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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자이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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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gold> 바실리 그리고리예비치 자이체프
Васи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Зайцев
파일:Vasily_Zaitsev.jpg
출생 1915년 3월 23일
러시아 제국 오렌부르크현 베르흐네우랄스크구 옐레닌카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첼랴빈스크주 카르탈리군 옐레닌카)
사망 1991년 12월 15일 (향년 76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주 키예프
복무 소비에트 해군
1937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위 (소련군)
병과 행정(재정), 보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스탈린그라드 전투2.3. 전후2.4. 사후
3.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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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저격수.

공식적으로는 225명의 독일 국방군SS[1]을 저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더 많은 적을 사살했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Зайцы(zaytsy)(러시아어로 '토끼(hare)')'라는 단어에서 성씨가 기원한지라 러시아 토끼라는 별명이 붙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우랄 산맥 근처의 산골마을인 옐레니스코에서 태어났다. 우랄산맥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늑대나 곰 같은 맹수가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총을 휴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이체프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사냥을 했다. 자이체프도 12세부터 본인의 총을 선물로 받아 사냥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이체프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마그니토고르스크 제련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야간과정으로 중학교-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마그니토고르스크시 기술학교에서 건축전공으로 졸업하고, 1936년 해군에 입대후 군사경제학교에서 회계학도 공부하였다. 이력에서 보듯이 사격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고[2], 해군 행정 부사관으로 태평양함대 재정부에서 행정보급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즉,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게 아니라 함대를 운용하는데 돈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근무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인근의 루스키섬에 있는 태평양함대 본부였다.

파일:sailorzaichev.png
해군부사관 시절의 자이체프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자이체프는 함대 사령관에게 5번이나 전선에 보내달라고 청원했고, 결국 이 청원은 승인되어 제284사단 (육군)로 전출되었다. 이 사단은 1941년 시베리아에서 창설된 사단으로 육군병사들 뿐만 아니라 해군에서 2500명의 병력들을 충원받아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

2.2.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가전이 클라이막스로 진행되던 1942년 9월 22일에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자이체프는 도착하자마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가의 석유 집적소 공격을 명령받는다. 이는 이들이 해군이었기 때문에 보트 조종에 능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자이체프는 보병용 일반 모신나강을 들고 이때부터 저격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투입된지 얼마 안가 보병용 일반 소총으로 40여명의 독일군을 사살했다.

이 전과로 10월 21일에는 스코프가 달린 저격용 소총과 함께 상금을 받았고, 현지임관되어 소위로 승진했다. 그리고 저격조를 구성하고 지휘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자이체프는 본인의 사격술도 능했지만 시가전에 알맞은 저격전술을 개발하고 이러한 저격조를 지휘하여 소련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그는 사격에 능한 병사 12명을 뽑아서 각각 6명으로 구성된 2개의 분대로 이뤄진 저격조를 지휘했다. 이들은 시가전에 투입되어 잡병보다는 일선에서 지휘하는 경험많은 베테랑 부사관이나 고위장교들을 중점적으로 저격하는 전술을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살된 적은 소련군측의 전과로 선전되어 소련군과 독일군에 삐라로 뿌려졌고, 이는 소련군의 사기를 높이고 독일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자이체프의 어근이 되는 자이치(Зайцы)는 러시아어로 멧토끼를 뜻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하얀 위장복을 입고 자이체프 지휘하에서 움직이는 이들을 "토끼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런 심리전이 독일군 측의 사기에도 영향을 주자 독일군도 다른 전선에서 대거 저격수를 빼네어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했다. 독일군 정찰부대는 매복해 있던 "토끼떼"의 한 명을를 생포했고, 심문을 통해 자이체프의 신원을 파악해서 그를 죽이면 특진과 포상금을 주겠다고 공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포위된 스탈린그라드 내에서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저격수의 대결이 펼쳐진다. 자이체프는 이렇게 투입된 독일 저격수들에게 자신의 부하들이 저격당하자 여러가지 기만책들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적 저격수를 잡기 위해 두 명의 저격수가 한 조로 투입되어 한명이 싸우면서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한명이 적을 저격하는 방법 등도 모두 자이체프가 개발한 것이다.[3]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인 1943년 1월에 독일군의 지뢰가 앞에서 폭발해 부상을 입은 뒤에 잠시 눈이 멀었다가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전쟁영웅으로 크게 선전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분투하는 소련군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력을 살리기 위해 소련 정부는 그를 비행기편으로 모스크바로 송환하여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안과의사였던 필라토프 교수에게 진료를 받게 했다. 필라토프 교수도 최선을 다해 치료했으나 실명만 면하고 시력이 많이 나빠져 예전처럼 저격 일선에는 나가지 못하고 이후 일반 보병 지휘관으로 부대를 지휘하며,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저격수 교관 업무도 맡았다. 그리하여 오데사 해방전에도 참가한다.

소속은 해군이었지만, 종전 시까지 계속 육군 284사단 (이후 79근위사단이 된다)에 전속된 상태로 근무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최종계급은 육군 대위.[4] 그가 전쟁 중 기록한 공식 사살 횟수는 242구인데 이 전적을 올리기 위해 사용한 탄환의 수는 불과 243발이었다고 한다. 딱 한 발이 빗나갔으니 명중률은 무려 99.588%. 그야말로 원샷 원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저격수다.

그는 모신나강을 사용해서 저격했는데 그의 총은 아직도 볼고그라드에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파일:camozaichev.png
스탈린그라드 전투 말기에 동계위장복을 입은 자이체프. 맨 왼쪽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그와 초인적인 저격대결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SS대령 하인츠 토르발트(혹은 육군소령 에르빈 쾨니히)는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에르빈 쾨니히라는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곳이 소련의 선전매체가 아닌 바실리 자이체프의 회고록이라는 점, 서류 누락이 전쟁 중 빈번히 일어났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무조건적인 소련의 선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방의 냉전적 시각이라는 말도 있다. 실존하는 독일 최고 저격수는 육군 산악상병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 자이체프와 독일 저격수 사이의 대결은 분명히 있었다.[5] 자이체프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처리한 독일군 저격수는 11명이라고 밝혔다.

62군 사령관이었던 바실리 추이코프도 회고록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자이체프의 활약을 언급하면서 전쟁이 끝난 후 포로심문을 통해 히틀러는 자이체프를 잡으러 자신의 경호원을 하던 저격수를 보낸 것을 알았다고 썼다.

최근의 러시아 연구가에 따르면 자이체프가 회고록에서 사살했다고 주장한 "쾨니히" 또는 다른 학자가 추정한 "하인츠 토르발트"[6] 라고 추정된 인물은 실제로는 헤르만 슈토프 상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관급 고위장교가 적에게 포위된 곳에서 포로가 될 위험을 부릅스고 일선 저격에 나설 리는 없으니, 자이체프가 사살한 저격수는 분명히 사병이나 부사관 에이스일텐데, 전쟁당시 100킬 이상 올렸다가 후에 스탈린그라드에 전출되어 실종된 독일군 에이스 저격수는 슈토프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전과를 과장하고 피해를 감추는 것은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이며, 소련측이 심리전 목적으로 저격수들의 전과를 과장할 수는 있으나, 자이체프가 보통 저격수를 훨씬 뛰어넘는 전과를 올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1943년 2월 바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역이었던 62군의 사령관인 추이코프가 바그라티온 작전의 전과로 1944년에야 소련 영웅을 받은 것과 비교해도 매우 빠른 것이다.

2.3. 전후

제대한 후 학교로 돌아가서 모스크바의 종합 섬유 및 경공업 연구소에서 (Всесоюзный институт текстильной и легк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눈을 부상당했을 때 요양생활을 한 키에프에 정착하여 우크라이나에서 의류 공장의 이사-경영진으로 재직하며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에서 아내가 되는 지나이다를 만났는데, 지나이다는 전남편이 전사한 미망인이었고, 전남편과 아들이 있었지만 자이체프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워낙 저격수로서의 명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역후에도 드라구노프 저격소총의 개발에 테스터로 지정되어 개발에 참가하였다.

1991년 12월 15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후에도 예비역 장교로 있으면서 저격수용 교재를 두건이나 집필했다. 1973년 자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회고록을 펴냈고, 이 회고록은 서방에서 번역되지 않았지만, 미국 작가 윌리엄 크레이그는 이 회고록을 요약하여 미국의 잡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했다. 이것을 읽은 미국 독자들의 반응이 좋자 크레이그는 이 이야기를 보충하여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스탈린그라드 전투(1974)"라는 소설을 펴내, 서방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2001년 영화화되어 그는 서방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다만 영화 내용은 자이체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저격수와 일대일 결투를 벌였다는 것 이외에는 대부분 창작이며, 자이체프는 졸병이 아니라 이미 부사관 계급으로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해 참전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다닐로프(정치장교)와 쿨리코프 (쾨니히에 사살당하는 저격수 동료) 모두 자이체프의 회고록에 나오는 실존인물이다. 쿨리코프가 독일 저격수에게 저격당한 것은 맞지만, 다닐로프는 자이체프가 지휘하는 부대에 딸린 정치장교였을 뿐이며,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2.4.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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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에서 본인의 시신을 전우들이 잠든 스탈린그라드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구소련의 붕괴 직전의 혼란 통에 이는 지켜지기 힘들었고, 전쟁후 정착한 키에프의 한 군사묘지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지 10일 뒤에 그가 전쟁에서 지켰던 소련이라는 나라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세간에선 이를 두고 조국과 함께 잠든 사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2006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협의하여 자이체프를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쿠르간 공동묘지로 이장했고, 20년후인 아내 지나이다가 죽자 지나이다도 합장되었다.

전쟁시에는 육군에 전속되어 참전했지만 묘비에는 해군 정복 차림을 한 모습을 새겼다.

푸틴집권이후 점점 애국주의가 강해진 러시아에서는 여러개의 자이체프 동상을 세웠다. 그중 하나는 자이체프가 근무했던 블라디보스톡의 태평양함대 사령부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3. 미디어

2001년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주드 로가 자이체프 역할을 맡았으며 영화를 통해 바실리 자이체프는 2차대전 소련 인물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지도를 가진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주드 로의 자이체프를 먼저 본 사람들은 실제 자이체프도 초절정 미남일 것으로 지레짐작했다가 실제 자이체프의 사진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이체프는 미남이라기보다는 우직한 군인 스타일이며, 스탈린그라드에서 찍은 사진도 그렇지만 20대 초반이었던 해군시절 사진을 보면 전형적인 러시아 군인의 외모이다. 이 영화는 픽션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극적 장치를 위해 자이체프가 훈련도 제대로 안받고 전선에 끌려온 육군쫄병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자이체프는 해군에서 회계담당 행정부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자원해서 육군으로 전속되어 스탈린그라드에 참전했다.

SD 세계대전 소련군 6번 임무 '저격수'에서 중간중간에 대사 이벤트가 있다.

아바 온라인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스나이퍼)로 등장한다.


대기실 전용 배경음악도 있다.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초원을 적절히 리믹스한 곡이다.

소지하고 있는 총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모신나강으로 보인다.

모바일 게임 원신에서 그의 이름을 딴 지방 전설이색 삼연성·바실리가 등장한다.


[1] 대부분이 육군 장교이며 11명의 저격수 포함.[2] 당시 한국도 그랬지만, 소련에서도 그만큼 공부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3] 이외에도 거울을 사용, 철모를 쓴 허수아비를 이용해 기만하기, 죽은척 하다가 적이 방심할 때 공격하기의 방법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묘사되었는데, 이는 영화적 창작이 아니라 모두 자이체프가 발명한 전술이다.[4] 이 대위라는 계급은 러시아어로 까삐딴(Капитан )인데, 영어 captain처럼, 육군으로는 대위지만, 해군으로는 대령이다. 러시아어 위키의 자이체프 항목을 보면 분명히 육군 대위계급장이 나오므로 육군 대위가 맞다.[5] 실제로 저격수를 잡는 데에는 저격수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독일군 역시 자이체프를 위시한 소련군 저격수들을 잡기 위해 많은 저격수를 투입했다. 물론 자이체프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그 동안 여러 독일군 저격수들이 그의 킬카운트 중 일부가 되었다.[6] 이건 자이체프가 아니라 영국의 전쟁사가인 앨런 클럭이 주장한 사람이다. 클럭에 따르면 토르발트는 Zossen에 있던 SS 저격수 학교장인데, 스탈린그라드 전후로 행방이 묘연해서 아마 자이체프에게 사살당한 쾨니히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