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0:02:16

자유중국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자유중국지와 정부의 마찰3.2. 장제스의 2선 연임과 중국 민주당의 창당3.3. 뇌진의 체포3.4. 반응
4. 결과5. 참고 문헌

1. 개요

1960년 9월 12일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장제스 총통의 2선과 중국국민당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자유중국지 발행인 뇌진을 중국공산당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탄압한 사건.

2. 배경

국부천대 이후 위태롭던 중화민국 정부는 미국자유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한동안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온건한 정책을 취했다. 이때 미국에 거주하던 전 주미대사이자 저명한 철학자 후스1949년 11월 20일, 타이베이에서 <자유중국> 잡지를 창간하여 반공을 주장하는 한편 장제스에게 서구 민주주의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후스는 장제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었고 중국국민당 정권의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에 후스의 보호 아래에 자유중국지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1950년대 초 자유중국지의 발행인은 뇌진으로 교체되었고 뇌진은 은해광 등과 함께 대만 사회의 민주화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미국제7함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의 안보를 지원하기 시작하고 대만에서의 국민당 통치가 안정화되면서 국민당 정권은 차차 자유주의자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는데 군대의 당료화와 정보통치에 반대하는 자유중국지 역시 국민당 정권에겐 눈엣가시였다. 특히 공산당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 내부에 당부를 설치하려던 장징궈는 뇌진을 직접 찾아가 따질 정도로 뇌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중국지는 1951년 6월 1일 타이완성 보안사령부가 고리대 금융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폭로하는 등 정부와 계속 충돌하였다.

3. 전개

3.1. 자유중국지와 정부의 마찰

자유중국지는 1950년대 정부와의 충돌에서 후스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 후스는 뇌진의 정부 비판 사설을 크게 칭찬하면서 언론의 자유가 부재함은 대만 정치의 가장 큰 치욕이라고 정부를 호되게 비판했다고 1956년에는 장제스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70세 넘었으니 퇴진하라고 대놓고 직언을 하여 국민당 정권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에 국방부는 자유중국지를 독소적인 사상의 배후이자 불량하기 그지없는 부당한 야심가라고 비난하고 이를 우궈전의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매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1958년 자유중국 포위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진회기가 뇌진을 고소하는 뇌진 고소사건이 일어나는 등 자유중국지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후스는 이때도 개입하여 뇌진을 보호하며 언론자유,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옹호하였고 성사아, 호추원 등 국민당의 온건파 정치인들이 자유중국지를 너무 핍박하는 것은 국민당과 정부의 명예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유화론을 주장하여 1959년의 정치적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960년 제3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가 다가오면서 자유중국지와 국민당의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3.2. 장제스의 2선 연임과 중국 민주당의 창당

장제스는 1948년과 1954년 두 차례 총통에 당선되었으므로 중화민국 헌법 47조에 의거하여 더 이상 총통에 출마할 수 없었다. 이에 자유파 인사들은 후스천청을 새로운 총통으로 추대하여 대만의 민주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장제스의 친위 세력은 장제스의 3선을 위해 개헌을 주장하였고 호헌파와 대립하였다. 장제스는 개헌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힘으로 잠시 호헌파 인사들을 고무시켰지만 머지않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개정을 통한 연임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60년 2월 20일 소집된 3차 국민대회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에 의거하여 동원감란시기에는 헌법 47조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임시규정을 통해 장제스를 3대 총통 후보로 추대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예의상 사양하였다가 민의를 받아들인다는 구실로 수용해 1960년 3월 21일에 3대 총통에 당선되었다.

자유중국지로 대표되는 호헌파, 자유파 인사들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1959년 1월 자유중국 20권 1기에 발표된 <기쁨 속의 우려>, 6월 16일 발표한 20권 12기의 <장 총통이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까?>등 일련의 글을 게재하여 장제스의 3선에 반대하던 자유중국지는 즉각 장제스의 3선을 비판하는 글들을 연재하였다. 조덕선이 <장 총통이 계속 영도하는 것은 옹호하지만 연임에는 반대한다>를 발표했으며 부정이 <헌법을 보호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를, 양금호가 <어찌 어용 대법관의 해석과 만용을 용납하겠는가!>를, 뇌진이 <국민대표대회 대표들에게 드리는 몇마디의 고언을>을, 좌순생이 <우리들은 헌법을 파괴하려 책동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를 발표하여 장제스의 3선을 맹렬히 규탄하였다. 장제스의 취임식 이후 자유중국지는 <장 총통은 어떻게 역사에 설명을 할 것인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국을 격노하게 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후스의 체면을 보아서 자유중국지의 비판을 한동안 묵인하였다. 허나 이에 고무된 뇌진은 수위조절에 실패하고 더욱 가열찬 공세를 정부에 퍼부었다.

1960년 자유중국지는 야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민주정치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건전한 정당정치 없이 건전한 민주가 있을 수 없으며, 강력한 반대당이 없이는 건전한 정당정치도 없다."고 국민당 일당독재를 비판했다. 자유중국지 22권 10기는 <반공은 결코 암흑통치의 호신부가 아니다>라는 사설을 발표해 장제스의 전횡과 패도 정치를 비판했으며 <우리들은 왜 절박하게 강력한 힘이 있는 반대당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표하여 국민당이 사리사욕만을 추구한다면 국민당을 타도하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공격했다.

자유중국지의 이러한 움직임은 국민당 일당 독재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던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 대사 졸라드와 대사관 참사관 오스먼은 신당의 창당을 지지하며 "대만이 민주국가의 길로 갈 수 있고, 미국으로 하여금 다시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부추기고 있다는 풍자를 듣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표명했다. 뉴스위크지의 헨리 루스 역시 환영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힘입은 자유중국지는 1960년 5월 18일 대만 인사와 민사당, 청년당 등 야당 인사 72명을 규합하여 민사당 중앙당사에서 선거좌담회를 개최하고 국민당의 비준 없이 지방선거 개진좌담회를 성립시켰다. 6월 15일 지방선거 개진좌담회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6월 26일 이만거, 고옥수, 뇌진을 발기인으로 하여 뇌진, 이만거, 하도성, 오삼련, 곽우신, 제세영, 곽국기, 황옥교 등 17명을 소집인으로 하여 신당을 결성해 뇌진을 비서장으로 삼았다.

3.3. 뇌진의 체포

국민당 정권은 신당의 창당에 격렬히 반발했다. 7월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 중화일보, 신생보는 모두 야당의 창설은 공산당의 통일전략전술과 일치한다면서 대만을 혼란하게 하려는 전복음모이고 이는 영국령 홍콩에서 활동하는 중공 공작원들이 배후에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신당 창당 움직임에 변화가 없자 국민당은 1960년 9월 4일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1960년 9월 4일 오전 9시 뇌진, 자유중국 편집장 부정, 사장 마지숙, 경리담당 유자영이 자택에서 일제히 체포되어 보안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계속된 심문과 위협, 회유 속에서 유자영이 자신이 중공 간첩이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였으며 이에 정부는 뇌진이 중공 간첩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간첩검거조례 9조를 위반한 불고지죄를 적용함으로 뇌진 사건이 완성되었다. 9월 5일 경비총사령부 정치부 주임 왕초범이 기자화견을 열어 뇌진을 반란혐의자로 규정하고 정치반란조례 10조에 의거하여 자유중국지에 게재된 글을 반역행위로 비난했다. 왕초범은 뇌진 등이 국광 작전은 희망이 없으며 미국이 대만 내정에 간섭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군인들이 정부에 원한을 가지도록 선동하였고 공산당을 위해 통일전선전략을 선전하였으며 본성인와 외성인을 이간질하여 유혈혁명을 고무시키는 등 이적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9월 13일 장제스는 미국 기자단을 접견해 뇌진이 공산당에 유리한 문장을 실었으며 자신이 공산당 간첩이 자유중국지의 배후에서 활동하였음을 믿는다고 주장하였다.

9월 27일 군사법정에 뇌진이 기소되었다. 유자영은 부학문의 사주를 받아 뇌진에게 중공을 위한 대만 전복 음모를 행하도록 유도했고 뇌진은 유자영이 간첩인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적용되었다. 또 마지숙은 중공 남하공작단에 참가하여 경비총사령부를 정탐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10월 8일 군법처는 뇌진에게 징역 10년과 공민권 박탈 7년을 선고했고 유자영에겐 징역 12년과 공민권 박탈 8년을 선고했다. 마지숙은 징역 5년을, 부정은 당국을 격렬한 논조로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교화교육 3년을 선고받았다.

3.4. 반응

대만 당국의 이러한 언론탄압 행위를 더 타임스, 뉴욕 타임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등 미국의 언론들은 격렬히 비난했으며 페어뱅크, 스칼라피노 등 중국 전문가들도 기고문을 통해 미국이 가지는 아시아에서의 위신이 손상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스칼라피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뇌진의 죄명은 실패주의를 거쳐 줄곧 정부 전복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죄명은 대단히 간단하다. 그는 국민당에 대항하는 진정한 반대당을 이끌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국민당이 중국민주당과 같은 생기발랄한 신당파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유가 있고,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심지어 국민당을 옹호하는 인사들, 이를테면 후스 및 제3세력의 장군려 같은 사람들도 현재 대단히 겁을 먹고 있거나 혹은 개인적인 비판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유중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이미 대륙에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만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우리들의 대량의 경제, 기술원조로 정권을 유지하는 정부에 대해 우리들은 언제나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야만 하는가?

페어뱅크 역시 격렬히 비난했다.
우리들이 확대한 원조의 배후에는 결국 정치적인 자유의 의도는 없었단 말인가? 우리들이 전쟁의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대만을 보호한 것은 단지 불필요한 경찰국가의 방법을 마음대로 사용해가면서 건전한 정치발전을 원하지 않는 이러한 독재정권을 위해서였는가?

9월 4일 천청으로부터 뇌진의 체포를 설명받은 후스는 당시 미국 교육문화기금회에 참석 중이었는데 크게 반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정부의 이번 일은 깊이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닌듯싶소. 그 나쁜 영향은 다음과 같이 예언할 수 있소. 우선, 국내외의 여론은 반드시 뇌진 등의 체포에 대해 정부가 반대당 운동에 대한 두려움과 손상을 만회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할 것이오. 두번째, 이번에 뇌진 등 네 사람에 대한 체포로 자유중국 잡지가 정간을 당하게 됨으로써, 정부는 언론을 손상시켰다는 악명을 얻을 것이오. 세번째는 서방 인사들의 마음속에 정부가 반대당 성립을 도모한 것과 반란죄명은 절대로 무관하다는 비판을 갖게 할 것이라는 점이오. 뇌진이 애국반공을 했다는 것은 내가 깊이 아는 바요. 그런 그에게 무조건 반란죄명을 씌웠으니 아마도 세계가 비웃겠지요."

10월 18일 후스가 귀국길에 오르자 모자수는 도쿄에 경유한 후스에게 대만에 가서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후스는 귀국하자마자 기자회견을 열어 분노를 토했다.
"12년 동안 뇌진이 만든 자유중국은 이미 자유중국의 언론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본인이 일찍이 그의 동상을 만들어 주기를 주장했거늘, 이제 그는 오히려 10년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때 탁자를 크게 내려침) 이것은 정말 불공평한 일이다!"

4. 결과

이로서 국민당 정권의 독재는 한 차례 더 공고해졌지만 대만 국민들과 민주파 인사들의 불만이 누적되면서 대만 사회는 이오가 주도한 문성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달아올랐다.

5. 참고 문헌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장성구,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