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0:38:13

장앙리 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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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BE83><colcolor=#373a3c> 장앙리 파브르
Jean-Henri Fabre
파일:Jean-henri_fabre.jpg
본명 장앙리 카지미르 파브르
(Jean-Henri Casimir Fabre)
출생 1823년 12월 22일
프랑스 왕국 아베롱주 생레옹
사망 1915년 8월 11일 (향년 91세)
프랑스 제3공화국 보클뤼즈주 세리냥뒤콩타
직업 교수, 시인, 생물학자, 교육 운동가
분야 곤충학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
2.1. 유년에서 청년 시절2.2. 곤충학자가 되다2.3. 여성, 농민, 노동자 교육과 탄압2.4. 아르마스로의 도피, 곤충기 집필
3. 그 밖의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

프랑스의 교수, 시인, 생물학자, 교육 운동가이다. 파브르 곤충기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에서 청년 시절

장앙리 카지미르 파브르는 1823년 12월 22일, 프랑스의 남부 지방인 생레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농이라 돈이 많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농부는 아니어도 착실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아이 둘을 키울 수가 없어 장앙리 파브르는 4살 무렵 말라발의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졌다. 할아버지는 부농이라 살 만했고, 파브르의 수기에서도 할아버지 집에서는 흰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 취학할 나이인 7살에 고향 생레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은 여전히 가난하여 파브르는 장난감조차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파브르는 어렸을 때부터 마을 앞에 흐르는 시냇가에서 노는 걸 좋아했는데, 주변의 벌레들을 관찰하며 즐겼고 나중에는 직접 벌레들을 키웠고 그중 파브르가 발견했던 쇠똥구리는 나중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생계 유지에 바빴던 그의 부모님은 쓸데없는 것들이라며 아들이 가지고 온 곤충들을 도로 방생하기도 했다.[1] 이후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파브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에 나가서 직접 돈을 벌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철도 막노동 등을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학구열이 뛰어난 청년이었던 파브르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서[2] 19살에 초등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 학교의 근로 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였고, 졸업 후 초등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 후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1849년에는 중학교 화학 교사가 되었고, 또 4년 후에는 고등학교 물리 교사가 된다. 이때 파브르가 얼마나 교직 생활에 열심이었는지 화학 실험을 할 때에는 학생들보다 자신이 더 열정적이었으며, 아이들과 야외 수업을 할 때는 벌집을 따서 을 나눠 먹기도 했다. 파브르가 화학 교사를 맡았던 허름한 중학교는 파브르 덕분에 명성이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파브르는 자연 과학 공부를 쉬지 않아서, 동료 교사들이 파리를 연구하는 파브르에게 '파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보면 알겠지만, 파브르는 학자로서는 정규 과정을 밟지 않고 교직에서 생활 연구자로 살아갔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랑제콜이나 프랑스 아카데미에 편입되지 않았다. 본인은 프랑스 아카데미에 조금 미련이 있었는지 아쉬워했다. 프랑스 학계의 그랑제콜 편애를 생각해 보면 특이한 케이스.

2.2. 곤충학자가 되다

1854년 겨울, 파브르는 레옹 뒤푸르(Jean-Marie Léon Dufour, 1780–1865)의 소책자를 읽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3] 곤충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인 1855년에 노래기벌을 연구하고 발표했으며, 얼마 안 가서 아비뇽의 르키앵 박물관장(Musée Requien)으로 임명된다. 이때 알프레드 모캥탕동(Alfred Moquin-Tandon, 1804–1863) 교수에게 식물학을 많이 배웠으나, 파브르에게 고마운 은인이던 모캥탕동은 몇 해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탕동에게 배운 식물학 지식을 통해 여러 연구[4]로 1868년에는 나폴레옹 3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관학파의 비난과 공격으로 인해서 교단과 박물관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5] 르키앵 박물관장에서 물러난 파브르는 과학 보급서를 저술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여전히 빈곤 속에서 허덕여야 했다.

1865년, 루이 파스퇴르가 그의 집에 당시 유행하던 누에의 미립자병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를 위해서 찾아온 적이 있다.[6] 그런데 파브르를 찾아온 파스퇴르는 누에고치 안에 뭐가 들었는지조차 몰랐고 파브르는 파스퇴르가 누에고치를 챙겨가는 걸 허락했다. 파브르는 파스퇴르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히 밝히며 학문에 열정을 보이는 자세에 감동했지만, 거만한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동료 교사인 마리 세자린 빌라르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무렵 빚 때문에 생레옹에서 오랑주로 이사했다. 또한 이 무렵 딸 엘리자베스와 아들 장이 요절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교육부 장관이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찰스 로버트 다윈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냈다. 특히 부자였던 밀에게는 3천 프랑의 돈을 빌린 적이 있는데 나중에 어린이 곤충 도서를 쓰면서 이 책이 제법 잘 팔려서 받은 인세로 몇 해에 걸쳐 기어코 이자까지 내주면서 깨끗하게 갚았다. 밀이 이자는 안 내도 된다고 했음에도 이 돈으로 나와 내 식구가 살 수 있었기에 이자는 작은 성의이니 받아두라고 하며 건네줬다고 한다.

하루는 다윈이 보낸 편지에서 "벌이 얼마나 집을 잘 찾는지 아나? 벌집에서 최대한 멀리 벌을 내보내도 반드시 집을 찾아온다니까." 이런 편지를 보고 실험을 했는데 생활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탓에 집 근처에 있던 벌집에서 벌을 따로 잡아다가 아침부터 멀리 뛰어가서 먼 거리에서 벌을 풀어주고 집으로 돌아오나 실험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멀어도 벌이 잘 찾아오자 심지어 천막까지 가지고 며칠 동안 야영 가듯 멀리 최대한 걸어가서 거기서 벌을 풀어서 벌이 오는 속도 및 방향을 연구하기도 했다. 또한 벌을 통에 담아서 방향 감각을 상실하도록 직접 손으로 열심히 붕붕 돌린 후 풀어주고 돌아오는 개체 수를 관찰하는 실험을 한 적도 있다. 이 무식하다시피 한 방법의 아이디어 제공자는 다윈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전면 부정 했다. 다윈과 파브르는 이 점으로 서로 싸우거나 하지 않았으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파브르로서는 꼭 신앙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관찰에 의거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가령 곤충의 행동에는 학습이 아닌 본능밖에 없는데, 그 본능이란 게 곤충의 기본적인 생존은 물론 몇몇 경우에는 번식에까지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나니벌, 호리병벌 등 사냥벌 종류의 번식법이 있는데 이들은 곧 태어날 자신의 애벌레의 먹이를 미리 잡아 마비시켜서 훗날 깨어나는 애벌레의 먹이로 만드는 습성을 가진 곤충이다. 그런데 마비에 실패해 먹이가 죽어서 썩어버리거나 혹은 마비에 깨어나서 도망가 버리면 애벌레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다. 도저히 학습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의 행위를 파브르는 이것이 타고난 본능에 의한 것이라 단정 지었다. 번식 자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자연 선택은커녕 종의 생존 자체가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윈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의 진화론 연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7] 정작 다윈은 자신의 저서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다른 애벌레를 파먹고 자라는 벌을 왜 창조했는지 모르겠음'이라고 기생벌에 대한 감정 섞인 평을 내렸다. 현대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파브르의 냉철함과 다윈의 감성적인 면이 다소 아이러니해 보인다.

2.3. 여성, 농민, 노동자 교육과 탄압

이 당시에 파브르는 여성들에게도 식물학과 곤충학 등과 박물학, 수학 등을 무료로 강의하여 당시 사회적 약자 계층인 이들에게 존경이나 인기를 받았다. 파브르는 여성 해방을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과 친구였기에, 밀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에게 이런 고등 교육은 과분하다고 생각한 사회 기득권층과 보수층은 이런 파브르를 눈엣가시로 보았고 딴지를 걸어버려서 어처구니없게도 식물의 유성 생식 강의(의 수분)가 저질이라는 빌미로 비판을 받는다. 1868년에는 파브르의 강의 자리도 죄다 취소되고 친하게 지내던 평생 교육론으로 유명한 뒤뤼 교육부 장관이 파브르와 같이 얽혀서 억울하게 해임당하는 등의 고생을 했다.

때문에 행적을 보면 당시 기준으로 진보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을 보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여성뿐만이 아니라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강의를 했을 정도.

2.4. 아르마스로의 도피, 곤충기 집필

사실 파브르를 가장 괴롭혀 온 건 가난뿐이 아니었다. 위에 언급한 동료 교사들의 경우처럼 파브르는 곤충 연구를 하면서 항상 주변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한때는 오랑주에 살 때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땅 주인이 집 앞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자 그로 인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8]

다 큰 어른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만 보는 걸 보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도 했고, 위에 언급되었던 벌의 귀소 본능을 실험하기 위해 멀리 나간 뒤 벌을 어지럽게 해서 방향 감각을 상실시키겠다고 통에 넣어 빙글빙글 돌리는 걸 보고 이상한 미신에 빠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렇듯 곤충에 대한 관심과 여성, 농민층에 대한 교육에 사회에서는 파브르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시선과 마찰에 시달려야 했던 파브르는 1879년에 세리냥의 아르마스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르마스의 그의 집 앞은 넓은 벌판이었는데, 넓기만 하지 엉겅퀴와 수레국화 등 온갖 잡초만 무성했던 곳인지라 농사용으로는 쓸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파브르에겐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넓은 자기 땅에서 남들의 방해 없이 온갖 곤충 연구를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곳인지라, 단숨에 헐값으로 땅과 집을 사버리고 세리냥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 쓸모없는 땅에 아르마스(harmas: 황무지, 불모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1885년에 첫 번째 아내 세자린을 병으로 여의고 근처에 장사 지내어 틈만 있으면 아내 무덤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곤충기를 출판했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곤충기는 그 당시에 있던 '모든 곤충학의 정수' 라고 불릴만할 정도로, 지금도 파브르가 '곤충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것을 계기로 파브르는 다시 급격히 인기를 얻게 되고, 훗날 1910년에는 파브르 후원회가 설립되며, 스톡홀름 학사원에서는 린네상을, 프랑스 정부에서는 레종 도뇌르 훈장[9]과 연금을 수여하는 등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곤충기를 쓴 업적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지명되었다.

하여튼 이렇게 말년에야 겨우 본인의 공로를 인정받은 파브르는 이후 안락한 여생을 살았는데, 1913년 90세 생일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축하해 줬으며, 각종 훈장이나 표창장도 받았지만 정작 프랑스 아카데미에선 파브르를 인정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도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에 이를 아쉬워했다. 그의 생일에는 파랑새의 작가인 벨기에모리스 마테를링크라든지 유명인들도 손수 찾아와 축하해 줬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 조제핀 마리 도들마저 1912년에 먼저 세상을 떠나[10] 노년의 그를 힘들게 했다.

1915년 요독증으로 만 91세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20년대인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장수했다.

3. 그 밖의 이야깃거리

파일:external/www.le-livre.fr/R320041845.jpg

곤충기 이외에도 식물에 관심이 많아 식물기를 저술하였다. 원래는 3부작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출판사에게 거절당하거나 당시 빈곤한 사정도 있어서 결국에는 "나무의 역사" 단 한 권만 출판되었다. 이후에서야 다른 시리즈인 "씨앗과 열매"가 추가되어서 "La Plante"로 다시 출판되게 되었다. 곤충기 수준으로 다양하고 자세한 식물의 구조와 특징을 29장의 차례에 걸쳐 저술했다. 비록 곤충기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2014년 교양 필독서 100선에 들을 정도로 좋은 책이다.

한국과 일본에 나와 있는 책들은 초판이라 볼 수 있는 "나무의 역사"를 번역한 것뿐이라, 완전하지 않았다. 2011년에 국내에서 파브르 식물기 원본을 풀어 쓴 책인 "파브르 식물 이야기"가 출간되었고 2023년에야 완역본인 "파브르 식물기"가 출간되었다.

시집을 내기도 했다. 직접 관찰한 곤충들과 일상, 아들 폴이 등장하는 시가 대부분. 이 때문인지 후일 파브르가 유명해졌을 때 찾아오는 사람은 문인이 대다수였다. 오늘날에도 파브르가 살았던 아르마스 지역에서는 파브르를 곤충학자보다는 철학자나 문인으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늘그막에는 비행기 연구에도 참여했는데 1910년 87살 노령임에도 글라이더를 설계하여 잠깐 하늘을 날아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파브르 곤충기"라는 제목의 아동 도서로 파브르의 생애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중에는 곤충기를 직접 발췌 번역 한 버전도 있고 파브르의 일생을 위인전기처럼 담아낸 것도 있다. 개중에서 가장 내용이 많은 것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오카모토 다이사부로가 쓴 전 8권짜리 "파브르 곤충기"인데 곤충기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오카모토가 파브르의 일생을 엮어 쓴 일종의 다큐멘터리 서적과 평전의 중간쯤 되는 시리즈다. 아동용치고는 내용이 자세하게 되어 있어 한국에서는 고려원미디어에서 8권 모두 발간했다.

파브르에 관한 전기 중 성인들이 읽을 만한 것은 마르틴 아우어가 짓고 안성기가 옮기고 청년사에서 나온 "파브르 평전 :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가 있다. 시중에 나온 파브르 관련 저서 중 가장 사실적이고 세심한 묘사를 보여준다. 파브르가 늘그막에 시집을 냈다거나, 물리, 화학 교사였다거나, 수학, 철학,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이 있었다거나, 가족 관계, 동생과의 편지 내용, 진화론에 대한 관점 등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파브르의 일생을 잘 풀어놓은 책이다. 또 최근에는 아동티에서 벗어나 좀 더 고증에 맞춰진 파브르 위인전도 출시되어 있다.

파브르가 교직에 몸담았던 시절, 그의 학구열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어떤 학생이 파브르를 찾아와 수학의 일종인 대수를 가르쳐 달라며 특별 지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브르는 대수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 학생에게 지도를 해줄 수 없는 입장이었음에도 이 기회에 자기도 대수를 배워보자는 생각 때문에 그 학생을 지도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파브르는 본격적으로 지도를 시작해 주기 전에 남은 시간 동안 자습을 위해 학교 도서실에 있는 이과 교과서를 몰래 가져왔는데 대수가 워낙 어려운 과목이라 소화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여 어렵게 이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를 시작하기로 한 약속 날짜가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태연히 수업을 시작했다. 물론, 대수의 악명높은 난이도를 고려하면 파브르는 중고등학교에서 물리와 화학도 가르쳤을 정도로 이과적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어려움' 이라는 게 평범한 고등학생과 수학 전공 대학생이 대수를 배우면서 겪는 어려움과 동일한 수준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부터 남에게 뭔가를 가르치려면 그냥 배우는 것보다 한 단계 높은 이해를 해야 된다. 기본기가 있으니 머리 하나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배버들나방 수컷들이 암컷에 이끌리는 것을 연구할 때 안일한 생각으로 그르쳐 버린 일이 있는데, 하루는 저녁에 항라사마귀를 잡았다가 그것을 하나뿐인 나방 암컷이 있는 통에 넣었다. 사마귀는 너무 작았고 나방은 컸기에 괜찮을 줄 알고. 다음 날 아침 그가 봐야 했던 것은 '큰 나방'을 앞다리로 단단히 잡고 아주 맛나게 먹는 '작은 사마귀'였고, 3년이나 지나 운 좋게 나방 고치 2개를 다시 얻어 둘 다에서 암컷이 나올 때까지 연구가 중단되고 만다.

파브르가 한국, 일본에서만 유명하며, 실제 곤충학에서는 큰 업적을 내지 못했다는 논란도 있다.[11]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만 유명하지는 않다.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파브르는 매우 유명한 생물학자이며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 기념비도 존재하고 교과서에도 자주 인용된다. 물론, 그의 명성에 비해 곤충학적으로 확실히 업적이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연관찰과 연구방법론과 과학적인 글쓰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프랑스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인물이다. 요컨대 곤충학에 획을 그은 연구자라기보단 자신의 연구와 결과를 교육에 잘 접목시킨 교육자이자 학자에 더 가깝다.

파브르의 이름을 빌린 방역소독 업체가 있다.(...)#


[1] 훗날 파브르도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고 했다.[2] 물론 파브르가 공부에 기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을 나와 막노동을 하기 전까지 성당에서 복사를 서며 학비를 면제받고 왕립 학원, 레스킬 신학교를 다녀서 라틴어에 능통했다. 이는 후에 사범 학교 근로 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게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3] 레옹 뒤푸르의 논문 자체에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 듯하다. 이후 독자적인 관찰, 연구를 통해 뒤푸르의 벌의 마취 능력에 대한 가설을 뒤집었는데, 뒤푸르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논파한 파브르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4] 꼭두서니에서 알리자린을 추출하는 방법이나 각종 식물, 버섯, 곤충 연구 등이 주요하다. 꼭두서니에서 알리자린을 추출하는 방법은 자신이 돈을 벌고 싶어서 연구에 매진했는데, 공장 문을 열자마자 합성 염료가 개발되어 망했다.[5] 그에게 호의를 베풀며 보호해 주던 교육부 장관 빅토르 뒤뤼(Victor Duruy, 1811–1894)가 실각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뒤뤼는 여성 교육 확대 및 당시로선 매우 진보적 사고방식을 가졌으나 이로 인하여 물러났던 것. 이후 대법원에서 일하기도 하고 정치인으로 출마도 했으나 낙선했다.[6] 미립자병으로 인해 당시 양잠 산업이 망해버릴 상황이었던지라 해결이 시급했다. 결국 파스퇴르는 이 문제를 해결 못 했는데 일본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프랑스에 일본 누에를 수출하여 해결되었다.[7] 현대 과학은 해당 형태에 대해서,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에 의해서 완전히 루틴화되어 버린 것으로 이해한다. 극단적 환경 변화나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파브르가 생각한 '타고난 본능'마저도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다.[8] 오쿠모토 다이사부로 저술의 곤충기에서는 이 사건이 파브르를 세리냥으로 이주하게 만든 계기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르틴 아우어의 파브르 평전에는 사실 이보다도 자신이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9] 1865년 받은 훈장은 5등급 슈발리에였고, 1910년 받은 훈장은 한 등급 더 높은 4등급 오피시에 훈장이다.[10] 1887년에 재혼했는데 조제핀의 당시 나이는 23살이었다. 조제핀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3명 더 태어났다.[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