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36:57

주병웅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창만(敞萬) / 자운(紫雲)
본관 신안 주씨[1]#
출생 1883년 9월 12일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2]#
사망 1924년[3] 5월 1일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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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주병웅은 1883년 9월 12일 강원도 울진현 근북면 매정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에서 아버지 주동조(朱東朝)와 어머니 담양 전씨 전유상(田有相)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1907년 10월 관동학회 회원과 울진 지역민인 곽종욱·남상정·전오규(田五圭)·주진수·진규환(陳奎煥)·전주석·최정순 등과 울진군 원남면에 울진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매화만흥(梅花晩興)학교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찍이 만주로 이주하여 1918년 4월경 봉천성 환인현(桓仁縣)[5]에 거주하면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후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제2구(第二溝) 오도구(五道溝)[6]로 이주하여 살던 1919년, 이탁이 주도가 되어 결성된 27결사대에 가담하였다. 이 결사대의 주요 결성목적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에 국내로 잠입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것을 주 목표로 하고 그 밖에 독립선언서 지방배부 및 독립군 자금 모집이었다.

따라서 그는 결사대 대원들과 함께 1919년 2월 24일 펑톈을 출발하여 같은 달 말 경성부에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결사대의 매국노 처단계획의 거사는 고종황제의 인산일인 3월 3일에 일으키도록 준비가 되었지만, 권총과 탄환의 입수가 늦어져 1차 거사는 실패했다.

3월 10일경 이탁이 권총과 탄환을 입수하여 그와 동지들은 다시 거사를 계획하였는데, 먼저 결사대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경성부 무교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 소재 박홍일(朴泓鎰)의 집에서 500원을 모금하였고, 을사오적들에게 보내는 성토문과 경고문 등을 독립문종각 등에 붙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그해 5월 5일 그를 비롯한 일부 결사대 대원이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망에 뜻한 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20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미결 구류일수 중 40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징역 8년형의 판결은 그대로 적용되어# 옥고를 치렀다.
"내가 목적하던 바 국가의 공적(公賊)을 죽이지 못한 것 때문에 국가의 불충(不忠)이라고 그 죄명으로 중죄(重罪)를 준다면 8년이 아니라 80년의 징역을 받는다고 해도 원한이 없다"
1921년 3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의 2심 당시, 재판장이 주병웅을 강도라고 칭하자 주병웅이 거사의 명분이 매국노를 처단함에 있음을 표명하며 한 말.

그 뒤 그는 1924년 5월 1일, 복역 4년 만에 옥중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웅천파-교수공파 11대손 병(秉) 항렬. 신안 주씨 30세.[2] 독립유공자 주병책·주진수·주진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925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4] 어머니 담양 전씨 전유상의 딸은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담양 전씨 전충석(田充錫)의 딸은 1849년에 태어나 슬하에 아들 없이 1871년에 별세하였다.[5]중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桓仁)만주족자치현.[6]중국 지린성 퉁화(通化)시 류허(柳河)현 우따오꺼우진(五道溝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