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54:03

짐 베이커

짐 베이커
Jim Bak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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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제임스 오센 베이커
James Orsen Bakker
출생 1940년 1월 2일 ([age(1940-01-02)]세)
미국 미시간주 머스킨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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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목사 (미국 하나님의 성회[제명됨])(은사주의)
종교 개신교(신사도운동)

1. 개요2. 생애3. 몰락4. 음모론주의자5. 기타6. 대중 매체에서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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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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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텔레비전 전도사. 1974년 부터 자신의 아내 타미 페이와 함께 TV 설교 프로그램인 The PTL Club과 PTL Satellite Network를 진행했었다. 1980년대에는 팻 로버트슨지미 스와가트와 더불어 미국에서 매우 유명한 목사였다.

그러나 1987년 부터 성추문과 각종 비리 혐의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2. 생애

미니애폴리스에 소재한 North Central University라는 신학대학에 재학했다. 1960년, 같은 학교 학생인 타미 페이를 만나게 되고 1년 뒤에 결혼을 했다. 그는 재학도중 오럴 로버츠(Oral Roberts)라는 오순절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고 큰 영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를 중도에 자퇴하고 1964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와 아내는 팻 로버트슨의 CBN(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 방송국에 들어가 일하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처음에는 어린이 버라이어티 쇼를 주최했지만 이것이 CBN의 성장에 기여했다. 팻은 짐을 신임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심야대담프로그램인 700 Club의 MC직을 허락했다. 700 Club의 MC가 된 짐은 능수능란하게 프로그램을 진했고 짐 베이커는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

인기를 얻은 짐과 아내는 1972년, 팻 로버트슨과 결별을 한 뒤 1974년에 PTL 방송국을 설립하면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인기를 얻게 된 비결은 설교에 토크쇼예능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무려 100만이 넘는 시청자들이 그의 설교 방송을 시청했으며 전국에 500여개의 방송국 지부도 생겨났다. 짐 베이커는 신학적 조예가 별로였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능력은 뛰어났고 그 덕에 그의 설교를 들은 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동해 베이커가 설립한 PTL 재단에 기부를 했다. 그 덕에 짐 베이커는 순식간에 갑부가 되어버렸다.

짐 베이커는 1976년에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위락 시설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헤리티지 USA(Heritage USA)라는 이름의 대규모 테마파크를 건설했고 수 많은 부동산과 고급 승용차, 유람선들이 짐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닌 PTL 재단의 기금에서 횡령하는 방식이었다. 1979년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FCC)가 그의 횡령 혐의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그때 짐 베이커는 워낙 유명한 스타 목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되려 연방 통신 위원회를 비난했다. 그리고 짐 베이커는 자신의 수 많은 자금으로 FCC 인원들을 매수했고 결국 짐 베이커의 횡령 혐의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1985년 미국 국세청이 짐의 기금 횡령 정황을 포착했지만 역시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도 못했다. 짐 베이커를 따르던 수 많은 추종자들이 정치인들의 선거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3. 몰락


1987년, 개인 여비서 제시카 한(Jessica Hahn)을 짐이 약물을 먹인 뒤 강간을 했다. 그리고 입막음용 비용으로 279,000 달러를 지불했다. 그 비용 역시 짐의 개인 재산이 아닌 PTL 재단 기금에서 횡령한 것이었다. 짐은 자신의 횡령을 은폐하기 위해 두 가지의 장부를 보관했는데 이 것이 결국 덜미가 잡혀버린 것이다.

한 번의 폭로는 어마어마한 폭로의 홍수로 이어졌다. 짐 베이커의 동성관계, 온갖 부정부패와 횡령들이 폭로되면서 짐 베이커는 PTL 재단에서 사임했고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문제는 짐 베이커는 일개 목사도 아닌 미국 기독교계를 선도하던 거물급 목사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수 많은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짐 베이커의 비행에 큰 충격을 받았고 미국 교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버렸다.

1989년 10월 24일, 짐 베이커는 결국 횡령,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45년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짐은 '내가 틀렸었다.(I was wrong)'라는 책을 낸 뒤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회개를 강조하며 사람들의 용서와 이해를 촉구했다. 일부 사람들은 짐 베이커를 받아들였지만 대부분은 책의 내용을 지적하고 회개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그를 비판했다. 그의 회고록에서 스캔들의 시작이었던 제시커 한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에게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003년에 짐은 다시 자신만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재기를 노리기 시작했다.

4. 음모론주의자

2003년 부터 The Jim Bakker Show를 진행하던 짐 베이커는 생존주의음모론에 입각한 반지성주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망언을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허리케인 하비하나님의 천벌이라고 주장하질 않나 도널드 트럼프가 탄핵되면 2차 남북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하질 않나 이전보다 더욱 맛이 간 설교들을 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리즈 시절에는 번영신학에 입각한 설교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이 911 테러플로리다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자신이 만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치료제가 만능통치약이라고 선전하면서 FDA로부터 경고처분까지 받기도 했다.# 결국 그는 고소를 당했고 치료제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5. 기타

  • 그의 아내 타미 페이는 이혼 이후 교회 건축업자 로 매스너와 재혼한채로 LGBT 인권운동가로 살다가 200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 그의 아들 제이 베이커는 아버지와 완전히 절연했으며 보수적인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퀴어신학을 표방하는 진보적인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 미국의 또 다른 TV 설교가 지미 스와가트가 짐 베이커의 추문을 비판했지만 얼마 가지도 않아 그 역시도 추문으로 몰락해버렸다.
  • 그가 세웠던 헤리티지 USA는 주인을 잃은 뒤 수십 년 동안 흉물스러운 폐건물로 남아있다.
  • 적어도 조금의 양심은 남아있는지 빌리 그레이엄의 장례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예수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 1979년에는 KFC 창업주인 할랜드 샌더스가 그의 쇼에 출연한 적이 있다. 물론 샌더스 본인은 짐이 부적절한 목사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출연했을 것이다.

6. 대중 매체에서

7. 같이 보기


[제명됨]