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19:38:03

장흥(독립운동가)

파일:장흥.jp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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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 20일~1983년 2월 6일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민혁명군, 대한민국의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 생애


1903년 1월 20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서 태어났다. 1925년 의열단원인 오세덕의 권유로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 조계 내에 있던 한인청년동맹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8월 여운형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 5기로 입학하였고, 이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 시기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권준 등과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1]

1931년 난징헌병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에 특별 당원으로 입당해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 일본 첩자들이 수집한 정보 탐지 및 당 고위층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아 독립운동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을 맡았고, 1935년 지청천의 요청으로 신한청년당계 청년 50여 명이 뤄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생필품을 보급받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매달 월급 80원 중 50원을 지원하였다.

국민혁명군 내에서도 1935년 헌병사령부 상위, 1940년 헌병 제8단 소교단, 1942년 소교영장으로 복무하였고, 장교 신분을 활용해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 및 재정지원에 힘썼다. 광복군 창설 후에는 일본군 내 한적사병들의 광복군 편입에 기여했으며 쑤저우에서 정희섭, 성동준, 김수남 등 수 십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해방 후에는 상하이에서 선무단장으로 교포 수송, 치안 유지, 일본군 무장해제에 힘썼고 대동청년단 훈련단장 등을 맡으며 정치단체에 몸담다가 김관오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특별 7기로 임관했다. 임관 후 초대 헌병사령관을 지냈으나 백범 김구 암살사건이 발생하자 전봉덕에게 헌병사령관 직을 넘겼다. 이후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에게 소환되 왜 안두희를 영창에 보내려 했는지와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를 추궁받았으며, 1960년 8월 김구 암살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헌병사령관에서 물러난 후 경남병사구사령관[2], 전남병사구사령관을 지내다가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성 진급 직후 국방부 초대 병무국장[3]을 맡았고 1956년 제3군관구사령부 부사령관, 1958년 육군 군사감을 역임하다가 1959년 4월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 후 전역했다.

1960년 8월 백범 김구 암살사건 재조사에 증인으로 참석했고, 대한전선 고문 등 기업체 자문을 역임했다. 1966년 원호처 원호위원장을 맡아 1972년 까지 22만 원호대상자들의 예우 및 지위 향상 등의 기초 법규를 제정, 시행하는데 기여했다. 1972년 부터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다. 1983년 2월 6일 서울특별시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여담

  • 1975년 아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병역을 기피하기위해 가출하자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아들을 전과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10여 일간 추격 끝에 찾아 경기도 지방병무청에 데려다주고 입영시켰다.#
  • 1969년 예비역 장성 29명과 울릉도, 독도 경비요원위문단을 편성해 한 트럭 분의 위문품을 싣고 울릉도, 독도를 방문, 경비요원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였다.#


[1] 권준과 장흥은 의열단, 조선의용대에 연관되어있었지만 광복군 창설 후 좌익 계열과 거리를 두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성으로 복무하였다.[2] 현재 경상남도 병무청장[3]병무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