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0:59:41

제주해녀항일운동

1. 개요2. 상세3. 여담

1. 개요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더불어 제주도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이며, 1931년부터 이듬해 1932년 1월까지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 713명의 해녀들이 238회에 걸쳐 궐기한 해녀항일투쟁이다.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유일한 여성 주도의 항일운동이기도 하며 전국 최대의 어민운동, 1930년대에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2. 상세

일제강점기 이전인 조선 시대부터 제주도의 해녀들은 관리들의 수탈과 노동력 착취로 고통받아왔으며, 1900년대부터는 해녀들이 수확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판로가 개척되어 그 폐단이 더 악화되었다. 결국 1920년 4월 16일에 해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설립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조합장을 제주도사[1][2]가 겸임하는 어용조합으로 변질시켰고 횡포도 날로 심해져갔다.[3]

그러던 중 1930년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의 일본인 관리들이 우뭇가사리의 시세를 무시하고 반값으로 매입하는 횡포가 발생하였고 1931년 하도리에서도 턱없이 낮은 금액으로 수산물 가격을 책정하였다. 해녀조합 대신 만든 해녀회를 만들어서 벌인 투쟁도 소용이 없자 결국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을 모색하게 되었고 같은해 12월에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대표자 3인과 대표위원 10명을 선출하였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시위대가 구좌면사무소까지 이르자 면사무소 지부장이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1월 12일 다음 세화리 장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마침 구좌면 지역을 순시하던 제주도사 타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탄 차량을 포위하였고 이에 굴복한 제주도사는 해녀대표와 담판하여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5일안에 해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월 23일부터 사건의 조사와 함께 제주도내의 청년운동가들을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을 각종 죄목을 붙여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격분한 해녀들은 검속자를 탈환하기 위해 세화 주재소로 몰려들었고 급보를 접한 본서에서는 무장경관을 현장에 출동시켜 그 결과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이 다시 검속되고 말았다. 1월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검거된 이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이 시위를 끝으로 해녀항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주동자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 외에 검속된 해녀들만 100여 명에 이르렀다.

3. 여담

해녀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과 해녀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이 기념공원은 1932년 1월 12일 제주 동부지역 해녀들이 총집결해 항쟁을 벌였던 속칭 연두막 동산 일대를 성소로 가꾼 공원이라고 한다.

기념공원 안에 세워진 기념탑 옆에는 당시 시위를 주도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세 해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의 주요 소재이다.

[1] 이 당시의 제주도전라남도 소속의 도서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제주도사는 현재의 제주도지사보다는 조선 시대의 제주목사와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2] 일제는 이런 직위에 당연히 일본인을 임명하였고, 해녀들의 개선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3] 해녀들이 채취한 수산물을 조선해조주식회사가 판매하는데, 판매한 금액의 50%는 수산물을 판 회사가 가져가고 18%는 조합 수수료, 그리고 조합비, 사공 임금, 거간 사례비 등 각종 금액으로 12%를 지불하면 해녀들이 가져가는 금액은 20% 정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