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8월 29일[1] ~ 1988년 8월 25일 (향년 59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평론가. 본명은 정군재.2. 일생
1928년 평안북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평양남산국민학교 졸업 후 평양제1중학교로 진학, 해방 후 북한 치하에서 고급중학교로 학전을 옮겼으나 실제 등교한 예는 거의 없었다. 1945년 8.15 해방 전에 일본 교토제3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했으나 일본이 패전하기 전의 상황이라 유학 자체가 불가능해 교토대학 진학의 꿈은 깨졌고 그 상태로 해방을 맞이했다.1946년 월남 후 인천대학(가칭)[2]에 학적을 두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로 옮겼지만 당시 국대안 파동으로 시끄러운 데다 학생들 중 좌익 성향이 많아서 고민의 나날을 보냈고, 독서, 음악, 영화 감상에 많이 매진했다. 스포츠 중에서 야구를 좋아했으나 축구에도 관심이 많아 동생 정완재가 뛰는 숭의국민학교 축구부 코치 겸 감독으로 나서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1월에 입대하여 7사단 3연대 수색대로 배치되었으나 부산 피난 당시 부상으로 후송, 그 뒤 집에서 치료받고 부산 항만기지 사령부 군속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3년 환도 후 학업을 지속하려고 했으나 서울대 학적이 남지 않아 1933년생으로 가호적을 썼고, 군 소집을 면하고자 숭실대학 문학부 철학과(54학번) 등 몇 곳에 학적을 두었으나 여의치 않자 1956년 월간 <스크린> 지 기자로 평론가 생활을 시작해 1958년 동신영화사 조감독 등을 거치다 서울 명동의 돌체다방에서 DJ로 일하면서 손님들에게 이름을 날려 1959년 결혼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군적에 복귀하여 사면으로 제대 후 원래 호적으로 복적,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입사 초기 문화부에 있다가 1970년 차장 승진 후 사업부에서도 같이 겸무, 1972년 체육부를 거쳐 같은 해 사업부장으로 첫 보직간부를 맡아 문화부장(1974~1976), 사업부장(1976~1980), 특집부장(1980~1983), 소년조선일보 주간(1983~1984), 편집위원(1984~1987) 등을 맡다가 1987년 9월 30일 정년퇴임했다. 1985년 10월 2일부터 1988년 5월 22일까지 <정영일 사랑방>을 고정연재했다.
방송 활동에도 열성을 보여 KBS 1TV 명화극장 등에서의 영화 소개로 유명했으며, KBS 2TV <사랑방중계> 고정패널로도 출연하여 원종배 MC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고 MBC FM <음악과 인생>에서도 출연해 음악 얘기를 하기도 했다. 동생 정완재가 후술할 <마지막 로맨티스트 정영일>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자기 집안의 생일을 전부 기억하며 생일날만 되면 으레 생일케익 등을 보냈는데 제수의 생일까지도 정확히 맞춰 선물을 보낸 일화도 있었다. 식도락에도 일가견이 있어 특히 면류 음식에선 상미(賞味) 수준이라 냉면, 막국수 등의 첫 젓가락에 메밀의 함량을 A~C급으로 분류해내 국수집 주인을 놀라게 했는데 이는 홍성유 작가조차 인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지방 드라이브에도 취미를 붙여 주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를 많이 다녔는데 주로 중국군과 격전했던 현장을 찾았으며 한 번 다녀온 코스는 붉은 줄로 꼭 그었고 먼 거리도 당일 귀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요 어록으로는 좋은 영화를 추천할 때 하는 이번 영화를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가 있다. 1980년대 중반 내내 대우전자가 '대우비디오테이프' 레이블로 낸 테이프들 뒷표지에서 그의 사진이 작게 나오고 영화감상도 나왔는데 영화 홍보성이 컸기에 지금 보면 닭살돋는 글귀가 많았다. 1987년에 낸 《슬럼버 파티에서 생긴 일》 비디오판에선 마지막에 "아 무서워!"라고 글을 쓰기도 했다. 또한 동생인 정완재는 그 시절 국내에 팝송 보급의 기수였던 월간팝송의 발행인/편집장이었으니, 형제가 비슷한 일을 했던 셈이다.
1988년 5월 20일에 과로로 쓰러져 서울 이촌동 금강병원에서 몸져 누웠고, 대세 및 병자성사를 거쳐 8월 25일 밤 10시 30분에 지병인 고혈압으로 향년 60세로 숨을 거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외동딸이 있으며, 장례 미사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어 문화평론가인 김종원 선생과 변인식 선생, 안병섭 교수, 훗날 영화진흥위원회의 회장이 된 강한섭 교수, 고인이 평소에 아꼈던 영화감독인 정인엽 감독과 배창호 감독, 고교얄개의 석래명 감독, 여성 영화기획자인 채윤희, 스포츠조선의 문화부 기자인 이창세 기자, 영화자료 연구가로 유명한 정종화 선생이 참석하는 등 그를 애도했다.
사후인 1994년에 고인이 평소에 쓰던 글인 영화평과 음악에 관한 평론을 묶어서 간행한 <마지막 로맨티스트:정영일~그가 쓴 영화, 음악, 세상 이야기>가 나왔으며 절친한 후배였던 정중헌 스포츠조선 부사장이 엮었다. 여담으로 정중헌 부사장이 스포츠조선의 문화연예부장 재직시절에 제정한 정영일 영화 평론상이 청룡영화상에서 시상된 바가 있었지만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총 4차례의 수상자만을 내고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3. 참고 자료
- 마지막 로맨티스트 정영일: 그가 쓴 영화, 음악, 세상이야기 - 정중헌 편. 미세기. 1994. p343~346.
- 한국신문방송연감 1977 - 한국언론연구소. 1977. p780.
- 한국언론 인물사전: 1883~2009 - 한국언론재단. 2009. p1299
- 조선일보 100년사 인물/자료 - 조선일보사. 2020. p171.
- 1988년 8월 26일 조선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