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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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성왕(成王) |
성 | 희(姬) |
휘 | 송(誦) |
생몰 기간 | ? ~ 기원전 1021년? 혹은 기원전 1006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1021년? 혹은 기원전 1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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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왼쪽은 주 문공, 가운데가 성왕. 오른쪽은 소공 |
주나라(周)의 제2대 왕이자 천자. 주 무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장성할 때까진 숙부 주 문공(주공 단)의 섭정을 받았다. 성은 희(姬). 휘는 송(誦)이다. 성왕은 시호가 아니고, 생전의 존호이다. 남동생은 진(춘추오패)(晉)의 시조인 당숙우(唐叔虞)[1]이며, 그 외에 다른 동생들이 한(韓), 우(邘), 응(應) 세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공화(公和) 시기 이전의 주나라 왕들의 재위 기간이 확실하지 않아서 대략 계산하면 생몰년은 기원전 1054년? ~ 기원전 1020년?이고, 재위 기간은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1020년?. 총 22년 또는 37년. 7년간 주공(周公)의 섭정을 받고, 성인이 되어서 15년 혹은 30년간 친정했다고 본다.
2. 생애
2.1. 즉위 초기
주 성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숙부 주공 단이 대신 섭정을 하였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제 정무는 어머니 읍강, 숙부 주공 단(周公 旦), 외조부 태공망 강상, 숙부 소공 석(召公 奭 : 연나라의 시조) 등 네 사람이 후견했다고 한다.다음 대인 주강왕(周康王)까지가 주나라의 확립기로 정치를 제법 잘해 두 왕의 이름을 합해 성강의 치라 부른다. 허나 후대의 평가와 별개로 성왕의 즉위 초 정국은 지극히 불안정했는데, 숙부인 주공단은 제후들이 주 성왕이 어린 것을 얕보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고, 실제 은나라 제신(주왕)의 아들 무경 녹보와 녹보의 감독·보좌를 맡은 무왕의 동생들이 연합한 '삼감의 난'이 발생한다.
2.2. 삼감의 난
부친인 주무왕(周武王)이 목야대전을 치르고, 상나라를 멸망시킨 역성혁명 후에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아버지 무왕이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직 주나라의 정치 체제는 안정되지 않았고, 주 무왕은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2]에게 조가현을 수도로 한 송나라를 봉읍으로 주었으나 아무래도 이전 왕조의 자손이라 주나라 입장에서는 불안 요소였다. 이에 주공단은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의 삼감을 파견했다.헌데 주공단이 안전 장치로 그들을 보낸 것과 반대로, 이들이 무경과 짜고 주공을 모함해 반란을 일으켰다.[3] 이에 주공단은 삼감의 난을 진압하면서, 멀리 있는 자신의 봉지인 노나라를 다스릴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백금을 보내 노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결국 삼감의 난이 진압되면서 무경과 관숙은 죽고, 채숙은 봉지를 옮겼다. 그리고 곽숙은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그런데, 이들의 잔여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꺾는데 또 3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주나라의 개국 공신이자 상나라 왕족이었던 미자 계를 송나라의 공작에 봉하고, 주 성왕의 막내 아우인 희봉(姬封)을 위나라의 백작에 봉해 주나라를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당숙우가 질 좋은 곡식을 바쳤고, 그것을 주 성왕이 싸우느라 고생하는 주공단에게 보냈고, 그것이 잔당 토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주성왕이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에 주공단이 삼감의 난을 혼자 다 진압했다는 식의 서술은 주공단의 충심과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의해 과장된 내용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주 초기의 금문을 살펴보면 주성왕이 친히 출정해서 반란군을 격파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하지만 진실이 뭐건간에 주공단이 삼감의 난에서 활약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2.3. 성인이 되어 정사를 돌보다
기원전 1036년, 주 성왕은 성인이 되었고, 주공단은 깔끔하게 물러났다고 한다.[4] 주 성왕은 풍(鄷) 땅에 머물면서 낙읍(洛邑)[5]을 경영해 무왕의 뜻을 이었다고 한다. 주공이 점을 친 뒤 9정(九鼎)[6]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 성왕은 소공을 태보, 주공을 태사에 임명해 동쪽의 회이(淮夷)[7]를 정벌하고 엄나라를 멸한 뒤 그 군주를 박고 땅으로 옮겼다고 한다.성왕의 치세 시절 주나라의 기틀이 닦였다고 볼 수 있다. 즉위 초기에는 주 성왕이 아직 어려 국정이 불안정했으나 숙부인 주공단이 삼감의 난을 진압하고, 성왕이 엄(奄)나라를 멸하고 회이를 이김으로써 주나라의 안정을 가져왔다. 자세한 내치는 내용이 없거나 소실되어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불명이지만, 왕이 직접 원정을 시행해 승리할 정도면 내치 면에서도 상당한 힘을 키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2.4. 최후
주 성왕은 병이 들어 자신의 태자인 희조(姬釗)가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소공과 필공에게 제후를 거느리고 태자의 즉위를 도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소공과 필공이 제후들과 함께 태자 희조에게 왕위를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주강왕이다.3. 분봉한 제후국
아래는 성왕이 분봉한 제후국들이다.송나라(宋): 삼감의 난 이후 미자 계를 송나라의 공작으로 임명해 상나라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
위나라(衛): 삼감의 난 평정 뒤 주공이 주문왕의 삼남인 희봉에게 분봉해 세워진 국가다. 희봉의 군주로서의 명칭은 위강숙.
노나라(魯): 주공단이 자신이 받은 노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서 자신의 아들 백금에게 다스리게 함으로써 분봉이 시작되었다.
진나라(晉): 주 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아우인 당숙우에게 당(唐)나라 땅에 분봉했는데, 그것은 장난이었으나 군주는 장난을 하면 안된다고 해서 세워진 나라다. 그리고 진후 섭 때 봉지가 진수 유역으로 옮겨져 진(晉)나라가 되었다.
초나라(楚): 그는 주 문왕의 스승인 육웅의 자손인 웅역을 단양 땅에 봉해 초나라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초나라가 후세에 가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채나라(蔡): 삼감의 난 이후 채숙이 봉지를 옮긴 뒤 그 아들 희호가 채나라 후작이 되면서 경사로서 주나라에서 일하게 되었다.
담나라(聃) = 심나라(沈): 담계재(희재)를 담나라에 봉하고 사공이 되어 주 성왕을 보좌했다. 담나라는 나중에 심나라로 개칭된다.
[1]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이복 형제라고 한다.[2] 달리 녹보(祿父)라고도 한다. 父 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나 접미사로 쓸 때는 부가 아닌 보라고 읽어야 한다.[3]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활쏘기 대회를 펼친 뒤 한시 대회를 펼쳤을 때 자신이 권력을 내놓으면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백거이의 시가 이어졌는데, 거기서 주공이 뜬소문에 두려워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이 일을 나타내는 것이다.[4] 이에 공자가 극찬하면서 주공단을 빨아댄 걸로도 나름 유명하다.[5] 현대의 하남성 낙양.[6] 발이 9개 달린 큰 솥으로 천자의 상징물. 9개 주에서 받은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7] 동이족의 일종으로 회수 일대에 거주해 회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