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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컨데르베우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스컨데르베우
Skënderbeu[1]
파일:Ritratto_di_Giorgio_Scanderbeg.jpg
본명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Gjergj Kastrioti)
출생 1405년 5월 6일
사망 1468년 1월 17일 (향년 62세)
가족 부 존 카스트리오티
모 보이사바 카스트리오티[2]
배우자 도니카 카스트리오티[3]
자녀 아들 존 카스트리오티 2세
학력 오스만 술탄국 왕립학교
서명
파일:스컨데르베우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1423(19세)~1443(39세), 21년간)2.3. 알바니아 저항운동의 지도자(1444~1468)
2.3.1. 몸을 일으키다2.3.2. 저항 초기
2.3.2.1. 1444, 레저 동맹 결성: 게릴라 전술2.3.2.2. 1444 6/29, 토르비올 전투: 승리 → 바르나 십자군의 희망2.3.2.3. 1447 ~ 1448,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 양면 전쟁2.3.2.4. 1450, 크루여 수성
2.3.3. 1451 ~ 1462, 전성기
2.3.3.1. 1451, 1452, 메흐메트 2세를 막아냄2.3.3.2.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소식2.3.3.3. 1455, 베라트 공방전의 실패: 위기2.3.3.4. 1457 ~ 1462, 알불레나(우여바르다) 전투: 최대의 승리와 휴전
2.3.4. 1462 ~ 1466, 후반기
2.3.4.1. 1462, 오스만 격파2.3.4.2.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동맹 연장2.3.4.3. 1463, 십자군의 불발2.3.4.4. 오스만 제국의 역공: 오스만에게 패함2.3.4.5. 1465, 1466, 메흐메트 2세의 3번에 걸친 총력전: 모두 막아냄2.3.4.6. 1468, 사망(62세)
2.4. 사후
3. 기타4.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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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의 군사 지도자로 발칸 반도를 파죽지세로 점령해나가던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에 대항한 지도자 중 한 명이자 가장 성공적이었던 저항자.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으로 25년에 걸친 반 오스만 항전을 주도했으며, 끝내 생이 다할 때까지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켜냈다. 사후 알바니아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 굴복했으나, 카스트리오티의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져 알바니아인들에게는 실질적인 국가와 민족의 시조격인 인물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라는 본명보다 알바니아어로는 '스컨데르베우(Skënderbeu)', 영어로는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라고 하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이던 시절에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용맹함을 인정한 오스만인들이 그에게 준 '이스켄데르(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과 그에게 수여했던 작위인 '베이'(태수)를 더한 '이스켄데르 베이'(اسکندر بگ / İskender Bey)에서 유래한 것이다.[4] 대단히 유명한 별명이라 사실상 이름과 맞먹을 정도. 실제로 그 자신도 스컨데르베우라는 별명을 자신의 이름처럼 사용하였다.

2. 생애

2.1. 초기

1405년 알바니아 중부의 카스트리오티라는 귀족 가문의 8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카스트리오티 가문은 알바니아 중부에 꽤 넓은 영지를 보유한 가문이었으며, 그의 모친은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지역 출신 귀족이었다. 당시 카스트리오티 가문은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로서 데브시르메 제도에 따라 자식이 징집되거나, 볼모로 끌려가 오스만식 교육을 받고, 전시에는 병력을 이끌어 오스만 술탄국 군대의 일원으로 종군할 의무가 있었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2.2.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1423(19세)~1443(39세), 21년간)

제르지는 데브시르메 제도에 의해 징집되어 1415년(11세)부터 1423년(19세)까지 9년간 당시 오스만의 수도였던 에디르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오스만 술탄국의 왕립학교[5]에서 교육을 받았고, 최소 3년 이상의 군사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그에 대한 기록은 알바니아 지역의 몇몇 법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엔데룬에서의 교육을 마친 그에게 오스만 술탄국은 그의 아버지 영지 인근의 티마르(영지)를 수여했다. 그의 아버지, 존 카스트리오티(Gjon Kastrioti)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이자 동시에 베네치아 공화국 등 근방의 기독교 세력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엔데룬에서 교육받은 제르지가 바로 근처의 티마르를 수여받아 부임했다는 것이, 존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빼앗아 오스만 술탄국의 교육을 받은 제르지에게 주어진 티마르에 이를 합치겠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존 카스트리오티는 오스만의 지사와 싸우다 패해 영지가 줄거나, 친척들과 오스만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에 제르지는 오스만의 충실한 신하로 남았다. 그래서 몰수된 가문의 영지가 제르지에게 수여되기도 했으며, 1437년에서 1438년 사이에는 알바니아 지역의 지방관(튀르키예어로 subaşi라고 한다)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충실하고 능력있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였으며, 그가 지방관 직무를 다한 1438년에는 그의 아버지 영지를 포함하는 더 큰 티마르(영지)가 수여되기도 하였다. 무라트 2세가 그에게 태수('베이')직을 수여하면서 그의 유명한 별명 '스컨데르베우'를 얻게 해주었고, 이때 그는 5천에 달하는 기병과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대영주가 되어 있었다.

1437년 부친 존 카스트리오티의 사망 이후 그는 아버지의 남은 영지와 함께 카스트리오티 가문이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6]과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도 계승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그는 오스만 술탄국의 충실한 신하이자 1443년까지 오스만 술탄국의 주요 장수 중 한명으로 후녀디 야노시(1407 ~ 1456)의 지휘 하의 기독교 세력과 맞서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가문 계승과 그로 인한 가문원 및 주변 세력과의 교류가 1444년 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3. 알바니아 저항운동의 지도자(1444~1468)

2.3.1. 몸을 일으키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즉 스컨데르베우가 오스만 술탄국을 떠난 것은 헝가리에서 출발한 바르나 십자군이 불가리아의 니스를 공격한 1443년 11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알바니아인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에 복무하던 3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군을 이탈, 알바니아로 가서 위조편지를 통해 알바니아 산간의 크루여(Krujë) 요새를 점거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써오던 오스만어 이름을 버리고 알바니아어 이름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Gjergj Kastrioti)를 내걸었으며, 가문의 문양인 검은 쌍두 독수리를 내걸었다. 이때 그는 크루여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그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여기에서, 그대들 가운데에서 찾았노라."

알바니아에서는 이미 1443년(39세)부터 오스만 술탄국에 반하는 반란이 일어난 상태였다. 이 시기는 오스만 술탄국의 팽창을 막고자 하는 기독교 세력의 동시다발적인 반격이 있었던 시기인데, 헝가리에서는 2만 5천에 달하는 '콘스탄티노플 구호 십자군'이 결성되어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37세), 교황청의 체사리니 추기경, 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브와디스와프 3세 등의 지휘 하에 진격해 니스에서 전투를 벌여 오스만군을 대파하는 등의 전적을 올렸고, 남부 그리스에서는 모레아의 군주 콘스탄티노스 친왕(후의 콘스탄티노스 11세)도 마찬가지로 로마의 후원을 받아가며 중부 그리스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알바니아에서는 대대적인 반오스만 반란이 일어나 있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오스만 술탄국이 신임하던 장군이자 알바니아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스컨데르베우가 동참한 것. 이는 오스만 술탄국이 알바니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2.3.2. 저항 초기

2.3.2.1. 1444, 레저 동맹 결성: 게릴라 전술
1444년 3월, 스컨데르베우는 알바니아 중부의 영주들을 모아 '레저 동맹[7]'을 결성하여 그들의 민족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초기 동맹군의 수는 1만에서 1만 5천에 달했으나, 스컨데르베우는 자신의 직속병력에 대해서만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나머지는 간접적인 지휘만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오스만 술탄국의 거대한 군사력은 레저 동맹의 것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컸기에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체로 알바니아의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활용해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하였다.
2.3.2.2. 1444 6/29, 토르비올 전투: 승리 → 바르나 십자군의 희망
알바니아의 대대적인 반란에 오스만은 즉각 진압군을 파견했다. 무라트 2세는 자신이 신임하던 지휘관 알리 파샤에게 2만 5천 ~ 4만에 달하는 군을 맡겨 레저 동맹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스컨데르베우는 1444년 6월 29일 토르비올에서 일부러 언덕 바로 아래에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기병이 주력인 오스만군을 유인한 후에 후방에 미리 배치해둔 기병으로 기습하는 방식으로 오스만 군을 격파해냈다. 이 승리는 오스만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와 십자군이 재결성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을 위해 남하하도록 하였다.[8] 이후에도 오스만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히 격퇴당하고 말았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은 1445년과 1446년에 총 두번에 걸쳐 원정군을 보냈는데, 이 두 번의 원정은 알바니아의 반란군에 의해 격퇴됐다.
2.3.2.3. 1447 ~ 1448,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 양면 전쟁
그러나 레저 동맹은 얼마 안 있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다. 동맹의 물주를 맡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Dagnum 요새의 소유권을 두고 1447~1448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요새 확보를 매우 중시하여 군사, 외교적 공세와 더불어 스컨데르베우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이와 동시에 무라트 2세에게 스컨데르베우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로인한 양면전쟁에서 스컨데르베우는 베네치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으나, 오스만을 상대로는 스베티그라드[9]가 메흐메트 2새에게 함락당해 동맹의 수도이자 스컨데르베우의 본거지인 크루여 요새가 오스만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위기를 불러온다. 스컨데르베우는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움직였으나 베네치아와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단 상황 탓에 오스만군의 포위를 풀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그러던 1448년, 베네치아의 요청을 받아 진군하던 오스만군이 오라니크에서 패배하자 베네치아는 결국 레저 동맹과 타협해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스컨데르베우(44세)는 오스만에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42세)가 오스만 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그에 합류하러 군을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녀디의 대 오스만 전쟁의 한 축을 담당할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 주라지 브란코비치(72세)가 헝가리군과의 연합은 커녕 침묵을 고수하면서 뒤로는 오스만에 헝가리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후녀디와 합류하려는 스컨데르베우를 세르비아군을 보내 막기까지 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 그는 결국 헝가리군과 합류하지 못했고, 헝가리군은 코소보에서 오스만군에 참패를 당하고(1448년), 스컨데르베우는 알바니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같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세르비아가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이렇다. 스컨데르베우가 거병하기 전인 1439년에 세르비아가 일시 멸망했다가 1444년에 오스만과 헝가리와의 강화 덕분에 재건된 일이 있었다. 당시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오스만과의 완충국으로 여겨서 세르비아 공작에게 넓은 영지를 주는 등 양자간에 봉신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헝가리의 신하이기 이전에 오스만의 신하국이였고, 무엇보다 세르비아의 공작인 주라지가 후녀디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일개 장군임에도 자신을 부리려 든다는 생각을 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스컨데르베우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신할 물주로 아라곤 왕국을 선택했다. 당시 아라곤 왕인 알폰소 5세(나폴리 왕으로서는 알폰소 1세)는 서쪽으로는 지브롤터, 동쪽으로 보스포루스에 이르는 대제국을 창건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컨데르베우와 알바니아를 이를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서 지원을 결심했다. 이후에 스컨데르베우는 아라곤과의 관계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고, 10년 후 1458년에는 알폰소가 죽고 페르디난도 1세가 그 뒤를 이었을 때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기도 했다.
2.3.2.4. 1450, 크루여 수성
1450년, 스베티그라드가 오스만군에 의해 함락된 지 2년 뒤, 레저 동맹의 중심이자 스컨데르베우의 거성인 크루여는 오스만의 공격을 받는다. 무라트 2세(47세)가 직접 이끈 군의 규모는 10만을 헤아릴 정도로 고작해야 8천여 정도의 알바니아 군에 비해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월등했다. 더욱이 스컨데르베우군은 스베티그라드의 함락과 2차 코소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사기도 낮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알바니아의 산악지형에서는 대군의 전개와 보급이 대단히 어려웠고, 공격 목표인 크루여 요새는 극히 견고하여 거의 산의 일부분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또한 스컨데르베우(46세)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응하여 16개월을 버틸만한 물자를 비축해두면서, 게릴라전을 위해 병력의 절반을 거느리고 요새 밖으로 출격, 오스만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교란하였다.

결국 6개월의 포위전 끝에 오스만은 약 2만의 병력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스컨데르베우가 베네치아 측에 오스만 술탄국에의 식량 공급을 통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먹혀들자[10] 결국 물자 부족으로 오스만군은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스컨데르베우는 시칠리아 섬의 라구사로 가서 지원을 요청했고, 아라곤과 교황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실지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2.3.3. 1451 ~ 1462, 전성기

2.3.3.1. 1451, 1452, 메흐메트 2세를 막아냄
1차 크루여 공방전에서 레저 동맹이 승리하였으나 장기간의 공성전으로 레저 동맹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물자 부족이 심각하였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관계가 약화되어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오스만 술탄국은 언제든 재침하여 알바니아를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컨데르베우에게는 후원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폴리를 장악하고 그보다도 더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노력했던 아라곤 왕국이 바로 그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그는 즉위하면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알바니아에 대한 공격도 진행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레저 동맹에 적대적인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는 바로 1452년에 알바니아를 공격하였다. 총 2만에서 2만 7천 사이에 달하는 오스만군은 오스만측에 귀순한 알바니아 족장들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두갈래로 갈라져 알바니아로 진입해 들어갔으나, 스컨데르베우는 이를 재빠르게 각개격파해 내는데 성공하여 다시한번 오스만 술탄국의 알바니아 정복 시도를 저지해 내었다.
2.3.3.2.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소식
그러나 이 승전보는 직후 벌어진 공성전과 그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동로마 제국 멸망이라는 충격 속에 빛이 바랬고, 동로마 제국의 멸망 후 자신에게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 예측한 스컨데르베우는 서방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고 다녔다.
2.3.3.3. 1455, 베라트 공방전의 실패: 위기
레저 동맹에 위기가 닥친 것은 1455년 베라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였다. 베라트는 남부 알바니아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요충지로, 오스만 제국의 공작[11]으로 이 도시가 오스만의 것이 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레저 동맹군이 아라곤에서 지원한 포병과 함께 이 도시를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것.

오스만 제국은 이 도시가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자 바로 2만에 달하는 지원군을 보냈고, 스컨데르베우는 이 군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베라트 탈환에는 실패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는 레저 동맹에 가담했던 알바니아 영주들을 흔들었고, 가장 스컨데르베우의 신뢰를 받던 인물인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 심지어 그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까지도 오스만 제국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알바니아를 공격하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알바니아의 독립은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며 이 이상의 저항은 오히려 알바니아에 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나름 애국자였던 셈이지만 메흐메트 2세는 그를 이용하고 버릴 작정이었으며, 모이시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알바니아군에게 또다시 박살나게 된다. 이에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하여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오지만, 스컨데르베우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추후에 그를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부른다면 엄벌에 처하겠노라고 공포했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스컨데르베우를 배반하지 않았으며, 1464년에 오스만군에 포로로 잡힐 때까지 알바니아의 편에서 싸웠다.

한편 스컨데르베우의 조카였던 '함자 카스트리오티'는 아들이 없는 삼촌이 죽으면 알바니아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1454년에 스컨데르베우가 아들인 존 2세를 낳은 것이 불만이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배신한 것이다. 이후 그는 1457년의 알불레나 전투에서 스컨데르베우와 싸웠지만 포로로 잡혔고,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는지 나폴리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하지만 이후 풀려나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고, 고위 지휘관으로 살다 죽었다. 행적을 보면 이뭐병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지만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기에,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그의 배반을 아쉬워했다고.
2.3.3.4. 1457 ~ 1462, 알불레나(우여바르다) 전투: 최대의 승리와 휴전
그러나 얼마 안가 1457년, 알불레나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그의 조카와 측근들까지 투항하자 이를 기회로 여긴 오스만 제국은 5만에서 8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알바니아로 진격시켰고, 게릴라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움직였으나 스컨데르베우는 이 군대에 대해 기습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과 군대의 위치를 완벽하게 숨겨 오스만 제국군으로 하여금 그가 알바니아를 포기하고 도망갔다고 여기게 만든 후 주둔지에 전 병력을 동원한 기습을 가해 오스만 군대의 반을 날려버리는 대성과를 거둔 것(전사, 포로 도합 3만여). 기습이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오스만군은 스칸데르베르가 알바니아에서 도망친 줄 알았다고. 스컨데르베우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가 포로로 잡힌 전투가 바로 이 전투다.

바로 전해에 벌어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뒤이어 다시 한번 당한 이 참패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큰 피해였다. 거기다 이 소식에 호응하여 남부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대대적인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3년 동안의 휴전협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불레나 전투는 오늘날 우여바르다 전투라고도 하는데, '스컨데르베우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프란츠 바빙거)'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먼저 교황령과 나폴리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스컨데르베우를 배신한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명에 불과했으리라고 추정된다는 것.

이후 오스만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 스컨데르베우는 후원자인 아라곤 왕국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아라곤 왕국이 앙주 세력과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분쟁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에 대향하기 위해 레저 동맹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공격이 재차 시작되는 1462년때까지가 사실상 스컨데르베우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이 왈라키아 공국에서는 블라드 3세의 2차 집권중 오스만 제국의 사절을 죽임으로서 전쟁을 건 시기(1459)이다. 이후, 1462년 블라드 3세는 전투에서 패해 헝가리 왕국으로 도망간다.

2.3.4. 1462 ~ 1466, 후반기

오스만과의 평화는 1462년 끝이 났다. 이동안 메흐메트 2세트레비존드 제국과 모레아 공국을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의 잔존세력들을 정리하고, 왈라키아 공국블라드 3세에게서 '친오스만 제국파'였던 그의 동생 라두 3세에게 맡기는데 성공한다. 는 이제 골칫거리였던 알바니아의 레저 동맹을 본격적으로 재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2.3.4.1. 1462, 오스만 격파
그러나 스컨데르베우는 우선 진격해 오는 오스만 군대를 기습해 격파한 후 오늘날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있는 지역까지 공격해 나아가는 대담함을 보였으며, 한 달 동안 세번의 교전으로 이 지역을 지키던 오스만 군대들을 모두 격파해 이 일대의 오스만 제국의 통치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10년간의 휴전협정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와 스컨데르베우 양측 모두 이것이 길게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3.4.2.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동맹 연장
이시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국이 확보하고 있었던 에게 해의 섬들에 가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선 장기간에 걸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성공적인 투쟁을 벌여온 스컨데르베우와 레저 동맹은 귀중한 동맹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양측은 1448년 맺어진 평화협정을 갱신하고 더 나아가 냉전 상태였던 양측의 관계를 동맹 상태로 회복하여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방어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2.3.4.3. 1463, 십자군의 불발
1463년, 교황 비오 2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하는 십자군을 선언하였고, 이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 레즈해 동맹, 헝가리 왕국은 바로 이에 호응하여 평화조약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세력들은 이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고, 실망한 비오 2세가 얼마 안가 사망하자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출신의 군사 지휘관인 발라반 바데라[12]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공격에 나섰다.
2.3.4.4. 오스만 제국의 역공: 오스만에게 패함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공격하자 스컨데르베우는 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진입하여 오스만 제국의 측후방을 교란하려 하였으며 베네치아의 병력과 연합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바이칼 계곡에서의 교전에서 피로스의 승리라 할만한 피해를 입어 물러나야만 했다

이때 스컨데르베우는 '발라반 바데라'가 이끄는 군대를 계곡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사방에서 협공을 가하려 했는데, 발라반이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바람에 기습이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군을 계곡 위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는데, 고위급 지휘관 가운데 몇몇이 퇴각하는 적을 쫓지 말라는 스컨데르베우의 명령을 까먹고 잊어버리고 적군을 신나게 추격. 하지만 발라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세를 정비했고, 알바니아군 지휘관들은 줄줄이 포로로 잡혔다. 그 가운데에는 스컨데르베우가 총애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던 인물도 있었고, 스컨데르베우는 원하는 건 다 지불할 테니 포로들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지휘관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자신을 섬기라고 설득했고, 누구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모조리 고문한 다음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로 알바니아군의 군사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어, 스컨데르베우가 사망한 뒤 알바니아가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3.4.5. 1465, 1466, 메흐메트 2세의 3번에 걸친 총력전: 모두 막아냄
이에 기선을 잡았다 여긴 메흐메트 2세는 총력전을 시작했다. 1465년 4만의 병력으로 알바니아를 들이첬고, 이것이 격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 재차 공격에 나선 것.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1466년 크루여에 육박한다. 이 과정에서 메흐메트 2세는 이제까지의 알바니아 전쟁의 실패는 알바니아의 복잡한 지형과 민중들의 비협조에 있다고 판단하고, 알바니아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살상과 난민들을 크루여로 몰아넣는 것을 병행하여 진격로 주변을 정리하였으며 숲을 뚫고 군사용 도로를 개설하여 보급선을 구축하는 등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이런 일은 과거 트라야누스가 골치덩어리 다키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시행한 전략과 거진 동일하다. 거대제국에 맞서 약소국이 민족영웅(데게발루스, 스칸데르베우)의 집결 하에 최대한 저항했다는 사실도 비슷. 사실 이러한 일들은 이전의 지휘관들이 멍청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휘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밖의 일이었기에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도를 찾아보면 금세 알 수 있지만, 그 넓은 알바니아 곳곳을 정리하고 다닌다는 건 황제가 아니라 일개 지휘관으로서는 어려운 일.

스컨데르베우 역시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이 국력을 집중하여 진지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제까지의 후원자였던 나폴리 측에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메흐메트 2세의 의도는 크루여 요새 주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때 그러했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요새를 구축하여 다른 알바니아 지역과의 연계를 끊고 장기간의 공성전으로 함락시켜 레저 동맹의 핵심축을 제거한 후 이곳을 기점으로 잔존세력까지 모두 제거한다는 장기적인 정복계획이었다. 그러나 스컨데르베우는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맹공을 다시한번 견뎌내었고, 메흐메트 2세는 엘바산에 요새를 축조하여 알바니아를 남북으로 분단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13].

2차 크루여 공방전 또한 실패하자 메흐메트는 곧바로 엘바산 요새와 크루여에 3차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메흐메트가 직접 이끄는 대군도 크루여 성벽을 넘지 못한 마당에 이들이 알바니아를 정복할 수 있을 리는 없었고, 몇몇 대도시 인근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무렵, 레저 동맹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2.3.4.6. 1468, 사망(62세)
물론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족족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리의 기쁨 뒤에서 사상자가 조금씩 그리고 확실한 피해로 누적되고 있었고, 1460년대 중후반 당시 알바니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 이건 당시 오스만 제국과 알바니아의 인구와 경제력 차이만 따져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다. 현대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은 수준이다. 물론 스컨데르베우의 활약은 눈부셨고, 그렇기에 오늘날의 알바니아인들이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스컨데르베우와 다른 알바니아 영주들은 대응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여기서 그만 말라리아에 걸려버린 스컨데르베우는 1468년 1월 17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2.4. 사후

스컨데르베우가 죽었을 당시, 그 아들인 존 2세는 열다섯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이후 레저 동맹은 분열되었으며 후원자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기회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은 1474년 재차 공격을 시작했고, 스컨데르베우의 본거지였던 크루여는 1478년에 함락. 알바니아의 마지막 보루였던 슈코더르마저 1479년에 함락되면서 알바니아의 저항은 끝을 맺는다.

3. 기타

알바니아인들의 스컨데르베우 존경은 현대에도 이어져 오늘날,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고[14], 알바니아의 국기는 아예 스컨데르베우의 가문인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가문 문양인 검은 독수리에서 비롯되었다. 사실상 알바니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인물.

또한 스칸데르베우에 대한 평가는 알바니아 국외에서도 호평이 자자한데, 많은 사학자들이 스컨데르베우의 군사적 능력을 그중에서도 방어전 능력에 있어서는 역사상 손꼽을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주로 비견되는 명장들은 나폴레옹에 맞서 승리한 아서 웰즐리, 소련군의 반격을 막다 못해 역으로 반격에 나서고 성공한 발터 모델이 있다.[15]

스컨데르베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던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에 이에 대항한 여러 민족영웅들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오랫동안 성공적인 투쟁을 이끌어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엄격한 정치행보로 인해 내부의 적에게 음해당하여 벰파이어 전설의 시초가 되어버린 블라드 3세는 고작 6년이었고,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는 동유럽에서 손꼽히는 강국의 섭정이었으나 본격적으로 대항하기 전 병으로 사망하며 마차시 1세에게 바통을 넘기나 그 마차시 역시 동유럽 특유의 불안정한 귀족-국왕정에 의해 사후 3분할 당하며 헝가리의 암흑기가 도래하고 만다..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역시 오스만의 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것은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결국 체급차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장기간 버텨내지 못하고 패사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곧 스컨데르베우는 산 투성이 깡촌에 가까운 매우 제한적인 국력의 나라에서 전술전략만으로 무려 25년을 버텨내었으며 때로는 성공적인 공세를 펼치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 제동을 걸기까지 했다! 알바니아의 국부와 동시에 동유럽의 구원자라는 타이틀에 모자람이 없는 인재라고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스컨데르베우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력의 투사로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이러한 명성, 군사적 성과, 외교적 능력을 활용해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솜씨도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날 알바니아의 민족의식 자체를 일깨우고[16] 알바니아인이라는 존재를 형성시킨 인물 중 하나로 추앙받는다. 스컨데르베우의 투쟁은 알바니아인의 정체성이자 국가 통일, 자유, 독립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는 알바니아의 많은 전설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근대 알바니아의 최초이자 유일한 국왕인 조구 1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아들 존 2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가게된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후손 대다수는 이탈리아에 거주중이다.

스컨데르베우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그의 전설적인 무용도 포함되어 있다. 메흐메트 2세로부터 받은 마법의 힘이 담긴 검과 존재만으로도 상대 말을 겁먹게 하는 키높이 효과도 있다고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말을 지닌 그는 언제나 전투에 앞장섰고 그의 칼 아래 평생 3천에 달하는 오스만 군인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평생 하루 5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고 그의 검을 딱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2명의 적을 철 투구째 베어버렸다고 하며 야생 곰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죽이고 다음 공격 한 번에 야생 버펄로를 베어버렸다는 등의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무용담은 이런 류의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여겨질 정도로 무패의 지휘관[17]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스컨데르베우의 활약상은 오스만 제국군마저 감복시켜서, 알바니아를 정복한 후 오스만 제국 병사들은 그가 묻힌 교회로 가서 그의 뼈를 서로 나눠서 부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잠깐 근데 이거 부관참시... 또한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은 후대에도 널리 추앙받아,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과 싸워 이겨낸 탁월한 지휘관으로 칭송받았다 [18].

스컨데르베우의 초상이나 동상 가운데 투구를 쓴 모습을 보면 투구에 염소 머리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건 정말로 염소가 맞다. 이는 1450년의 1차 크루여 공방전 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오스만군을 기습 공격하던 와중에 한 번은 밤중에 염소 한 무리를 오스만 군 진영으로 달리게 한 것. 그리고 그 염소들은 저마다 뿔에 등불을 매달고 있었고, 당연히 알바니아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있던 오스만군은 그쪽으로 몰려들었고 작전은 제대로 통했다. 스컨데르베우 스스로도 염소 작전은 기발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자신이 쓸 투구를 새로 제작하며 염소 머리 장식을 덧붙였고, 그의 투구라고 전해지는 물건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단 알바니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의 황실 무기박물관에 있다는 건 함정. 염소투구와 함께 스칸데베르그의 검 또한 전시되어 있다.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가족을 비롯해 알바니아 저항군을 지휘했던 귀족들과 오스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나폴리 왕국으로 피신해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알버레셔인(Arbëreshë people)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덕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도로 표지판에 이탈리아어와 알바니아 어가 병기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은 나폴리 왕국의 귀족으로 대를 이어갔고, 오늘날의 알바니아 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에도 참가했다.

스컨데르베우는 16, 17세기 발칸 반도와 유럽의 각종 문학에도 종종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볼테르가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언급한 적도 있고 안토니오 비발디와 안토니오 살비가 제작한 오페라 스칸데르베그(1718년 상연)에서도 등장하는 등 이후에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알바니아에서 영웅이었기에 위에 서술한 대로 조구 1세가 후손이라고 뻥을 치며 선전했고[19], 심지어 독재자인 엔베르 호자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높이 칭송했을 정도[20].

그래서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시절부터 지폐의 인물로 등장해 현재는 알바니아 5000레크 지폐의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파일:attachment/알바니아 레크/leke06.jpg

그 밖에도 그가 항상 대동하고 다니면서 게릴라 전술로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던 '스트라디오트'(Stradiot)라는 기병대도 유명하다. 이 기병대는 본고장인 알바니아에서도 활동했지만 베네치아로 가서 용병 노릇도 했다.[21]

4. 대중 매체에서

엔베르 호자 시기 1953년 소련-알바니아 합작으로 제작된 '위대한 전사 스컨데르베우'라는 영화가 있다. 1954년 칸 영화제에 출품해 국제상을 수상했다.

2012년 작곡된 알바니아의 노래인 알불레나(Albulena)는 스컨데르베우가 승리한 전투인 알불레나 전투를 찬양하는 노래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 1444년 스타팅 때 알바니아는 스컨데르베우를 군주 겸 장군으로 가지고 있는데 게임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장군 PIP가 6으로 도배된, 이 게임에 등장하는 최강의 장군 중 한 명이다.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의 그의 능력도 높게 평가하는지 6/5/6이라는 절륜한 능력치를 부여해줬다.[22] 그러나, 게임 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실제 역사와 달리 스컨데르베우의 미친 능력치 하나 가지고는 버틸 수가 없다.[23] 다만, 플레이어가 비잔티움을 잡는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는데, 비잔티움을 잡은 플레이어가 동맹 운빨을 조금만 잘 타면, 그 개사기로 유명한 오스만 초반 병종 PIP와 물량을 장군 빨로 찍어 누르고 반 오스만 동맹의 영웅이 되어줄 수 있다.[24]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잔티움이 초반 동맹 빨을 못 타서 망하더라도 아주 아쉽게 패배하는 정도로 그칠 수준.

징기스칸 4의 파워업 키트에서 추가된 1370년 시나리오에서 재야 장수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62/87/77, 특기는 건설, 등용, 기동, 연사, 복병이다. 하지만 모든 시나리오를 합쳐도 가장 늦게 등장하는 사실 장수인 데다 구현된 시나리오 4(1370년)에서도 등장 시기가 매우 늦어서 1430년대 이후에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때까지 시간을 끌지 않는 이상 활용하기가 어렵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선 처음엔 오스만측 인사였다가 나중에 알바니아의 군주 겸 주인공의 봉신으로 전향하며, 등장인물들 중에서 최고 수준의 군재를 보여준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하며 원역사대로 오스만의 휘하에서 참모급 인재로 복무하는 모습을 보이나 베오그라드 공성전에서 오스만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바로 오스만의 뒷통수를 치며 알바니아인들을 이끌고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원역사와 달리 바르나 십자군이 성공하면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중부 그리스를 전부 탈환하며 승승장구하여 동로마와 함께 연합을 결성해 아나톨리아 공략을 꾀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상술한 그가 데리고 다녔던 기병대 '스트라디오트'가 스트라디오트 기병이라는 이름의 용병으로 등장한다.


[1] 알바니아어 베우(beu)는 한정형태에 해당하며 부정형태인 스컨데르베이(Skënderbej)라고도 한다.[2] 혼전성은 '트리팔다(Tripalda)'.[3] 혼전성은 '아리아니티(Arianiti)'.[4] 어원이 된 오스만어 '베이(bey)'는 문자적으로 옛 튀르크어인 '베그(بگ, beg)'로 옮기고 '베이(bey)'라고 읽기 때문에 영어식으로는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로 알려졌다.[5] 오스만 술탄국 내궁(엔데룬, Enderun)에 부속되어 있는 교육기관, 역사상 최초의 영재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데브시르메 제도 하에서 뽑힌 소년 중 엔데룬으로 들어가는 부류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로 여겨진다. 예니체리도 이쪽에서 나온다.[6] 오늘날 크로아티아두브로브니크에 있었던 도시국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멸망했다.[7] 레저(Lezhë)는 알바니아의 도시 중 하나로 동맹을 맺은 장소의 이름에서 따왔다.[8] 그러나 이 십자군은 바르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9] 오늘날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Kodžadžik 마을.[10] 베네치아는 이 시기 중립을 지켜서 양쪽 모두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였다. 스컨데르베우는 이것을 통제해 달라고 요구했다.[11] 당시 베라트를 통치하던 알바니아의 지방 귀족이 병사하면서 스컨데르베우에게 도시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걸 넘겨받는 과정에서 방어가 일시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간파한 오스만 제국이 군대를 보내 꿀꺽한 것.[12] 스컨데르베우가 엔데룬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동창(?)이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스컨데르베우가 알바니아 저항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있던 당시에는, 발라반의 입장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사적으로는 밉상인 동시에 공적으로는 국가의 반역자였다.[13] 하지만 이곳을 지키던 알바니아 출신의 군지휘관 발라반 바데라가 전사하는 바람에, 메흐메트는 급히 지원을 보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3차 원정'.[14] 동상은 원래 엔베르 호자의 동상이었는데 호자 사망 후에 부숴버리고 스컨데르베우의 동상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15] 아서 웰즐리나 발터 모델도 스컨데르베우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막강한 상대나 다수의 병력들을 상대로 뛰어난 방어 전술을 펼쳤지만 스컨데르베우만큼 열악하진 않았다. 일단 아서 웰즐리는 프랑스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이지 경제대국 영국의 지원과 동맹국의 군대를 거느려 프랑스군 바로 다음가는 군을 지휘했고, 모델도 병력 수는 모자라도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독일군을 지휘했지만, 스컨데르베우는 카눈이라는 명예살인 관습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반목이 매우 심한 축에 속해 단합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한 알바니아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렇게 뭉친 사람들을 모아서 오스만 최고의 정복왕인 메흐메트 2세를 상대로 25년이나 맞서서 독립을 지켜내는 등 괜히 알바니아인들이 그를 민족 정체성으로 받드는 게 아니다.[16] 이전까지 알바니아 역사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알바니아 전체가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컨데르베우는 25년 동안이나마 오스만에 대항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알바니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정의하고 나아가 알바니아인 전체를 한데 모으며 오스만에 저항하고 그것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날 알바니아의 국기가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장에서 유래함에 그 아무도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크다.[17] 실제로 오스만에 맞선 그의 통산 성적은 21전 19승 2패에 달하며, 그 두 번도 전투가 여러 날씩 길어지자 스컨데르베우가 도중에 다른 일을 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패배한 경우다. 즉 전투를 확실히 마무리짓지 않고 자리를 뜬 것도 어쨌든 진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한 적은 없다.[18] 가령 퀘벡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18세기 영국의 지휘관 제임스 울프의 경우, '소규모 방어군을 지휘하는 데에는 고금을 통틀어 모든 지휘관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라고 평했다.[19] 마침 조구 1세알바니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인물이라서, 스컨데르베우 다음으로 알바니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국민적 영웅이다. 그가 실제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이건 아니건 간에, 알바니아인들 앞에서 이걸 걸고 넘어졌다간 싸움이 날 정도니 말이다.[20] 스컨데르베우 자체가 봉건 귀족으로 사회주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21] 토탈 워: 미디블2에서 베니스가 스트라티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22] EU4에서 군주의 능력치의 상한이 6/6/6이다. 즉 스컨데르베우는 그에 1 틱 못 미칠 정도로 아주 고성능의 군주라는 것.(그보다 높은 6/6/6의 군주가 1821년 다 합쳐도 한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 예시들이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이라는 어마어마한 네임드...) 스타팅 시점인 1444년에서 능력치 총합 1위 군주이니 말 다했다.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이 6/5/5로 총합 2등이니 그보다 높은 능력치를 부여받은 걸 보면 EU4에서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사실 세종의 경우 능력치 때문에 조선이 말도 안 되게 커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6/6/5에서 너프된 것이지만.)[23] 1444년 기준 오스만의 국가 전통 규율과 병종 타입이 가지는 PIP가 사기인 탓도 있다. 후냐디가 지휘하는 군대가 오스만의 듣보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붙어서 2배 차이가 나는데도 처발리곤 할 정도.[24] 오스만이 강한 건 실제 역사와 달리 모든 관료들과 베이, 지역 유지들이 기꺼이 술탄 밑에서 일치단결하며 모든 자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 병종 PIP가 초중반 최강급이라는 점, 오스만 술탄제의 미친 효율 때문이다. 만약 고증대로 당시 오스만의 정계와 대부분의 점령지의 치안이 동방 정교의 대립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매우 불안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시간제한이 붙었다면, 비잔티움이 역사대로 외교적으로 완벽히 고립되지 않았음에도 삼중 성벽을 통해 일단 오스만의 공세를 외부의 지원을 통해 막았을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영원히 꿈으로 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