 해서 일부에서 오해하듯이 꼭 그러한 사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 포인트.[8] 그러나 이쪽(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을 상대로도 다양한 반박을 당했다.[9] 로이 바스카, <철학과 과학적 실재론>,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 한울아카데미[10] John S. Wilkins. Plantinga's EAAN. Evolving Thoughts, Jan. 31, 2012. Rational Wiki의 Alvin Plantinga 문서로부터 재인용.[11] 이 중 많은 것들이 자연선택의 산물이다.[12] 이 비판은 사실 철학자 Branden Fitelson과 Elliott Sober가 제기한 것이다.#[13] 보통 무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엄밀한 용어가 아니다. 진화론 자체는 유신론/무신론이 없는 가치중립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적 무신론이 그 용어로 적절하다. 실제로 기독교 과학자들은 진화적 무신론/유신론을 구분한다. 이는 과학과 무관한 종교적/형이상학적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