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3 21:38:15

조제프 곤살레스

조제프 곤살레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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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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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감독
파일:Joseph Gonzales.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조제프 곤살레스[1]
Joseph Gonzales
출생 1907년 2월 19일
프랑스령 알제리 베니 사프
사망 1984년 6월 26일 (향년 77세)
프랑스 오바뉴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풀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JP 베니 사프 (1921~1926)
ASPTT 우지다 (1926~1931)
US 발랑시엔 안장 (1931~1933)
SC 피브 (1933~1936)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6~1943)
EF 마르세유 프로방스 (1943~194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4~1946)
감독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2~1943 / 선수 겸 감독)
EF 마르세유 프로방스 (1943~1944 / 선수 겸 감독)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4 / 선수 겸 감독)
SSMC 미라마 (1947~1948)
SSMC 미라마 (1949~1950)
국가대표 1경기 (프랑스 / 1936)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수상
3.1. 대회 기록3.2.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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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2. 생애[2]

2.1. 어린 시절

곤살레스는 프랑스령 알제리였던 베니 사프(Béni Saf)에서 태어났고 1921년부터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배웠다고 한다. 1926년에는 모로코의 우지다(Oujda)로 이주해서 축구를 계속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1년 프랑스로 간 곤살레스는 US 발랑시엔 안장 소속의 선수가 되었다. 1932년에 프랑스 전국 리그가 출범하면서 발랑시엔 안장은디비지옹 2에 소속되었는데 발랑시엔 안장 옆의 디비지옹 1 클럽인 SC 피브[3]가 곤살레스의 영입 제의를 타진했다. 발랑시엔 안장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곤살레스는 1933년부터 SC 피브의 선수가 되었다.

입단하자마자 곤살레스는 피브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매김했고 팀 실점을 디비지옹 1 참가팀들 중 최저인 31실점으로 줄이면서 1934년 피브의 디비지옹 1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후의 피브는 11위, 8위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고 1936년에 다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한 곤살레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이적 첫 시즌의 대부분을 날리는 바람에 단 10경기만 참가했지만 팀은 디비지옹 1 우승을 차지했다.

1937-38 시즌에 곤살레스는 다시 마르세유의 핵심 수비수 자리를 차지했고 팀은 디비지옹 1 준우승, FC 메스를 결승전에서 2대1로 꺾으며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곤살레스는 마르세유에 남아 비공식 시합들을 치렀다. 1940년, 마르세유는 다시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디펜딩 챔피언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 1대2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1942년, 곤살레스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주장으로 임명된 동시에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감독 데뷔 시즌에 곤살레스는 마르세유를 이끌고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다음 해, 프랑스 선수들의 팀 재배치로 인해 곤살레스는 1년을 마르세유프로방스에서 보냈고 1944년에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하지만 곤살레스는 1945년 1월 선수 겸 감독직에서 물러나 선수로만 뛰게 되었다.

1945년 9월 30일, 마르세유가 FC 루앙에게 0대6으로 학살당한 경기가 곤살레스의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으며 곤살레스는 1945-46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곤살레스는 디비지옹 1에서 통산 150경기에 출전했고 2골을 넣었다.

2.2.2. 국가대표

곤살레스는 1934년 월드컵에 프랑스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는 등 분전했지만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대3으로 역전패했다.

곤살레스는 1936년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스타드 드콜롱브의 피치를 밟았다. 경기는 프랑스가 3대0으로 이겼고 이것이 곤살레스의 유일한 A매치 기록이 되었다.

2.3. 이후

미라마에서 잠시 감독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면 곤살레스는 1948년부터 알제리 아인 테무첸트(Ain Temouchent)에서 카페 경영과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가르치며 생활했고 노년에 프랑스 남부에서 여생을 보냈다.

곤살레스는 1984년 6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날은 프랑스가 처음으로 유로 84에서 우승함으로써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국가대표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바로 전날이었다.

3. 수상

3.1. 대회 기록

3.2. 감독



[1] 곤살레스는 스페인의 성씨이므로 유럽에서 자국 이름이 아니면 외국의 표기를 인정해주는 관례에 따라 곤살레스로 항목을 작성했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SC 피브와 올랭피크 릴이 1944년에 합병하여 OSC 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