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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보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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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지국 사건 관련 동영상

1. 개요2. 전개3. 기타

1. 개요

[ruby(赤報隊事件, ruby=せきほうたいじけん)]

1987-1990년 사이에 일본에서 일어난 적보대(세키호타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에 의해 일어난 아사히 신문사 연쇄 테러 사건.

2. 전개

1987년 1월 24일 오후 9시쯤 아사히 신문도쿄 본사 2층에 누군가가 산탄총 두 발을 쏘고 달아난 것에서부터 사건이 시작되었다. 얼마 뒤 스스로를 적보대라고 자칭하는[1] 자들이 범행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들은 스스로 반일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결성되었고 아사히 신문사에 가한 공격은 그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때는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는 않은 듯하지만 1987년 5월 3일[2]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오후 8시 15분쯤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에 산탄총을 든 남자가 난입해 지국에 있던 29살 코지리 토모히로 기자와 42세 중년 기자에게 총격을 가했다. 코지리 토모히로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사망했고[3] 중년 기자는 오른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5월 6일 적보대 명의의 범행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우리는 진심이다. 아사히 신문사의 직원들을 모두 처형하겠다."[4]는 흉흉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이어 1987년 9월 14일 나고야에 있는 아사히 신문의 직원 기숙사에 누군가가 총격을 가한 뒤 사라졌고 이듬해(1988년) 3월 11일에는 시즈오카에 있는 아사히 신문 지국 주차장에서 폭탄이 설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다행히 폭탄이 발견되어 미수에 그쳤다. 이후 나온 범행성명에서는 아사히, 마이니치, 주니치 등을 반일 언론으로 규정하고 처단하자고 주장했지만 마이니치 신문이나 주니치 신문에는 딱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날 나카소네 야스히로 前 총리와 다케시타 노보루 前 총리의 집에 적보대 명의로 협박장이 배달되었다. 시즈오카 소인이 찍인 이 협박장에서 나카소네 前 총리에게는 "너는 야스쿠니 신사와 교과서 문제로 일본 민족을 배반했다. 오늘 아사히를 처단했으니 다음 차례는 너다."라고 했고 다케시타 前 총리에게는 "네가 8월에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으면 우리 적보대의 처형목록에 너의 이름을 올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몇 달이 지나 1988년 8월 10일 리크루트사의 前 회장 에조에 히로마사의 집에 누군가가 산탄총을 한 발 쏘고 달아났다. 이후 나온 범행성명은 "반일 아사히에 광고를 낸 기업도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5]

1990년 5월 17일 나고야에 있던 민단계 재일교포의 한국인 회관에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 범행 성명에는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반대하며 일본에 사는 반일 한국인을 한 명도 남김없이 처단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둔 상황에 한국 정부가 아키히토 덴노의 과거사 사과 문구를 놓고 일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적보대는 "로타이구[6]는 오지 마라. 만약 오게 되면 안전 보장을 못 한다."며 언론사에 협박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했고 별다른 불상사도 없었다.

이후 적보대의 명의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과연 적보대가 어떤 단체인지, 아니면 한 개인이 테러단체를 자칭해서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적보대 명의의 범행을 저지른 동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역사 교과서 문제[7]가 발단이 되었다는 시각이 많다. 이는 나카소네 前 총리에게 보낸 협박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왜 하필 아사히 신문을 테러 대상으로 골랐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 국가비밀법이 논란이 되었는데 아사히 신문이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비밀법 통과를 사설에서 반대한 것이 한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단독범은 아니라는 분석이 있는데 목격된 범인들의 인상착의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실제로 단체가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 있다. 범행성명은 엘리트적인 30대 남성이 썼다고 분석되었다.

2001년과 2002년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지만 여전히 일본 경찰은 적보대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추적 중이라고 한다.

한동안 잊혔던 적보대는 2009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2월 22일 NHK 후쿠오카 방송국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설치해 현관에 설치된 기구가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도쿄 시부야의 NHK 방송센터와 나가노, 후쿠오카, 삿포로의 NHK 방송국에 누군가가 구 일본군의 38식 소총 실탄을 적보대 명의로 보낸 사건이 발생했고 6월 8일에는 NHK 히로시마 방송국에 또 다시 적보대 명의로 같은 38식 소총 실탄이 배달되었다.

일본 최대의 우익 잡지 주간 신쵸(週刊新潮)는 한신 지국을 습격한 범인의 수기라는 것을 실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수기에 의하면 아사히 한신 지국을 습격한 이유는 미국 대사관의 의뢰였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검증 보도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 수기를 썼다는 사람도 자신은 적보대 사건의 범인이 아니고 주간 신쵸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실토해 결국 주간 신쵸는 오보를 시인하고 사과해야 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2011년 6월 30일에는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의 사무실에 적보대 명의로 송곳이 배달되었고 동봉된 편지에는 오자와와 간 나오토 당시 총리의 퇴진 및 민주-자민 대연립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인으로 보아 6월 28일에 오사카부 내에서 보내진 걸로 추정되었다. 다음날인 7월 1일에는 간 나오토 총리의 사무실로 적보대 명의의 칼날이 배달되었고 동봉한 편지에는 오자와 이치로에게 천벌을 내리겠다는 등의 협박이 적혀 있었다. 경찰의 추적 결과 이 편지는 오자와 전 간사장 사무실로 보내진 것에 하루 앞선 6월 27일에 오사카부에서 보내졌고 두 편지 모두 협박장의 내용과 필적이 유사한 걸로 나타났다고 한다.

2012년 5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도쿄 본사에 산탄총 실탄으로 보이는 금속이 들어 있고 ‘적보대’라고 쓰인 우편물이 배달됐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음모론자들은 적보대가 정관계 거물급 인사들의 비밀결사라는 주장을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현재도 산탄총으로 기자들을 죽인 자들은 잡히지 않고 있다.

3. 기타

2018년 1월NHK에서 스페셜 드라마화되었는데 쿠사나기 츠요시가 주연[8]을 맡았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1990년 사건 당시 동경 특파원이었다. 1987년 사건 당시 동경 특파원은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성원이었다.

]

[1] 정확한 명칭은 '일본민족 독립의용군 별동적보대 일동'이라고 했다.[2] 일본에서는 헌법기념일로 공휴일이다.[3] 순직으로 구분되어 차장대우로 승급되었다. 사건 이후 그의 딸은 아사히 신문 소속 기자가 되었다.[4] 심지어 협박장에 '아카이 아사히'라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빨갱이 아사히라는 뜻이 된다.[5] 하지만 리크루트가 아사히 신문에 딱히 많은 광고를 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납득이 가는 이유가 리크루트 사가 일으킨 일본 최대의 정치자금 스캔들인 리크루트 사건을 제일 먼저 보도한 언론이 아사히 신문이었기 때문이다.[6] '로타이구'는 노태우의 한자 표기 [ruby(盧泰愚, ruby=ろたいぐ)]를 음독한 표현이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의 지명이나 한국인의 인명을 표기할 때 모두 한자에 일본식 독음이 주류였으나(예: 金大中(きんだいちゅう), 朴正熙(ぼくせいき))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앞둔 시점부터 한국 정부가 한국어 원음을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원음을 존중하고 한자 위 혹은 괄호 안에 한국어 발음을 가타카나로 표기하기 시작했다.(예: 李明博(イ・ミョンバク), 朴槿恵(パク・クンヘ), 文在寅(ムン・ジェイン)). 현재 일본 언론에서 노태우의 공식적인 표기는 "ノ・テウ"다.[7] 나카소네 前 총리 재직 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는데 가장 큰 현안이 독도 문제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였다.[8] 아사히신문 특명취재반 소속 기자 히다 츠요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