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42:08

주세페 베르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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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베르고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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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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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DEF MID ST
2018 [ruby(쳉가, ruby=발테르)] [ruby(사네티, ruby=하비에르)] [ruby(마테우스, ruby=로타어)] ㅤㅤㅤㅤ
호나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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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파일:Ep4BdIQXMAIFRl1.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주세페 베르고미
Giuseppe Bergomi
출생 1963년 12월 22일 ([age(1963-12-22)]세)
이탈리아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포지션 축구 선수 (수비수[1] / 은퇴)
소속 인테르나치오날레 (1979~1999)
국가대표 81경기 6골 (이탈리아 / 1982~199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4.3. 수훈
5. 은퇴 이후6. 여담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2]

인테르에서만 20년을 뛴 로컬 보이이자 원클럽맨로, 별명도 '미스터 인테르'였다. 당대에 AC 밀란의 주장 프랑코 바레시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다. 타점 깊은 태클과 강력한 대인마크는 그의 상징과 같은 장면.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베르고미는 1979년 인테르에서 데뷔하여 1980-81 시즌 1군에 발탁되었고, 다음 시즌부터는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인터 밀란이 코파 이탈리아에 우승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인테르는 당시 세리에 A 우승에 도전했지만 아리고 사키 압박축구를 토대로 맹활약하는 오렌지 삼총사프랑코 바레시AC 밀란, 디에고 마라도나SSC 나폴리, 미셸 플라티니 이후에도 강력한 유벤투스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는 등 꽤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인테르도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위르겐 클린스만을 영입하여 게르만 삼총사를 결성한 뒤, 1988-89 시즌 그토록 고대하던 스쿠데토를 들어올린 후 1990-91 시즌 베르고미가 안정적으로 이끄는 수비진과 게르만 삼총사의 맹활약으로 결승전에서 AS 로마를 꺾고 UEFA컵을 차지한다. 이때의 활약으로 베르고미는 인테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파일:베르고미_uefa컵.png

1993-94 시즌에는 데니스 베르캄프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으나 베르고미가 인테르를 지휘하며 UEFA컵을 들어올렸을 때가 그의 클럽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이때 베르캄프는 UEFA컵에서 총 8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고 베르고미는 1992년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후 첫 번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97-98 시즌, 이미 노장이 된 베르고미는 호나우두, 하비에르 사네티와 함께 라이벌 SS 라치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3번째 UEFA컵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1998-99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다.

그 후 주장 완장은 하비에르 사네티가 물려받았으며 사네티 역시 2014년에 은퇴할 때까지 인테르의 주축 수비수로 활약하게 된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4.bp.blogspot.com/05-Giuseppe+BERGOMI+Panini+Italie+1982.png
[3]
인테르의 신성이었던 주세페 베르고미는 1982년 4월 만 20세도 안된 나이로 아주리의 저지를 입고 데뷔하였다. 이것이 일종의 신인의 테스트가 아닌 것이 베르고미는 1982 스페인 월드컵 아주리 멤버로 깜짝 발탁된다. 물론 신인을 경험 삼아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 시키는 경우는 그전에도 간간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베르고미는 아니었다. 파올로 로시해트트릭으로 브라질이 무너졌던 것으로 유명한 본선 2차 리그 브라질 전에서 베르고미는 부상 당한 콜로바티를 대신하여 교체투입되었다. 이 경기에서 베르고미는 19세라고 믿어지지 않는 원숙한 수비력으로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어지는 4강전, 결승전에 모두 선발 출전한[4] 베르고미는 이탈리아의 44년 만의 월드컵 대관식의 한 축으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된다.

프랑코 바레시가에타노 시레아에 밀려 대회 내내 벤치를 달군 것과는 대조적이다.[5]

유로 1984는 예선 탈락으로 참가하지 못하였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는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했으나, 세대교체의 과도기에 놓였던 이탈리아는 16강전에서 미셸 플라티니프랑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린 당하며 2:0으로 패하고 짐을 싸게 된다. 조별리그도 영 개운치 않은 것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디에고 마라도나 한 명에게 완전히 쥐락펴락 당했기 때문이다.

1986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베아르초트 감독과 주장인 가에타노 시레아가 물러난 후 베르고미는 주장 완장을 물려받게 된다. 20대 중반에 갓 들어간 젊은 수비수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유로 1988에서 4강에 오르며 가능성을 보인 이탈리아는 1990년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고 베르고미는 주장으로서 자국에서 월드컵을 들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당시 아주리는 골키퍼에 인테르의 레전드 발테르 쳉가, 주전 수비라인에 파올로 말디니-프랑코 바레시-리카르도 페리-주세페 베르고미로 이어지는 밀란-인테르 라인을 구축하고 단일 월드컵 최장시간 무실점(517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자국 개최 버프와 압도적인 수비라인으로 우승후보 1순위로 꼽힌 이탈리아였지만, 아르헨티나와의 4강전에서 살바토레 스킬라치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뒤 승부차기에서 패배함으로써 우승에 실패하고 만다.

그 후로도 베르고미의 위상은 공고할 거라 봤으나, 1991년 6월 유로 1992 예선에서 경기 종료 1분 전 투입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비신사적인 파울을 하고 퇴장을 당했다. 비치니 감독이 물러난 이후에 지휘봉을 잡은 아리고 사키는 슬슬 베르고미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사키와 베르고미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아주리와는 사실상 작별을 하게 된다. 주장직 역시도 프랑코 바레시가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체사레 말디니 감독[6]은 베르고미를 깜짝 발탁한다. 원래는 치로 페라라가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하자 말디니 감독은 베르고미의 경험을 존중하여 베르고미를 발탁한 것이다.[7]

하지만 파올로 말디니-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파비오 칸나바로-알레산드로 네스타라는 주전 포백 라인이 건재했기 때문에 베르고미의 8년만의 월드컵 복귀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조별리그 3차전 오스트리아에서 네스타가 부상으로 대회에서 아웃 당하자 베르고미가 투입되었고,[8] 이어지는 16강, 8강전까지 노련한 활약을 펼치며 네스타의 부상 공백을 성공적으로 매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대회 이후 1998-99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베르고미는 라이트백센터백 모든 자리에서 월드클래스 활약을 펼쳤던 선수로 아주 강인한 수비력을 갖추었으며 패스도 엄청 잘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8
  • FIFA 100: 2004
  • 인테르 올해의 선수: 1990
  • 옹즈 드 옹즈: 1989, 1990, 1991
  •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9]: 1997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젼당: 2016
  • 인테르 명예의 전당: 2020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RB 7위)
  • IFFHS 올타임 이탈리아 드림팀: 2021

4.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1991

5.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스포츠 채널인 '스카이 스포츠 이탈리아'에서 해설자로 일했다. 파비오 카레사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기 우승하는 장면을 함께 중계했고,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같이 중계하는 등 최근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두 해설자의 썩은 표정이 포인트

6. 여담

여담으로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경기를 뛴(통산 756경기) 원클럽맨이지만,[10] 눈물 나게도 그의 등번호 2번은 영구결번이 되지 못했다.[11][12]

현역 시절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못생겼다고 놀림을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이자 전세계를 뒤져도 라이트백에서 베르고미를 확실하게 능가하는 선수가 몇 없을 정도의 레전드이지만, 80~90년대 선수인데다 축구게임에서도 정말 보기 힘든 선수라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피파 시리즈에서도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선수인데다, 위닝시리즈도 pes 2020이 되어서야 딱 한번 나왔었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21로 넘어가면서 삭제된지라 축구게임을 통해서도 이름을 접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다 pes시리즈의 후신인 eFootball 2024에서 마침내 다시 출시되었는데, 위대했던 현역시절을 반영하듯 엄청난 사기카드로 나와 적어도 이풋볼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만큼은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 라이트백과 센터백이 모두 가능한데다, 빠른 스피드와 굉장한 수비 능력치, 풀백치고 꽤 큰 184cm의 큰 키와 점프력에 엄청난 킥파워로 후방에서 한번에 레이저 롱패스를 찔러주는게 가능하여 0티어 수비수로 자리매김했다.

7. 같이 보기

1 쳉가 · 2 바레시 · 3 베르고미 ⓒ · 4 데아고스티니 · 5 페라라 · 6 페리 · 7 말디니 · 8 비에르코보드 · 9 안첼로티
10 베르티 · 11 데 나폴리 · 12 타코니 · 13 잔니니 · 14 마로키 · 15 바조 · 16 카르네발레 · 17 도나도니
18 만치니 · 19 스킬라치 · 20 세레나 · 21 비알리 · 22 팔리우카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아첼리오 비치니

1 톨도 · 2 베르고미 · 3 말디니 ⓒ · 4 칸나바로 · 5 코스타쿠르타 · 6 네스타 · 7 페소토 · 8 토리첼리 · 9 알베르티니
10 델 피에로 · 11 바조 D. · 12 팔리우카 · 13 코이스 · 14 디 비아조 · 15 디 리비오 · 16 디 마테오 · 17 모리에로
18 바조 R. · 19 인자기 · 20 키에사 · 21 비에리 · 22 부폰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체사레 말디니


[1] 라이트백, 센터백[2]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었지만 센터백 등 모든 수비 포지션을 소화하였다.[3]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파니니 스티커 사진. 이때 당시 그는 18살이었다![4] 참고로 앞에서 베르고미와 교체되었던 콜로바티는 부상에서 곧바로 복귀하여 4강전, 결승전에 모두 출장한다. 4강전에선 클라우디오 젠틸레브라질전에서의 경고 누적 때문에 결장, 결승전에선 플레이메이커 잔카를로 안토뇨니가 결장하고 안토니오 카브리니, 콜로바티, 가에타노 시레아, 주세페 베르고미, 클라우디오 젠틸레 등 수비진이 총출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5] 시레아는 리베로 역할로 수비라인의 조율자 역할이었으므로, 파이터형 센터백인 콜로바티나 베르고미가 그 조율형 센터백의 파트너 내지는 우군으로서 출장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같은 리베로 스타일로 시레아와 직접적 포지션 경쟁을 해야했던 것이 바레시의 불운이었다.[6]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7] 치로 페라라의 주전 자리는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차지한다.[8] 이 대회에서는 센터백으로 출전하였다.[9]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10] 통산 756경기, 리그 519경기, 유럽대항전 117경기 모두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1위는 당연히 하비에르 사네티. 단, 코파 이탈리아는 119경기로 팀에서 가장 많이 뛰었다.[11] 현재 인테르의 영구결번 두 개는 모두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든 두 주장의 몫이다. 3번 자친토 파케티4번 하비에르 사네티.[12] 베르고미의 2번은 그의 은퇴 후 이반 코르도바에게 돌아갔고, 코르도바 역시 인터 밀란에서 12년 동안 455경기를 소화하며 2번의 위상을 드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