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자어
뜻 지 | 배울 학 |
1.1. 개요
논어의 위정편에서 공자가 15살 때 학문(學)에 뜻을 두었다(志)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원래 고대 공맹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동아시아에서는 공자의 언급을 예시로 하여 성인에 접어드는 시기를 지학으로 뭉뚱그려 말하곤 했었다. 기록상으로 보자면 스스로의 학문에 뜻을 둘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성인으로 취급해 주던 것에서 해당 개념이 널리 퍼지면서 공자가 언급한 만 15세를 이르는 명칭으로 정착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딱히 만 15세라고 정확하게 규정되진 않았다는 뜻이다. 애초에 공자의 제자들이 논어를 집대성 하기 전까진 중국 대륙에서의 공자의 위상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었다. 공자의 집안 자체도 공자 사후 그것도 한참 이후에 대우를 받았었지, 공자가 출생하던 시기에는 그다지 좋은 가문도 아니었다. 논어가 퍼진 뒤에야 시대를 대표하는 성인으로 추앙 받게 된 것이지 살아 있던 당대에는 그정도까진 아니었다는 것.[1]
또한 위정편에서 각 나이대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급하는 것 자체가 공자의 자전적인 개인사다.[2] 이는 쉽게 말해 읽는 사람마다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위정편에서 공자가 지학을 언급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는 그때 부터 내 뜻[3]을 세운 어른이었다>라는 말하기 위해서 였던 거지 15세를 지학으로 정의하기 위함도 아니었다.[4]
당연히 공자를 흠모하고 존경하는 이들도 개개인 마다 지학을 의미하는 시기가 달랐을 거다. 누군가는 같은 15세 일수도 있고, 누군가 20세 심하면 30세 정도 일수도 있다.[5]
이렇게 중구난방이던 개념이 아예 공맹사상이 학문화 되어 정착되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규격화를 거치고 대략 맹자가 사망한 직후 들어선 한왕조 부터 성인식의 개념과 합쳐져 나이를 이르는 명칭으로 회일화 되어 정착한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다른 고사성어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되는 이들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약 40년 전에 농촌에 일상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당시 농촌에 경우 10살 미만에 아동들이 농사 일을 돕기 시작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대부분의 농사꾼들이 그렇듯 공교육 따위는 크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정도라 대다수의 아이들이 이 시기쯤 농사일을 접하기 시작했다. 가정에 따라서는 더 일찍 일을 돕기도 했었다. 이 상태에서 5년 정도 지나면, 어지간한 농부보다 능숙한 농사꾼이 되어 충분히 1인분을 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체구가 20대에 접어든 이들과 비교하자면 좀 작아서 그렇지, 근력만 보더라도 근현대의 샐러리맨으로 활동하는 이들보다 더 월등했을 것이다.[6]
이런 환경을 고려해 보자면, 15세 전후로 해서 성인 취급을 받는 건 사회적으로 자연스럽다.[7]
한반도만 하더라도 지금이야 개발도상국 시기를 거치며 법적으로 조혼 자체가 금지된 지 좀 돼서, 만 15세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 취급을 받지만,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였다.[8] 앞서 언급했듯 이때까지만 해도 20세 전후까지 결혼을 못하면, 노총각 노처녀 소리를 듣던 분위기였음을 상기하자.
즉, 중세 동아시아 기준에서 보자면 지학을 맞이한 이를 성인으로 봤던게 자연 스러운 것이다.
1.2. 위정편에 대한 오해
위정편에서 해당내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라면 각 나이때 이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정도 늬앙스라고 할수 있다. 착각하면 안되는게 위정편에서 해당의 것이 주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나이에 대한 고사성어가 워낙 유명하여 위정편 자체가 이를 말하기 위한 내용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위정편은 어디까지나 왕도정치에 대한 공자의 사상을 풀어내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나이에 대한 것은 이에 대한 설명을 부연 하던중 첨언 성격으로 들어간 것 이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심한 허세가 섞인 자뻑이라 인식될수도 있겠지만. 이는 논어를 다 보는 경우가 적은 현대인이 전후 맥락을 자르고 해당 내용만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위정편의 중심 내용은 앞서 언급했듯 왕의 정치에 대한 공자의 사상이다. 즉, 어디까지나 나이에 대한 것은 부가적인 것.
단지 일반 대중의 시선에 보자면 왕의 정치가 덕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 보단 이런 식의 고사성어가 일상용어라는 측면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었기에 더 유명할 뿐이다.
위정편에서 언급되는 종심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위정편과 관련된 내용이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을때 공자의 나이는 최소 70세이상이었을 것으로 본다.[9] 바꿔 말해 지금 노인들이 젊은 이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다가 부연하며 내가 그때는... 하고 언급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 이었을 것이란 말이 된다.[10] 때문에 사람에 따라선, 꼰대 기질이 강하게 느껴지는 내용일 수밖에 없긴 하다. 실제로 해당 이유로 공자를 까던 학자들이 아예 없던것도 아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용 자체를 최대한 부정적인 늬앙스로 받아 들였을 때 기준이다. 현대인 기준으로도 이를 조언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받아 들이고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1.3. 현대인의 기준때문에 발생한 세간의 잘못된 인식
국내 대체역사나 무협지 등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중 하나가, 지학 시기의 사람을 어린아이 취급 하는 것이다.사실 시대상을 보자면 말도 안되는 헛소리 일수밖에 없다. 지학에 접어들었다고 가문에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겠지만[11], 이 나이 때쯤이면 준성인도 아니고 이미 하나의 성인으로 취급되어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기 할일을 맡아 했었다. 대략 지금의 20대 중반의 사회 초년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가문에 재력이 있었으면 아예 자유롭게 자기 사업을 시작했었고, 정치에 뜻이 있으면 관직에 출사를 준비했다.[12] 보통은 부모의 일을 이어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찌됐든 성인 1인분 역할을 시작하는 시기였다는 것.
물론, 지금 사회 초년생이 그렇듯, 당시의 15세 전후의 사람도 무시 당하긴 했었다. 흔한 레파토리로 관혼상제라 말하는 것에 대표인 관례를 일반적으로 15세 전후로 하여 받았기에 그 이전에 나이거나 아직 뭔가 미숙하다 판단되어 받지 못했을 경우 <아직 관례도 받지 못한...> 이라는 식으로 무시하거나, 또는 막 관례를 받아 사회에 나온 것일 경우 <이제 겨우 관계를 받은...> 이라는 식으로 무시하거나 경탄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이제 겨우 사회 생활 시작한...> 이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것과 상통한다.
혼례는 보통 이 시점에 하기 보단 지학과 약관 사이 즉, 15~20세 사이에 치루는게 보통이었다.
애초에 당대에는 약관까지 장가를 못간 이가 노총각 노처녀 소리 듣던 때이다. 당연히 15세가 아이 취급을 받는 게 더 어색할 수밖에 없다.
또한 별 문제 없이 살았다면, 30세를 좀 넘은 나이에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는것도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또 50세 정도면 장수했다는 말을 들으며, 60세를 넘어갈쯤 마을 단위 혹은 국가 차원에서 잔치를 해줄 정도였다. 막연히 환갑잔치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런 맥락이 깔려 있는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60세를 넘기는 게 정말 드문 경우였다.[13]
이는 당시 평균 수명과 연관 있는 거라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빨리 늙어서 30세 좀 넘어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었던게 아니라,평균적으로 빨리 죽어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 문제 및 영양학 적으로 문제가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무협은 내공이 있기에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무장해서, 마치 지금처럼 30대를 한창때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시대상을 보자면 정말 어색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은 30세가 넘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고 있는데, 혼자만 한창때라고 결혼도 안하고 독수공방 한다 생각해 보자.
이는 내공으로 젊어 보이고 아니고를 떠나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수준에 문제기에 민간인 대비 비교적 소수일 수밖에 없는 무림인들이 무시할만한 사항이 아니다. 애초에 절대 다수인 백성들과 황실에서조차 유지되는 사회 문화였으니까.
일례로 유학은 제 때에 결혼을 못하는 것 자체를 가장 큰 불효중 하나라 보았고,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제나이때 결혼을 못하면 부모가 죄를 지었다 보고 실제로 처벌까지 이루어졌었다.
여기까지 봐도 잘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데, 한국을 기준으로 보자면 고작 30년 전만 해도 장가를 못간 남녀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하자 있는거 아니냐는 인식이 세간에 깔려 있었을 정도였다. 괜히 당시에 부모들이 시집장가 가라고 성화였던 게 아니다. 지금처럼 부모 혼자 참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시를 고려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걸 무협지가 일반적으로 체택하는 명나라나 청나라 시기 기준으로 생각해 보자. 전제부터가 잘못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런 건 흔한 하이 판타지 장르의 엘프들 마냥 차원이 다른 수준의 수명을 가지고 아예 관계가 단절된 수준으로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서야 사실상 불가한 일이라 봐야 한다.
무협 자체는 한국에서 기원한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며 현지화 및 국내 작가들의 창작 과정에서 내용을 덧붙이거나 과하게 수정된 설정 덕에 다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오류[14]들이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정말 심각한 오류는 나이에 대한 개념이라 할 수있다. 서사의 시작 점부터 현실성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지화 과정을 좀 과하게 겪다 보니, 근현대 한국의 나이대별 일반적인 활동영역인 유치원생-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직장인 과 1:1로 매칭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작가 입장에선 독자의 상황이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것인데, 당연히 읽는 사람 입장에선 따로 공부하지 않는 한 오해 소지가 크기 때문에 한국무협은 어디까지나 한국무협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학자들 입장에서는 보기만 해도 콧방귀가 나올만한 내용이다만, 아무래도 현대인에게는 고리타분한 사서보다는 대체역사물이나 무협지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무협이 한국으로 넘어오고 나서 약 30년이 지나는 동안, 세간에 이런 오류 자체를 저변에 깔리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영향을 받았던 대체 역사물은 그 방점을 찍은 격.
그래서 현시점에선 과거에 조혼도 있었다 카더라 수준으로 인식하지 딱히 이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경우는 드믈다. 그러니까 다들 약관은 넘어야 결혼했을 거라 인식하고, 지학쯤에 결혼하는 이는 그렇게 많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라는 인식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조혼은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기준이지, 당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른 시점을 적령기라 불렀다. 쉽게 말해 지학을 맞이했을 때 혼인을 생각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애초에 지금처럼 연예를 하며 결혼을 했던 것도 아니고, 집안 대 집안 개념으로 각 집안의 어른들이 정해준 혼처로 시집가고 장가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15]
1.4. 기타
지학사라는 출판사 역시 이 '지학'이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2. 지구과학의 약어
자세한 내용은 지구과학 문서 참고하십시오.[1] 그렇다고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는건 아니다. 생애를 살펴 보면 알수 있겠지만, 당대에도 뛰어난 정치가이자 교육가이긴 했다. 노년에 들어서도 나라에서 인정 받던 인재였기도 했고. 당대에도 훌륭한 위인정도의 위치기는 했다. 단지 공자가 아직 생존하던 시점에 후대에서 처럼 모든 학자들의 스승 대접을 받는 수준까진 아니었다는 뜻이다.[2] 물론 공자 본인이 직접 작성한건 아니라는게 정설이다[3] 학문[4] 다른 고사성어도 그렇지만, 대략적으로 나는 이랬어 정도의 늬앙스지 너희들도 꼭 이렇게 해야 한다 라고 정의 한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왕도정치에 대한 공자의 사상을 말하며 지나가듯 부연 설명한 정도의 내용이었지 주된 내용이 아니다.[5] 마치 사춘기가 오는 시기가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6] 지금처럼 기계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손으로 힘든 농사일을 주업으로 하는데, 평생 힘쓰는 일이라고 해봐야 아주 가끔 물건 나르는게 다인 현대인과 비교해 힘이 약한게 더 이상할 것이다.[7] 현대 의학인 정립된 지금에야 수명이 급격하게 늘어서 인생의 신체리듬이 길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이게 어색할지 모르겠으나, 원래 대다수의 포유류는 2차 성징 이후 부터 성체로 활동한다. 대다수의 생명체는 자손 번식이 안정적으로 가능한 신체 상태가 되면 성체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부터 중근대 사회까지의 인간도 이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학이 지금 처럼 발달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전체 포유를 표본으로 놓고 보자면, 오히려 2차 성칭이 나타나고 보통 4-5년 이후인 20세 전후에야 비소로 성체로 인정받아 활동하는 현대 인류가 매우 독특하다고 볼 수있다.[8] 한국은 광복을 맞이한 뒤에도 꽤 오랜 기간 중세 조선의 생활상을 이어갔다. 특히 시골 등지는 이게 더 심하였고.[9] 지금은 공자가 72세에 사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부자연 스럽지 않다.[10] 쉽게 말해 라때 드립과 상통한다.[11] 애초에 그 시대상을 보자면 죽을 나이가 되었어도 가문에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12]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공부와 같은 자기 개발도 성인이 하는 일로 취급했었다. 지금처럼 공교육이 저변에 깔린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릴때부터 어느정도 기초 교육을 받아야 했겠지만, 심화 학습 자체는 어디까지나 성인이 하는 일로서 취급되었다. 즉, 15세에 출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게 아니라 그때쯤 한사람의 성인으로 관직에 뜻을 두고 심화 학습을 이어 나갔다는 거다. 관직에 출사하는 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씨 지난한 일이었기에 할아버지 소리 들을 때쯤에 출사하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13]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100세를 넘겼다며 뉴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늬앙스라 할 수 있다.[14] 은원보로 대표되는 은자의 사용방식이 가장 대표적인 오류로 지적되는 편이다.[15] 특히 결혼의 목적은 결국 후손을 만드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신체 리듬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임신과 출산 또한 큰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여성은 첫 월경 이후 부터 가장 건강한 상태로 아이를 임신하고 오랜기간 품은 뒤 출산 하는게 가능하지만, 아무리 고대라 해도 정말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이 아니라면 그래도 15세 이후에나 합방이 이루어졌었다. 이르게 결혼해 최대한 빠르게 임신을 하는 문화가 형성 된 이유는 그 이후로 계속 출산시 위험과 아이의 건강에 안좋은 쪽으로 노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대략 25세까지는 천천히 진행되다가 25세 전후로 하여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고, 30세 이후부터는 정말 위험해 진다. 가뜩이나 의료 기술도 변변치 않을때 확립되었던 문화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자세한 건 임신 문서를 참조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