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정봉필(鄭鳳弼) |
자 | 사언(士彦) |
호 | 이우당(二友堂) |
출생 | 1880년 5월 10일 |
경상도 안의현 고현면 장기리 (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1] | |
사망 | 1938년 2월 5일[2] (향년 57세) |
경상남도 거창군 | |
본관 | 초계 정씨[3] |
가족 | 막내동생 정영필, 손자 정연원[4] |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5]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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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0년 5월 10일 경상도 안의현 고현면 장기리(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에서 아버지 경곡(耕谷) 정상식(鄭湘植, 1853 ~ 1919.7.28.)[6]과 어머니 안동 권씨(1853 ~ 1921.8.2.)[7]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3월 22일 거창군 읍내면[8] 장날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벌이려 했던 오문현(吳文鉉)[9]·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이병홍(李秉洪)·김호 등 6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조면과 가북면민 3천여명과 함께 이날 오후 2시 30분경, 몽둥이를 가지고 위천면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읍내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가조면 살피재(沙浦峴)에 이르렀을 때, 거창군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와 가북면 용산리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헌병분견대가 합세하여 진로를 차단하고 빈 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헌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때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의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시위대열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진주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8년 2월 5일에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막내 동생 정영필의 무덤 위쪽에 안장되었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