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2:23:58

조니 밴더미어

파일:mlb_a_meer1_580.jpg
이름 존 새뮤얼 밴더 미어
John Samuel Vander Meer
생몰일자 1914년 11월 2일~1997년 10월 6일
국적 미국
출신지 뉴저지주 프로스펙트 파크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양타
프로입단 1933년 브루클린 다저스 자유계약
소속팀 신시내티 레즈(1937~1943, 1946~1949)
시카고 컵스(195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50)

1. 개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의 신시내티 레즈를 대표했던 좌완 에이스로 불같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한 파이어볼러였다. 3년 연속 내셔널리그 탈삼진 타이틀을 가져갔으며 그 중 2년 연속으로는 메이저리그 전체 탈삼진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무후무한 2경기 연속 노히터를 달성한 인물로 유명하다.

통산 13시즌 119승 121패 3.44 2104.2이닝 1294K 1132BB bWAR 27.0 FIP 3.64 ERA+ 107을 기록했다.

2. 커리어

1933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아마추어 계약을 맺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첫 해에는 다저스 산하 마이너 팀에서 생활했으나 이후 3년 간 2번의 이적을 통해 신시내티 레즈 마이너리그 팀에 정착했고 1936년 19승 7패 3.08의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며 레즈의 최고 유망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7년 4월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고 신인 시즌에 3승 5패 3.84 84.1이닝 52K를 기록했다.

그리고 2년 차 시즌인 1938년은 밴더미어에게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32경기 15승 10패 3.12 225.1이닝 125K를 기록하며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며 레즈의 에이스로 인정받은 것도 있지만 전설의 2경기 연속 노히터가 나온 시즌이었기 때문.

1938년 6월 11일,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했고 불안한 제구력이 약점이었던 조니는 이 날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공이 들어가는 몇 안되는 날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4일 뒤인 6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이 날은 뉴욕에서 최초로 야간 경기가 열리는 역사적인 날이었는데 이 날을 밴더미어가 또 다시 노히터를 기록하며 이 날을 더욱 빛냈다.

게다가 뉴욕의 첫 야간 경기라서 그랬는지 경기장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밴더미어의 노히터가 가까워지자 상대팀인데도 불구하고 뉴욕의 만원 관중들은 밴더미어의 노히터 달성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노히터에 도전했지만 4회에 안타를 맞게 되었고 이 날의 경기는 4피안타 완봉승을 거두었다.[1]

역사적인 활약을 펼치고 난 다음 해에는 팔 부상으로 1년 반을 넘게 쉬었지만 이후 3년 간 200이닝 및 3년 연속 NL 탈삼진 타이틀을 거머쥐며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40년에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였고 부상으로 인해 몸을 추스리고 있는 와중에도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우승반지 획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밴더미어 역시 국방부 퀘스트의 마수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추축국들이 전 세계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미국 역시 징병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고 밴더미어 역시 징집되어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해군에서 복무했고 해군 산하 야구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부터 다시 선수로 복귀한 밴더미어는 10승 12패 3.17로 승리를 많이 거두지 못했을 뿐 나름 좋은 활약상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지만 204.1이닝에 94K로 탈삼진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며 불안한 징조를 보였다. 이듬해에는 9승 14패 4.40으로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1948년에는 17승 14패 3.41 232.0이닝 120K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1950년에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삽만 푸다가 195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다시 이적했고 이후에는 신시내티 레즈 마이너리그 팀으로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40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는 파이어볼러였으며 그 외에 커브볼, 체인지업도 수준급으로 던지는 전형적인 올드스쿨 파워 피쳐였다. 또한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라는 특수성때문에 더 가치가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통산 9이닝당 볼넷 비율이 4.8개나 되는 것을 보면 알다시피 불안한 제구력이 약점이었고 이 때문에 5번의 100볼넷 시즌, 최다 볼넷 타이틀도 2번이나 기록했지만 오히려 종잡을 수 없는 제구력때문에 무시무시한 강속구가 더 돋보여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였다고 한다.

[1] 여담으로 밴더미어의 기록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1947년의 유월 블랙웰으로 노히터 제조기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했고 그 다음 등판에서 9회 1사까지 무안타 경기를 펼치다가 안타를 허용하며 2경기 연속 노히터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